錢時(1175∼1244)는 중국 남송대 유학자로, 육구연의 학문을 계승하여 심학적 사상 을 바탕으로 여러 경서들을 해석했다. 본인은 전시의 四書 주석서인 融堂四書管見 을 번역하여 주희의 해석과 어떻게 다른지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으며, 현재는 전시 의 尙書주석서인 融堂書解를 번역하여 전시의 경학에 관한 연구를 점차 확장시 키고 있다. 이전 논문에서는 「禹貢」편의 旅자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주희의 제자 인 蔡沈(1167∼1230)의 書集傳과 비교해 보았는데, 이번 논문에서는 그동안 진행했 던 중국 남송대 유학자들에 관한 연구를 조선의 성리학까지 확장시켜, 한국과 중국 유학자들간의 비교철학적 지평 위에서 「洪範」편을 연구해보고자 한다. 전시의 해석 은 전체적으로 보면 여러 경전을 모두 아우르는 일관된 해석을 하고 있지만, 부분적 으로만 보았을 때 일반적으로 익숙한 주희의 해석과 다르다는 이유로 크게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전시의 해석만 살피기보다 역대의 다른 해석들과 비교하며 어떤 해석이 더 논리적인지를 비교해보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 기에, 이번 논문에서는 融堂書解와 조선의 22대 국왕 正祖의 經史講義‧書를 비 교 대상으로 삼아, 정조의 논의를 중심으로 한대부터 시작되어 형성된 홍범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주요 논점에 대해서 알아보고, 그 논점에 대한 전시 의 해석을 이해해 볼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역대의 「홍범」에 관한 논변 위 에 전시의 해석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 고찰해 보고, 전시와 정조 두 사람이 파 악한 「홍범」편의 요지를 정리하며, 다양한 관점으로 「홍범」편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자 한다.
The king of Joseon Dynasty Jeong-jo commanded the renovation of Seongjeong-gak, once a study for crown prince, to serve as Pyeonjeon(便殿), a main office for kings. The renovated building strictly separated the routes designated for the king and the other officers, respectively. The interior space consisted of Youngnae, reserved for the king and his senior aides, and Youngwae, for lower ranking officers. Youngnae(楹內) and Youngwae(楹 外) corresponded to the two blocks (the space between two columns) on the east and west side, respectively. Such structure of Pyeonjeon was heavily transformed over several occasions beginning from the late nineteenth century. Youngwae was subdivided into separate spaces, and the routes for the king and the officers became indistinguishable.
Paldalmun gate was built in 1794 as the southern gate of Suwon Hwaseong. The signboard’s paintworks of Paldalmun gate was applied to the signboard of the state-run building in the 18th century. The signboard of Paldalmun gate was repainted along with the building when repaired in 1969. In that time, the signboard’s paintworks during the reign of Jeongjo era was transformed.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store the image of Jeongjo era paintworks on the Paldalmun’s signboard, which has been modified since the 1960s due to modification. For the purpose of the examination, we examined the traces of paintworks remaining on the signboard of Paldalmun gate and examined several state-run signboards decorated with ‘Yukhwamoon’ paintings similar as the signboard of Paldalmun gate, which made around the 18th century. Through the above-mentioned researches, typical color features were identified in the decorated with ‘Yukhwamoon’ paintings on signboard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In addition, the type of pigment used in the signboard’s paintwork of Paldalmun gate was verified through the 『Hwaseong Seongyeok Uigwe(華城城役儀軌)』 and the 『Han-gul Jeongri Uigwe(한글整理 儀軌)』, while analyzing the characteristics of age-related deterioration according to the type of paintworks in various traces of pigment coatings remaining on the signboard of Paldalmun gate.
본 연구는 현륭원이 여러 왕조에 걸쳐 왕릉후보로 거론된 과정을 살펴보고, 정조의 풍수 인식과 함께 실패한 재혈(裁穴)에 대해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현륭원의 입지를 논하는 과정에서 윤선도의 논리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인용되고 있으며 활용되는 모습이다. 그러나 현륭원의 재혈과정을 통해 정조가 이루고자 하였던 목표는 일정 정도 차질을 빚고 있는데, 여러 특징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입수룡과 좌향이 현저하게 틀어진 모습을 보이는데, ‘對珠向空’이라 해서 여의주 형상의 안산에 집착한 결과라 하지만, 입수룡과 혈처가 같은 선상에 자리하지 못하고 있다. 혈토의 출현을 중요하게 고려한 것으로 『홍재전서』에는 기록하고 있으나, 정조의 의도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정조의 의지에 따라 천원한 현륭원은 길지를 선정하였으나 재혈에 실패함으로써, 정조가 의도한 결과물이 완성되지 못하였다. 본인이 직접 발로 뛰고 확인한 것이 아닌, 보고에만 의지한 결과는 여러 논란의 여지를 만들었다.
본고는 이광수의 역사소설 <단종애사>가 당시 식민지 시대의 대중문화(유행가)와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 밝혀보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광수의 문학이 과도하게 계몽적임을 비판하면서, <단종애사> 역시 그 한계를 띤 작품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다시 생각해볼만하다. 따라서 본고는 <단종애사>가 산출된 시기를 전후한 대중문화 중 유행가 <사의 찬미>, <황성의 적>, <낙화유수>를 살펴본 후 그것이 부재 에 대한 비애의 정조라는 통속적 감정과 관련이 있음을 밝혔다. 하지만 이광수는 대중들의 기대지평에 맞게끔 비애의 정조를 활용하여 통속적인 소설을 창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의 작가의식을 용해시켜 식민지 시기의 시대정신을 <단종애사>에 담아내고자 하였다. 다시 말해, 통속성 속에 보편성을 담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단종애사>에 나타난 식민지 시대정신은 바로 비애가 어디에서 왔는지 질문할 수 있는 문제제기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면모는 같은 시기에 나왔던 딱지본소설 <단종대왕실기>와 비교해 보았을 때 더욱 선명해진다. 따라서 <단종애사>는 단순히 계몽운동의 한 일환으로 평가하기 보다는, 식민지 시기의 시대정신을 잘 담아내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해야할 것이다.
Hyeunryungwon is a tomb for Crown Prince Sado, who was the father of King Jeongjo, the twenty second king of Joseon dynasty. The tomb had been originally in the Eastern part of Seoul, but was relocated in 1789 to the downtown Suwon, which was renowned as a good tomb site among the Royal family at that time. King Jeongjo looked through the records from the previous generations for the ideal location and direction for the tomb. He personally studied Feng Shui theory and designated its location and direction. He ordered for lavish decorations for the stone adornments of the surroundings of the grave mound, which was against the regulations of the royal family. He found his reasons in the precedent that allowed sumptuous decoration. However, for the arrangements of Jeongjagahk(T shaped building) and other attached facilities, he made unusual choice that other precedent royal tombs did not have. Instead of following the conventions that Jeongjagak should be facing south of a grave mound, he put it on the right side of grave mound. Also conventionally, Subokbang(a place where guards can stay) and Suragan(a kitchen that prepares food for sacrificial rites) should be facing symmetrically, but they too, were on the same side with Jeongjagak. It was a measurement that the grave mound of Hyeunryungwon can have a full view without being obstructed by other facilities and it was also personally ordered by King Jeongjo. The distinguishing features of Hyeunryuwon was motivated by King Jeongjo’s filial affection, and his academic pursuit of precedent royal tombs initiated the unconventional and innovative challenges.
Jeong Woo-tae(?-1809) was a military official who had worked as Byeol-Gan-Yeok in the governmental construction works during the late 18th century through the early 19th century. Byel-Gan-Yeok, literally a special technician, was an official post in the governmental construction works that carries specific technical tasks from the mid 18th century. Over 30 years, Jeong Woo-tae had devoted himself in the construction of various royal tombs, city walls, and palace buildings. He showed superb and various techniques in the works of stone carving and architectural details. After finishing the construction of the tomb of King Jeong-jo's father successfully, he was appointed as a governor of a rural town. Being on duty of the governor, he used to participate in the construction works as a technician. He also made a couple of innovative devices in the field of construction, like a carrying apparatus, Byel-Nok-No. His works secured the setting up of the post of Byel-Gan-Yeok in the governmental construction system in the 19th century. But his technical achievement remained as his own private works rather than developing to the universal growth of the craftsmen's skill. This might be a limitation of the Byel-gan-Yeok's role, whose position was remained in the midway between official and craftsman.
본 연구는 가축유전자원의 효율적 보존을 위해 정조세포를 줄기세포 형태로 장기보관하면서 필요에 따라 증식, 분화를 통해 가축의 복원에 활용하기 위한 연구의 일부로 진행되었다. 정조세포를 분리하여 배양한 결과 배양온도는 다른 세포들과는 달리 에 세포분열이 활발하였으며, TCM199에 FCS를 첨가한 배양액과 세르톨리세포 공배양으로 정조세포의 배양을 지지하였다. 40일령이 지나면서 정조세포 콜로니 즉 germline stem cells를 형성하였으며, 일부에
벼 수확 후 지역브랜드로 유통되는 벼의 저장 중 저장온 도 및 저장기간에 따른 이화학적 특성, 지방산도 및 지방산 조성의 변화를 조사할 목적으로 신동진, 일미, 추청, 호품, 히또메보레 등 5품종을 저장온도를 달리하여 저장한 후 4개월마다 밥의 조직감(texture), 알칼리붕괴도(ADV), 도요 윤기치, 밥의 호화특성, 지방산도 및 지방산 조성 등을 분석 한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밥의 경도는 밥의 씹힘성과 고도로 유의한 정의 상관 관계를 나타냈고 밥의 부착성과는 부의 상관관계를 나 타냈으며 밥의 응집성은 밥의 탄력성과 정의 상관관계 를 나타냈다. 밥의 경도는 저장기간이 길어질수록 증 가하였고 밥의 응집성은 저장전과 비교해서 저장온도 및 저장기간에 따라 품종 간 뚜렷한 차이를 나타내지 않았다. 2. 알칼리붕괴도는 품종 및 저장기간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저장온도에 의한 영향은 미미하였다. 일미와 추청의 경우는 저장온도 및 저장기간에 따른 변화가 거의 없었으나 신동진, 호품 및 히또메보레의 경우는 상온저장의 경우 저장기간에 따라 통계적으로 유의한 차이는 나타나지 않은 반면 저온저장의 경우는 저장기 간이 길어질수록 ADV 값은 작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3. 도요윤기치는 저장초기에는 품종 및 저장온도에 따라 품종간 차이는 크지 않았고 대체로 저장 후 4개월 이 후부터 상온 및 저온저장 모두 도요윤기치 값이 떨어 지는 경향이었다. 4. 밥의 호화특성은 상온저장에서 최고점도의 경우 신동 진, 호품, 히또메보레 품종은 일미와 추청에 비해 저장 기간이 길어질수록 저장전보다 확연히 높게 나타났다. 강하점도 또한 상온저장시 저장전보다 저장기간이 길 어질수록 높아졌으며 치반점도는 저장온도와 큰 상관없 이 저장전보다 저장기간이 길어질수록 낮게 나타났다. 5. 현미의 지방산도는 저온저장보다 상온저장의 경우에 저장전과 비교하여 저장기간이 길어질수록 그 증가폭 이 컸고 백미의 지방산도는 저장전과 비교하여 저장 8 개월 후부터는 지방산도가 낮아지는 경향을 나타냈다. 6. 지방산 조성의 변화는 현미의 포화지방산 함량의 경우 저장 전에 비해 일미와 추청 품종은 저장기간이 경과 할수록 높아지는 경향이었으나 신동진, 일미 및 히또 메보레 품종의 경우는 저장기간이 경과하더라도 저장 전과 비슷한 함량을 유지하였다. 또한 백미의 포화지 방산 함량은 저장기간이 경과하더라도 상온저장 및 저 온저장 모두 저장 전과 비슷한 함량을 유지하였다. 현 미의 지방산 중 oleic acid와 linoleic acid의 함량은 저 장 전부터 품종간 차이를 나타냈고 그 외의 지방산 함 량의 변화는 저장 4개월 후부터 품종 간 차이가 나타 났다. 백미의 지방산 중 linoleinic acid와 stearic acid 의 경우 검출된 함량은 적으나 저장 4개월 후에 그 함 량이 현저히 감소하였고 palmitic acid는 저장기간이 경과할수록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1792년 정조는『奎章全韻』을 편찬한 후 각신 및 초계문신, 검서관을 포함한 9명의 신하들에게 문자에 관한 策文을 지어 올리게 하였다. 이에 文字策文 9편이 제출되었으며 그 중 현재 남아있는 글은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윤행임, 서영보의 대책이다. 문자책문의 집필배경이 된『규장전운』의 편집 방향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중국음과 조선음을 구별하여 각각의 규범음을 밝히는 것, 둘째, 俗音을 제거하고 압운 체계를 개정해 전아한 문사 창작의 지침을 마련하는 것, 셋째, 古音의 확정을 통해 古經을 읽는 데 도움이 되게 했다는 점이다. 6편의 문자책문에서 발견되는 공통의 문제의식들은 위 세 가지 목적에서 배태된 것으로,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도출된 상이한 견해들이 이 시기 문자학의 논점들을 형성하고 있다.첫 번째 논점은 글자와 소리 혹은 말의 관계 문제이다. 박제가는 문자에서 聲의 요소가 중요함을 일관되게 서술하였으나 중국어 사용 문제까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윤행임은 글자와 소리가 일치하는 중국어를 사용하여 중화에 가까워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유득공은 천하만국에 각자의 글자가 있다는 논의를 통해 기존의 華夷觀을 뛰어넘는 사고를 보여주었다. 두 번째 논점은 문자학의 효용에 관한 것이다. 이서구는 이 시기 六經의 이해를 위해 문자학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이와 달리 이덕무는 실제적인 名物에 대한 지식을 쌓는 데에 문자학의 효용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세 번째 논점은 字形의 변천과 異體字 문제이다. 유득공과 이서구, 이덕무는 모두 俗字, 訛字, 조선식 한자 등의 사용을 일절 금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이덕무는 시대에 따른 자형의 변천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강하게 피력하였는데, 이와 달리 서영보는 자형의 변천을 시대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았다. 이 때문인지 서영보는 이체자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다만 국가 문서에 글자를 잘못 쓰는 일을 엄히 단속해야 한다고만 하였다.이상에서 분석한 문제의식들은 18세기 후반의 전반적인 문자학 연구의 흐름 속에서 살펴볼 때 각각의 의의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또한 이 논점들이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어떤 방식으로 정리되는지, 나아가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발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고찰할 필요가 있다. 문자책문을 작성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당시의 학파나 가문, 당파 등에 따라 언어문자관이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는지에 대한 연구 역시 추가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다.
『大學類義』는 정조가 『대학』을 토대로 편찬한 군주 聖學의 교재로서 『聖學輯 要』와 깊은 관련이 있다. 정조는 세손 시절 『성학집요』 강독과 함께 抄出 작업 을 진행하였으며, 이것은 정조 5년 『聖學輯略』으로 완성되었다. 『성학집요』에 대한 이해는 『大學衍義補』로 확대되었고, 이것이 『대학유의』 편찬으로 귀결된 것이다. 『대학유의』의 편찬은 『大學衍義』와 『大學衍義補』의 내용을 초출하여 재편집 한 것이지만, 나아가 국왕의 입장에서 『大學』의 정신을 체득하고 스스로 聖學 교재를 편찬하려는 것이었다. 『대학연의』의 내용 중 「帝王爲學之本」에서 三代 이후 군주의 학문에 대한 3개 세목을 삭제하였는데, 이는 君師로 평가받는 삼대 의 군주만을 학문의 모범으로 삼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治國・平天下의 구체 적인 통치술은 그대로 수용되었다. 이는 삼대 군사의 이념도 구체적인 통치 과 정과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대학』이 추구한 全體大用의 학문체계로 완성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지향은 앞서 『성학집요』에서 모색된 것이었다. 이이는 『대학연의』의 시각을 계승하면서 통치 과정에 대한 내용을 수용하여 『대학』의 이념을 재구성 하였다. 이에 대해 정조는 『대학연의보』를 높이 평가하면서 그에 담긴 통치술 을 대폭 수용하였다. 이이는 『성학집요』를 통해 군주와 신료를 포함하는 보편 적 관점에서 효능을 말하고 군주에게 수신을 강제하려 하였다. 이에 대해 정조 는 『대학유의』를 통해 太平의 임무를 가진 국왕을 중심으로 놓고 여기에 신료 들의 보좌 역할을 규정함으로써 『성학집요』의 성학론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정조 함수율과 저장온도에 따른 쌀 품질 변화를 구명하고자 신동진벼와 동진1호를 함수율 13~14,15~16,~18% 로 조절하여 상온 및 저온에서 저장기간에 따른 품질관련 특성을 조사하였다. 1. 정조 함수율이 많고 저장온도가 높을수록 호흡율이 높았으며 함수율에 의한 호흡율의 차이가 저장온도에 의한 차이보다 컸다. 2. 발아율은 16개월 저온저장후 80%이상을 유지하였으나 상온에서는 저장기간이 경과함에 따라 급격히 감소하였으며 12개월 저장까지는 함수율이 높은 17~18% 에서 발아율이 높았으나 그 이후에는 15~16% 에서 높았고, 13~14% 에서는 16개월 저장후 10%이하의 낮은 발아율을 나타냈다. 3. 밥의 윤기치는 저장 초기에 급격히 감소하다가 그 후 완만해졌으며 저온에서 상온에 비하여 높았고 함수율이 많을수록 높게 유지되다가 12개월 후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4. 현미지방산도는 저장기간이 경과할수록 8개월까지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저온에서 상온보다 낮았고, 신동진벼가 동진1호에 비하여 낮은 경향이었다. 5. 식미관능평가치는 상온에 비하여 저온저장에서 양호하였고 신동진벼가 동진1호에 비하여 높았으며 저온저장 16개월 후 신동진벼는 함수율 17~18% 에서, 동진1호는 15~16% 에서 우수하였으며 상온저장시는 신동진벼와 동진1호 모두 함수율 15~16% 에서 좋았다. 6. 식미관능평가치는 현미색도 b값 > 밥의 윤기치 > 현미 색도 L값의 순으로 각각 0.731**, 0.625*, 0.615*의 정의 상관성을 나타냈으며 강하점도, 최고점도, 호화개시온도, 현미 지방산도와는 각각 -0.864**, -0.795**, -0.786**, -0.779**의 고도로 유의한 부의 상관성을 나타냈다.
분쇄하지 않은 정조상태에서 현미와 백미의 성분을 측정 할 목적으로 수확 후 정조로부터 스펙트럼을 획득하였고(투과법 : 850-1050 nm, 반사법 : 400-2500 nm) 현미와 백미의 단백질, 아밀로스, 지방산, 수분함량, 식미값의 예측모델을 개발하여 그 정밀도를 비교 검토하기 위해서 일련의 시험을 실시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투과법으로 정조의 스펙트럼을 수집한 후 현미의 단백질, 아밀로스, 지방산, 수분함량의 검량식을 작성한 결과 0.9001, 0.8321, 0.8077, 0.9553의 결정계수를 나타냈다. 백미의 단백질, 아밀로스, 수분함량, 식미값의 검량식을 작성한 결과 0.8255, 0.8559, 0.8226, 0.3421의 결정계수를 나타냈다. 반사법으로 정조의 스펙트럼을 수집한 후 현미의 단백질, 아밀로스, 지방산, 수분함량의 검량식을 작성한 결과 0.8286, 0.7705, 0.9094, 0.9694의 결정계수를 나타냈다. 백미의 단백질, 아밀로스, 수분함량, 식미값의 검량식을 작성한 결과 0.7904, 0.7679, 0.8435, 0.4881의 결정계수를 나타냈다. 이상의 결과에 의해서 단백질, 아밀로스, 지방산, 수분함량은 실용적인 결정계수를 얻었으나, 식미값은 결정계수가 너무 낮아 계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본고는 조선의 경학사에 일획을 그은 君王인 정조와 신하인 정약용의 학문적 만남을 詩經講義라는 텍스트를 통하여 조망한 논문이다. 이들의 만남에 주목하는 이유는 통상의 經筵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군왕이 자신의 의도로 선택한 인재와 질의응답을 통하여 새로운 경학의 세계를 확장하는 보기 드문 케이스이다. 우선 전통적 帝王敎育의 유형으로 정도전 · 권근 · 이황 · 이율곡 등의 사례를 들어 조선시대 경연이 추구하였던 이상적 교육상을 알아보고, 이것에 대응하는 역대 왕들의 경연 참석 상황을 살펴보았다. 정조의 캐릭터는 한마디로 말하면 好學의 學者적 君王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정조의 유교적 이상정치와 현실의 실현이라는 점점에 정약용을 비롯한 초계문신이 위치한다. 초계문신 뿐 만 아니라, 정조의 정치적 학운 활동에는 학파 • 지역 · 신분 의 차를 초월하여 다양한 유자가 참여한다. 이러한 열린 학문 활동은 곧 당시 사회의 개방성에의 지향을 엿보게 함과 동시에 보편 문화의 성숙을 알려준다. 『시경강의』를 통하여 살펴본 두 사람의 기본적 경학관은 상당히 유사하다 양쪽 다 주자의 경학적 업적을 존중하지만, 논리상 부합하지 않는 사항에 대해서는 회의와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물론 정조는 정약용만큼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정조의 개방적 경학관에 힘입어 주자를 극복하는 정약용의 독창적 견해가 빛을 볼 수 있었다. 다시 이러한 脫朱子의 경학관은 정조시대의 새로운 학 풍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되었다, 정약용의 『시경강의』의 내용분석을 통하여 정치와 사회에 관한 두 사람의 견해 를 알아보았다. 특히 ‘賢人 ’에 있어서 정조가 유교의 전통적 賢人觀을 견지하고 있음에 비하여, 정약용은 어느 분야에서냐 기능이든 학문이든 할 수 있는 데까지 매진하여 어느 경지에 도달하면 그를 현인이라고 보고 있다. 이는 고착화된 신분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난 견해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安民’의 문제에 있어서는 두 사람 모두 유사한 시각을 노정한다. 安民의 기본조건으로 治者계층의 德化를 중요시한다. 堯舜의 至治를 정치의 이상형으로 제시하고 그 실현을 위한 현실적 방법으로 治者는 古學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는 것으로 想定한다. 이러한 본고의 고찰을 통하여 정조와 정약용과 갇은 군신 간의 학문적 활동은 글자그대로 敎學相長적인 만남이며, 조선경학의 실학시대를 만개 시킨 動力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