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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天齋 벽화에 대한 고찰 KCI 등재

Research on the Three murals in the SANCHEUNJAE(山天齋)

산천재 벽화에 대한 고찰

  • 언어KOR
  • URLhttps://db.koreascholar.com/Article/Detail/31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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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연구 (The Nammyonghak Study)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The Nammyong Studies Institute)
초록

南冥 曺植의 晩年 講學地인 山天齋에는 3점의 벽화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 벽화는 여타 선유들의 강학 공간에서는 보기 힘든 것으로 퍽 이채로운 유물이 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벽화의 所從來에 대하여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언급한 글을 접하지 못하였다. 필자는 평소 남명의 풍도에 감화를 받아 선생이 남긴 글 들과 참고 자료를 읽고 선생의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장소를 답사하는 가운데 우 연히 그 벽화의 소종래에 대한 심증을 얻게 되었다. 仁祖反正과 함께 찾아온 北人의 몰락으로 그들의 地域的, 師承的 근거가 되었 던 江右 지역은 200년 가까이 출사길이 막혔고 그로 인해 학문이 침체되어 있 었다. 그러던 것이 1796년에 내려진 正祖의 賜祭文을 기점으로 하여 이 지역에 학문이 불이 일듯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의욕적으로 다시 일어난 남명에 대한 文廟從祀 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賜祭文碑 건립과 함께 山天齋의 재건 이 이루어졌다. 산천재 벽화는 1818년 산천재의 중수 때 강우 유림들이 四聖賢遺像을 환봉 한 것과 함께 그려진 것으로 필자는 추측한다. 이 벽화에 그려진 인물은 商山四 皓, 巢父・許由, 伊尹이고 그 소종래는 바로 정조의 사제문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정조의 사제문에는 정조의 깊이 있는 남명관이 잘 나타나 있는데 이 것이 江右 유림에게 있어 당시의 현실에서 남명을 선양하기에 시의적절한 계기 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산천재 벽화의 연원은 결국 남명의 사상에 맥이 닿 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Three murals(壁畵) in the SANCHEUNJAE(山天齋), which was the site for lecture of Josik(曺植) who often called as Nammyeong(南冥), still remains till today. These murals are quite distinctive ones, which are hard to find in the activity sites of other elder Confucianism scholars. However, there is no document clearly touches on the evidence about the source of these murals. The author used to be influenced by the personality of Nammyeong, and occasionally found the evidence about the source of murals by referring to the articles written by him, reading relevant documents, and visiting the places where he had been to. As the declination of the Bukin(北人) after the event, the reformation by king Injo (仁祖反正) of the Joseon dynasty, their path to become officials, which was based on the region and tradition, already forming for nearly 200 years, had been blocked, and it also caused their culture stagnation. In 1796, started with the SAJEMUN (賜祭文) conferred by king Jungjo(正祖), the culture in this region began to revive. At this juncture, the movement, called MUNMYOJONGSA(文廟庙從祀), sprung up enthusiastically, which made the Stone tablet of SAJEMUN(赐祭文碑) built and the SANCHEUNJAE rebuilt, although it turned out a failure at last. The author inferred that murals in the SANCHEUNJAE were painted at the same time with the renewing of Portraits of four Confucianism sages(四聖賢遺像) in 1818, at the same year of rebuilding of the SANCHEUNJAE. In murals, there are SHANGSHANSAHO(商山四皓). Sobo(巢父), Heoyoo(許由), and Yiyun(伊尹). The author also thought it was the SAJEMUN of king Jungjothat was the source of murals. In the SAJEMUN king Jungjo’s deep comprehension of Nammyeong appeared in time, it would be suitable for the Confucianism scholars in GANGWU(江右) region to enhance Nammyeong, which would further more make the source of the murals, which have the connection with Nammyeong theory.

목차
Ⅰ. 머리말
Ⅱ. 伊尹에 대한 南冥의 생각
Ⅲ. 山天齋 벽화의 所從來와 그 의미
Ⅳ. 맺음말
저자
  • 金鍾泰(민족문화추진회 국역실 전문위원, 남명학연구소 특별연구원) | 김종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