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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오늘날 일터에서 직장인들이 직무과부하를 겪는 현상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사회적으로 일-생활 균형을 중요시하는 가치관이 보편화되고 혁신과 창의성이 지속가능한 기업의 핵심 역량으로 대두되면서, 직무과부하의 부정적 영향력을 설명하고 바람직한 조직 관리를 위한 시사점을 도출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직무요구-자원모델과 자기조절이론, 그리고 인지적-에너제틱 프레임웍을 기반으로 직무과부하가 과업성과에 미치는 영향을 고찰하고 그 경계 요건을 제시하는 목적을 수행하였다. 한국 대기업 종사자 206명을 대상으로 수집한 설문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은 연구 결과를 도출하였다. 첫째, 직무과부하는 에너지 감소를 통해 과업성과를 저하시키는 간접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둘째, 개인의 성과증명성향은 직무과부하와 에너지 감소 간의 관계를 조절하였다. 구체적으로 성과증명성향이 높을수록 직무과부하가 에너지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셋째, 성과증명성향이 ‘직무과부하→에너지→과업성과’의 관계를 조절하는 조절된 매개효과를 검증하였다. 성과증명성향이 낮을 때에는 직무과부하가 에너지 감소를 통해 과업성과를 저하시키는 간접효과가 유의하였으나, 성과증명성향이 높을 때에는 이러한 간접효과가 유의하지 않았다. 본 연구는 직무과부하와 과업성과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통합적 메커니즘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이론적 공헌이 있으며, 직무과부하 상황에서 개인 조직구성원과 조직 차원에서의 에너지 관리의 필요성, 그리고 창의성과 혁신을 중요시하는 현대 조직에서 직무과부하에 대한 관리 등의 실무적 시사점을 제시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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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종친은 국왕의 8촌 이내의 친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종친에게 종반직 을 수여하여 왕실구성원으로서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대우하였다. 종 친은 친진되어 종친의 지위에서 벗어나면 과거를 통해서 관직에 진출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왕실구성원에서 사대부가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종친이라 하여 사회·경제적 지위가 한결같지 않았다. 관직 진 출의 통로인 문과·무과·생원진사시 합격자를 고루 배출한 왕자군파는 94개 왕자군파의 51%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합격자를 배출한 왕자군 파 내에서도 여러 갈래 지파로 나뉘기 때문에 사대부가로 정착한 집안 이 많은 편은 아니다. 본고에서는 정종의 10남 덕천군파 이유간 가계가 종친에서 사대부 가로 더 나아가서는 문관관료 가문으로 성장해간 과정을 통해서 종친 에서 사대부가로 변모해갈 수 있었던 요인들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덕 천군 이후생은 정종의 아들로 태어나서 친왕자로서 봉군되지 않았다. 이후생은 덕천정이란 종반직에 처음 제수된 후 1460년(세조 6)에 봉 군되었다. 그의 아들 이효백·이효숙·이효성·이효창 등은 모두 무예가출중하였으며, 장남 이효백과 3남 이효성은 세조 때에 무과에 급제하였 다. 덕천군 가문은 종친으로서 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 등 여러 국 왕의 신임을 받아 당대에 봉군되어 핵심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덕천군 집안은 명문가문과 혼인하여서 정치·경제·사회적으로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유간은 덕천군 장남 신종군 이효백-장남 완성군 이귀정-4남 함 풍도정 이계수 가계 계통이다. 함풍도정 이계수의 아들 이수광이 이유 간의 부친이다. 이수광은 종친의 지위에서 벗어난 정종의 5세손이었 다. 그는 관직에 나가지 못하였고, 국왕 친족이 들어갈 수 있는 특수 군종인 충의위에 입속되었다. 그에게는 3남 2녀가 있었는데, 3남인 이 유간이 생원시를 거쳐 관직에 나감으로 사대부가로서의 기반을 마련하 였다. 이유간이 관직에 나갈 수 있었던 요인은 생원 획득과 그를 문음으로 추천할 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수광이 정종의 5대손으로 충의위에 소속되는 데 그쳤기 때문에, 이유간과 그의 형제들이 가문을 배경으로 문음에 추천되기는 어려웠다. 이유간은 생원을 획득하여 문음 추천 대 상이 되었고, 그를 추천해 줄 현직 관원이 있었다. 즉 과거와 종친 가문 출신이었기에 형성된 왕실 친인척 그리고 관료 가문과의 인적 네트워 크가 그를 기신하여 관계로 진출할 수 있게 한 바탕이었다. 게다가 이유 간의 아들 이경직·이경설·이경석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서 관계로 나감으로써 이유간 가계가 사대부 가문으로 성장해갈 수 있는 탄탄한 기반이 되었다. 장남 이경직은 광해군대 관료 생활을 시작하여 어려움 이 있긴 했으나 인정반정 이후에는 평탄하게 관료 생활을 하여 당상관 에 올랐다. 3남 이경석은 문과에 급제한 후 7년 만에 당상관에 올른 탁월한 엘리트 관원이었다. 성공적으로 사대부가로 자리 잡은 후에도 이경직·이경석 후손은 지속적으로 생원진사시 그리고 문과에 합격하였다. 한 집안에서 3~4 대 연속적으로 문과급제자가 배출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경직·이경석 후손은 번갈아가며 각 세대마다 끊임없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러나 이들은 소론 핵심 관료이었기 때문에, 숙종 후반 과옥과 영조대 나주 괘서사건 등 노론과의 정쟁으로 집안이 멸문지경에까지 이르렀 다. 이러한 정치 상황에서 이경직 후손 중에는 학문에 몰두하여 양명학 을 연구하는 강화학파로 이름난 집안도 있었다. 18세기 후반 정조대 이유간 가계는 다시 문관 관료가 배출되기 시작하여 19세기 외척 세도 정치기에도 문관관료 가문으로서의 위상을 지켜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