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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결과 3

        1.
        200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면우 곽종석은 한주 이진상의 수제자로 寒洲學派를 대표하는 학자였다. 그는 당시에 이단으로 배척받던 한주의 성리설을 수용하였고, 그가 한주에게 執贄의 禮로 올린 󰡔지의록󰡕은 한주 성리설의 입문서가 되어 경상우도의 신진 학자들 사이에 두루 읽혀 한주학파의 형성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면우는 󰡔지의록󰡕에 대한 한주의 답변 중에서 유독 氣質之性 한 조목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여 한주와 논변하였다. 喜怒哀樂의 감정이 일어나기 전인 未發 상태에서 기질이 있느냐 없느냐, 기질의 개념이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 제를 가지고 논변을 전개한 것이다. 면우는 관점을 달리하는 논거를 두루 제시 하며 기질지성을 희노애락 미발의 상태에서의 性의 개념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 했고, 한주는 자신이 朱子의 晩年定論이라 믿는 설에만 의거하여 기질지성은 性의 개념이 아님을 강조했다. 즉 면우는 기질은 성과 함께 태어날 때부터 형성 되는 것이니, 기질에 의해 제약된 성이라 할 때 ‘기질에 의해 제약된’까지도 성 의 개념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한주는 성의 時分인 미발에서는 氣가 작용 하지 않고 성의 본체만 온전히 드러나므로 기질을 성의 개념에 넣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면우는 실상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한주는 개념 정립을 중시 했다고도 할 수 있다. 또한 면우는 기질지성에 대한 기존 학설들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한 주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고증한 주자와 퇴계의 만년정설만을 논거로 삼았다. 면우는 ‘미발 상태에서 기질이 없지는 않지만 기질을 말할 필요는 없다’ 한 한 주의 결론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면우가 기질지성에 관한 기존 학설의 개념들을 다 부정한 것은 아니다. 면우는 미발을 性의 상태로 규정, 기 질이란 개념을 용납하지 않는 한주의 학설을 수용하면서 여러 관점에서 기질지 성의 실상과 개념을 함께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면우의 이러한 학문 성향이 그 후에 나오는 그의 학설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살펴보는 것은 추후의 과제로 남겨둔다. 이 문제는 스승인 한주의 학설과 대체에서 다를 수 없는 면우의 학설 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에도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다.
        2.
        200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勿川 金鎭祜는 寒洲 李震相으로부터 性理說을 전수받았지만 性齋 許傳의 문 하에서 먼저 수학하였고 학맥의 계보 상으로도 한주보다 오히려 성재 쪽의 近 畿學派에 더 가깝다. 물천은 한주의 제자인 俛宇 郭鍾錫과의 논변을 통하여 한주 성리설의 핵심인 七情理發說을 수용한다. 그러나 여전히 分開看에 의해 理發 · 氣發을 분명히 구 별할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한주의 학설을 대체로 수용하면서 한주의 竪看 · 橫 看 · 倒看 三看과 順推 · 逆推 二推라는 용어만은 끝내 사용하지 않는다. 특히 물 천이 한주의 대표적인 학설인 心卽理說의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는 竪看 대신 퇴 계 이후 전통적으로 사용되어져 온 渾淪看을 사용하는 것은 그가 性齋로부터 이 어받은 近畿學派의 학맥을 고수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한주는 主理의 필요성을 극히 강조했으나 물천을 주리를 주장하는 것을 꺼 렸고 주리라는 명목을 따로 세울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는 각자의 학문성향 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며, 또한 학문적 노선에서 寒洲學派와 상반된 주장이다. 물천이 성리설에서 시종 后山 許愈 · 俛宇 郭鍾錫 등 한주의 제자들과 다른 견 해를 보이는인 것은 성리설을 뒷받침하는 논리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후산이 한주의 삼간에 의거하여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는데 물천은 기존 영남학파의 혼 륜간과 분개간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내용이 서로 매우 흡사한 데도 서로의 견해의 차이를 좁히지 못한 것이다.
        3.
        2001.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Dong-gang Kim, U-ong (1540-1603) who was born in Sung-ju, Kyungsang-bukdo, studied under the guidance of Namm-yung Jo, sik as well as Toe-gye Yi, whang. However, as he himself professed, his main influence was from Mam-myung, for he often attended his seminars for Chinese Classics from the age of 24 to 33, before he went into politics. He complied and wrote Nam-myung's Lessons and Anecdotes(言行錄), and Biography(行狀), which attested to his status as the foremost disciple of the Nam-myung school. Before attending Nam-myung's lectures, Kim, U-ong was well acquainted through his father with the study of Kyung(敬), the cultivation of self as the center of the universe, and also had the Confucianist principle of employing himself in politics(出處). He advanced these studies under Nam-myung's instruction. He received a bell called Sungsung-za(惺惺子), which Nam-myung had always carried with himself as a reminder of constant awakening, and established the discipline and the practice of the study of his own mind. All of these experiences became an important qualification in the field of politics, and he clearly showed this discipline in deciding when he should go into or out of a political world, accept or decline government services. His study of Kyong, which was consistent in his achievements, characteristically put an emphasis on the study that preserves the clarity of mind, and it was a succession to Nam-myung's study of mind. It also was a little different from the study of Kyung conducted by Toe-gye school, in that Toe-gye focused on the maintenance of reverent and cautious state of mind. Kim, U-ong read books in neo-Confucianism, such as The Reflections on Things at Hands(近思綠), as well as Ju-hi's Epistle Anthology(朱書節要) edited by Yi, whang. On the basis of his interpretation of neo-Confucianism, he developed his own unique perspective in seminars of Chinese classics at the royal palace, and won a reputation as one of the best scholars of the time. Especially, his theory on the right and the wrong(辨異端) differed from that of Nam-myung, and it showed that he was influenced rather by Toe-gye. In conclusion, U-ong Kim established his own philosophical perspective through harmoniously integrating both Nam-myung's view and Toe-gy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