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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943년에 출간된 하겸진의 『동유학안』은 일제강점기 유일의 ‘學案’ 식 저술이다. 이 책은 한국의 유학자 152인을 16개의 학안으로 분류하여 상중하 3책 23편에 싣고 있다. 이 책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크게 세 부분으로, 형식적 체계와 구성, 학안과 학파의 분류 및 배치, 그리고 수록 인물과 그 평가가 그것이다. 본 연구는 하겸진의 『동유학안』이 보여주고 있는 이 세 가지 측면에 주목해 그 내용을 분석하고 그 특징과 의의를 확인하고 있다. 무엇보다 성리학적 전통을 계승하려는 하겸진의 지향은 형식적 체계와 구성에서부터 분명하게 확인되며, 그것은 학안과 학파의 분류 및 배치, 수록 인물과 그 평가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이와 함께 『동유학안』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특징을 찾는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도통론적 시각’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동유학안』은 철저한 도통론적 토대 위에서 서술된 성리학사였고, 체제나 형식적 측 면에서도 ‘도통론적 시각’은 철저하게 관철하고 있다. 또 도통론은 단순히 『동유학안』이 견지하고 있는 시각에 그치지 않고, 조선성리학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이기도 했다. 『동유학안』에서 그려지고 있는 조선성 리학의 전개사는 곧 도통의 전개사였다. 『동유학안』은 그 자체로 이미 조선성리학의 전개사를 도통론이라는 하나의 시선 속에 일관되게 담아 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유학안』이 일관되게 견지한 도통론적 시각은 동시에 『동유학안』의 피할 수 없는 한계이기도 했다. 그 한계는 도통론 자체가 절대적인 진리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그런 까닭에 근대적인 학문 방법론과는 가까워질 수 없었고, 당연히 학문적 객관성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동유학안』은 한주학파의 끝자락을 장식한 하겸진의 시선을 통해 조선성리학의 전개 과정을 그려볼 수 있는 귀중한 계기를 제공해 주고 있다.
        2.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최치원은 12세에 唐으로 유학을 떠나 6년 만인 18세에 賓貢科에 급제하여 현지에서 관료로 활동하였다. 16년 동안의 당 나라 생활, 그 리고 28세에 귀국한 이후 신라에서의 활동에서 그는 탁월한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여기에 더해서 그 스스로 유학자로 자처하면서, 그의 학문은 곧 ‘詞章學’으로 이해되었고,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받 아들여졌다. 그런데 이 글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의문을 제기한다. 기본적 으로 최치원의 학문이 사장학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면 서도, 그의 학문이 정말 우리가 믿고 있는 만큼 순수하게 사장학적인가 하는 것이 이 글의 문제의식이자 출발점이다. 최치원의 유학사상에 사장학이 아닌 새로운 지향이 함축될 수 있다 는 점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무엇보다 그가 당나라에 들어가기 50여 년 전, 흔히 송명리학의 선구로 알려져 있는 한유나 이고 등에 의해 이미 유학의 질적 전환이 시도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아진다. 이들의 활동이 당시 크게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새로운 방향으로의 첫 걸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 은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당나라 중기 이후 사장학 내부에서 발생한 이와 같은 변화의 흐름을 최치원이 직간접으로 계승하고 있는지 여부 는, 결국 한유와 이고 등의 지향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확인하는 것과 함께, 그와 유사한 지향을 최치원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핵심이 된다. 이 글에서는 최치원에게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 첫째로 사장학 의 한계와 함께 그것을 넘어서는 학적 체계를 인정하는 탈사장학적 특징, 둘째로 직접적으로 성리학과 연결시켜 이해할 수 있는 지향을 구분하여 살펴보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최치원으로부터 우리는 사장학적 한계를 넘어서는 탈사장학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經典의 전통보다는 四書의 전통을 준비하고, 공자와 맹자를 道統의 중심에 세우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성리학을 향한 발걸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충분히 사장학으로부터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사장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그에게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3.
        201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溪南 崔琡民(1837-1904)은 기정진의 제자이자, 다양하게 전개되어 온 기호 학맥의 끝자락을 장식한 인물이다. 특히 그는 그의 스승 기정진과 함께 율곡학 파에 귀속되긴 하지만, 그의 성리학적 구도는 율곡학이나, 이이의 시각을 수정 없이 그대로 계승한 계열과 많은 차별성을 보여준다. 이 논문의 목적은 최숙민 의 성리학이 어떤 측면에서 율곡학의 관점과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는지 그의 리기론과 심성론에 대한 분석을 통해 확인하는 데 있다. 아울러 그러한 차별성 에도 불구하고 그가 왜 여전히 율곡학파의 일원으로 분류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의 성리학이 조선성리학의 전개사에 있어서 어떤 좌표에 위치해 있는지를 분 석하고 있다. ‘氣發理乘一途’와 ‘심은 곧 기(心卽氣)’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는 이이의 성리학이 떠안아야만 했던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성리학의 궁극적인 목 표였던 ‘도덕실천의 필연성’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는 것에 있었다. 그리고 이 렇듯 이이가 남겨둔 문제는 이이의 후계자들이 어떤 형태로든 해결해야 할 과 제이기도 하였고, 율곡학파의 전개사는 곧 이 문제에 고민하며 그 답을 찾아가 는 과정이기도 하다. 최숙민의 성리학에는 율곡학파 300년의 고민이 담겨져 있 다. 그 고민의 결과가 리기론에서는 주리적인 성격의 강화로, 심성론에서는 ‘심 이 곧 리(心卽理)’라는 명제로 나타났다. 물론 이것은 최숙민의 문제해결 방식 이다. 그리고 그의 철학체계는 혹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겠지만, 최소한 율 곡학파가 고민하던 문제에 대해 그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 의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