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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5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한자문화권의 한자문화란 한문을 공용문어로 사용하여 영위된 종합적 지식체제 이다. 즉 한문을 지적 수단으로 사용하였던 사람들의 生活知, 學問知, 普遍知, 構想知등이 모여 이루어진 知識地形圖이다. 한자문화의 ‘知的傳統’은 가치의 역사적 축적이다. 특히 한국의 지적전통은 한 국의 지반에서 현실적으로 갖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한자기록으로 이루어진 지 적전통은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으며, 그것을 교육하고 학습하는 분야가 한문과목 이다. 우리의 한문문화를 동아시아 한문문화 속에서 비교하여 그 同異와 變化, 나아 가 普遍化를 분석할 때 우리만의 특성을 찾아낼 수 있다. 본고는 한자문화 중 전 통교육과 관련된 지식형성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이 때 지식형성에 어떤 교재가 어떤 교육방법으로 사용되었는가를 밝히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에 ‘전통’ 한문 교육에서 그 지식의 분류와 지식의 실천내용을 고찰하여 지식형성의 틀을 찾아내고자 하였다. 전통적 몽학 한문교재는 天地人분류체계를 기반으로 지식을 형성하고 있다. 우선 자연에 대한 개괄적 이해를 토대로 하고, 그 위에 이상적 인간의 모습으로서 사회의 질서체제와 예교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분류체계는 고대사회의 식자교재 인 『급취장』을 비롯하여, 가장 널리 사용된『천자문』등의 중국교재는 물론이고, 조선시대의 『유합』이나『訓蒙字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분류체계 안에 서 초학자들은 識字와 함께 자연스럽게 전통적 세계관과 인간관에 접하고 수용할 수 있었다. 한편 교화용 교재는 자연에 관한 이해에 앞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다양하게 제 시하고 있다. 중국 宋代에 만들어진 『소학』,『삼자경』의 분류체계가 율곡의 『성학집요』나『격몽요결』등의 계몽서에 수용되어 계승되었다. 이러한 교화용 교재의 분류체계는 학습자로 하여금 심신의 수양과 독서를 통한 자기계발의 학습방법과 사회 속에서의 처신을 체득하게 한다. 이러한 전통적 몽학교재에 보이는 분류체계를 현대 한문교육 교재에 활용하게 되면, 교육과정에서 요구하는 전통의 이해와 계승의 한 방법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6,900원
        2.
        2011.10 구독 인증기관·개인회원 무료
        에 관한 「進箚」를 올렸다. 그는 이 글이 충서의 글이라고 밝히면서, 주로 四書六經과 眞德秀 (1178~1235)의 『大學衍義』를 본떠서 편술하였고, 아울러 程子와 朱子의 학설을 보충하여 改進하였다고 한다. 이 책의 주요 구성은 修己․治人의 유교적 도를 설명하는 大學』과 『中庸』을 「統說」로 삼고, 이어서「修己」,「正家」,「爲政」,「聖賢道統」의 순서로 전개되는데, 그 분량은『栗谷全書』의 약 25%에 해당한다. 이 책을 편찬한 주된 목적이 ‘리더’로서의 제왕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주로 유교적 이상 정치를 실천하는 내용들로 편성되어 있다. 그런데 본고는 이러한 제왕교육서인 성학집요의 「수기편」을 오늘날 화두가 되고 있는 리더십교육의 관점으로 조망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았다. 오늘날의 리더십 교육은 대체로 서구권의 연구 업적을 수용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리더십을 『聖學輯要』에서 찾는 것은 단순한 古代로의 역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리더는 어느 시대 사회에서나 필요한 존재였다. 인간이 혼자 살수 없는 존재인 이상, 사회조직을 이끄는 리더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임에 틀림없다. 이에 본고는 오늘날의 리더양성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으면서 성학집요 수기편을 살펴보았다.
        3.
        2011.05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李二曲(1627~1705)의 이름은 顒, 또는 容이라고 하고, 字는 中孚이지만, 보통 二曲先生이라고 불려졌다. 陝西省出身으로 평생 과거에는 응시하지 않았 다. 학문으로 이름이 알려지면서 여러 번 仕宦을 推薦받았지만, 응하지 않고 평 생 빈한함 속에서 학문에 매진하였다. 明代(1368∼1644)가 끝나고 滿洲族에 의해 淸朝가 세워지는 역사상황 속에서 학문을 하였던 二曲이기 때문에 그의 학문적 특색은 宋代朱子나 明代의 王陽明 중 그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자세로 자신만의 새로운 學術을 이루었다. 이 러한 二曲의 학문적 특징을 단적으로 드러나는 말이 바로 ‘悔過自新’과 ‘明體適用’이다. ‘悔過自新’이란 말 그대로 학문을 하면서 자신의 過誤를 깨닫고 스스로 새롭게 고친다는 의미이고, ‘明體適用’이란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나는 本體를 잘 보전하여 현실에 적용하여 경세치용을 이룬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二曲이 志向하였던 學問은 理論적 糾明에 滿足하지 않고, 끊임없는 實踐을 摸索하였던 儒學이다. 이런 그의 實踐重視思想이 그의 학문관의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實踐에 어긋나는 경우는 果敢하게 학문이 아니라고 비평하였다. 즉 內容도 없이 章句에만 얽매이는 學問을 俗學이라고 보았던 二曲이었기 때문에 學問은 悔過自新하여 明體를 밝히고 適用하는 實踐의 學問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8,000원
        4.
        2011.01 구독 인증기관·개인회원 무료
        李二曲(1627-1705),名顒,或 稱呼容,字 中孚,普通叫二曲先生。陝西省 盩厔 出身,平生沒有過應試科舉。從以學問傳名聲開始,多次推薦過仕宦,不應平生過貧寒的生活,熱烈地研究學問。當時,同二曲繼續在一起學問的交流的顧炎武(1613-1682)是評價二曲的學問,說:“在貧窮的生活,用功學問,沒有老師,完成學問,是我不如李中孚。” 這樣,二曲是在困難的家庭的生活中,沒有老師,用功學問,在這裏 母親彭氏的影響比較多了。 母親 說:“古人都是你的老師”鼓勵一下,二曲加生氣、発奮來,獨學成爲一家。 由明代(1368∼1644)終,依滿洲族建清朝,在親自看到歷史的情況中,爲學問的二曲,他的學問的特色是宋代朱子 或 明代王陽明中,不便不依的姿勢,完成爲自身的獨特的學術世界。二曲 說: “在學術,二程・朱子, 陸象山・王陽明的存在是好象在輪車左輪和右輪似的,不可能消除一點的地方。因此,一邊高來,一邊退去,都爲衡了。”這說的話,不是二曲試圖兩處都折衷,而不夠學派以爲「反身実踐」的根據,表出來了。這樣,以二曲的學問的特徵,明確表示起的話就是‘悔過自新’與‘明體適用’。‘悔過自新’就是說,覺醒自身的過錯,自身親自新地改善的,而‘明體適用’就是說,將從本生具備的本體保存好,適應現實的生活,成爲經世致用的意思。在此本稿,收集李二曲的著述與言說的『二曲集』中,以『四書反身録』(以下,『反身録』爲中心,觀察經學觀,還觀察,他的獨唱的學說的‘悔過自新說’與‘明體適用說’怎樣爲具顯的程度。『反身録』是對四書的李二曲的談論,門人 王心敬親自筆史的記錄。在「草稿」階段沒有打算刊行豫定,而把這「草稿」當時的學憲的許淝水讀下去,要表達把‘反身的 旨風’給看士林,做刊行。 關於這『反身録』 的評價中,在『欽定四庫全書總目』(巻三十七 経部三十七 四書類存目),根據對於『大學』的‘格物’的說明,李二曲的學的基盤在於王陽明。另外,他的兒子對於二曲的四書的解釋,評價說: 該當『四書集註』的‘羽翼’。可知道在這兩種的評價中,後代的人們的評價是隨著看的觀點相互不一樣的。那麽,二曲的四書解釋怎樣看的妥當吧?將對此的解釋的端緒查到出刊『李二曲』飜譯書的荒木見悟氏的如下說明。“二曲的思想 外觀是好象折衷朱子學和陽明學表示,那個從他的深刻的內省與體験,確立自身的主體,在該改革世風的祈願,自由地受容和溶解,其存的教學不構。” 即 這樣說,在悔過自新説’與‘明體適用說’ 立腳,『反身録』成爲構成。特別,弟子的王心敬是對於二曲的四書解釋 說:“一個人愉快地反身実踐,人欲改變天理,身心爲平康。人人愉快地反身実踐,人人都爲君子,世上好象堯舜時代。如此,是至極的政治的根本。集中地讀四書的人不得不忽視。” 在此說的話‘反身’與‘實踐’相當於‘悔過自新’與‘明體適用’。由此觀察『反身録』,二曲的四書理解是一邊有脫離『四書集註』的結構,一邊有結構裏爲展開。也把那個叫對於李二曲的四書理解的矛盾點。但是,二曲爲志向的儒學不滿足於理論的糾明,不斷地摸索實踐的儒學。這樣,由於他的實踐重視思想爲經學理解的本質,如當脫離實踐的時候,果敢該脫離『四書集註』的結構。李二曲在章句構,也批評把沒有走向內容的詞的學問叫俗學。而可以說他的學問是悔過自新,明白明體,適應的實踐的學問。
        5.
        2008.11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소고는 倭亂(1592年~1598年)과 胡亂(1636年~1637年) 이후 조선후기의 사 상을 ‘実心’과 ‘実心実学’을 키워드 삼아 고찰하였다. 조선후기는 전쟁의 폐허를 재건하고, 보다 견고한 왕조지배체제를 제구성해야 한다는 당면과제가 있었다. 따 라서 그 이전과는 다른 氣流가 정치․경제는 물론이고 사회와 문화 등 여러 분야 에 흐르게 되었다. 특히 ‘実’이라는 개념을 자주 눈에 띠는데, 이는 兩亂의 原因을 반성한 결과일 것이다. 즉 ‘虛’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實’이다. 따라서 英祖․正祖時期의 文書에서 발견되는 ‘実心’과 ‘實心實學’의 용례는 ‘實’을 내용을 고찰함에 좋은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儒學의 텍스트에서 ‘実’은 ‘誠’의 내용을 설명하는 말이었다. 특히 中庸에는 ‘誠’은 하늘의 道이고, ‘誠之’는 사람의 道라고 하는 規定이 있는데, 이는 ‘実心’을 분석하고 논의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거점이 된다. 용례를 정리하면 실심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공식문서에서 신하가 군주에게 요구하는 ‘実心’이 다. 이 경우 군주는 끊임없이 신하의 忠告과 警告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정책에 반영하는 ‘実心’을 갖추어야 한다. 政治的의미가 강한 실심으로, 君民共治를 위한 實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行動主体로서의 군주 自身의 文書, 혹은 신하 의 個人的文書에 사용된 ‘実心’이다. 하늘에서 부여받은 本然의 마음을 실심으로 보는 것이다. 朱子学적 修養論인 ‘存天理去人慾’과 ‘戒愼恐懼’의 자세를 갖추고, 内面의 純粋性으로서의 실심을 보존하는 것이다. 이런 ‘実心’은 他者에게 感動을 주어 共感하고, 他者와의 疎通을 꾀하며, 他者의 마음과 하나가 된다. 여기서의 ‘実心’은 實事에 임하여 實政을 행하고 백성에 도움이 되는 實效를 거두는 원동력이다. 또 이 실심에 근거한 학문이 ‘實心實學’이다. 이 ‘實心實學’은 陽明学的絶対純粋의 마음을 자각하고 그것을 重視하는 観点이 기초를 이룬다. 실심을 강조하는 人士들은 文字에 얽매여 있는 知識을 実践에 옮기는 ‘實心實學’ 의 구현을 위하여 노력한다. 즉 朝鮮後期의 새로운 학문기류에서 보이는 實心이 란, 자신을 향한 엄격 수양의 필요성을 자각한 데서 나온 개념이다. 이런 실심을 전제로 하는 실심실학이란, 이상적 민생실현을 위한 의식의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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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조선의 경학사에 일획을 그은 君王인 정조와 신하인 정약용의 학문적 만남을 詩經講義라는 텍스트를 통하여 조망한 논문이다. 이들의 만남에 주목하는 이유는 통상의 經筵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군왕이 자신의 의도로 선택한 인재와 질의응답을 통하여 새로운 경학의 세계를 확장하는 보기 드문 케이스이다. 우선 전통적 帝王敎育의 유형으로 정도전 · 권근 · 이황 · 이율곡 등의 사례를 들어 조선시대 경연이 추구하였던 이상적 교육상을 알아보고, 이것에 대응하는 역대 왕들의 경연 참석 상황을 살펴보았다. 정조의 캐릭터는 한마디로 말하면 好學의 學者적 君王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정조의 유교적 이상정치와 현실의 실현이라는 점점에 정약용을 비롯한 초계문신이 위치한다. 초계문신 뿐 만 아니라, 정조의 정치적 학운 활동에는 학파 • 지역 · 신분 의 차를 초월하여 다양한 유자가 참여한다. 이러한 열린 학문 활동은 곧 당시 사회의 개방성에의 지향을 엿보게 함과 동시에 보편 문화의 성숙을 알려준다. 『시경강의』를 통하여 살펴본 두 사람의 기본적 경학관은 상당히 유사하다 양쪽 다 주자의 경학적 업적을 존중하지만, 논리상 부합하지 않는 사항에 대해서는 회의와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물론 정조는 정약용만큼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정조의 개방적 경학관에 힘입어 주자를 극복하는 정약용의 독창적 견해가 빛을 볼 수 있었다. 다시 이러한 脫朱子의 경학관은 정조시대의 새로운 학 풍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되었다, 정약용의 『시경강의』의 내용분석을 통하여 정치와 사회에 관한 두 사람의 견해 를 알아보았다. 특히 ‘賢人 ’에 있어서 정조가 유교의 전통적 賢人觀을 견지하고 있음에 비하여, 정약용은 어느 분야에서냐 기능이든 학문이든 할 수 있는 데까지 매진하여 어느 경지에 도달하면 그를 현인이라고 보고 있다. 이는 고착화된 신분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난 견해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安民’의 문제에 있어서는 두 사람 모두 유사한 시각을 노정한다. 安民의 기본조건으로 治者계층의 德化를 중요시한다. 堯舜의 至治를 정치의 이상형으로 제시하고 그 실현을 위한 현실적 방법으로 治者는 古學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는 것으로 想定한다. 이러한 본고의 고찰을 통하여 정조와 정약용과 갇은 군신 간의 학문적 활동은 글자그대로 敎學相長적인 만남이며, 조선경학의 실학시대를 만개 시킨 動力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