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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南冥 曺植의 晩年 講學地인 山天齋에는 3점의 벽화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 벽화는 여타 선유들의 강학 공간에서는 보기 힘든 것으로 퍽 이채로운 유물이 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벽화의 所從來에 대하여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언급한 글을 접하지 못하였다. 필자는 평소 남명의 풍도에 감화를 받아 선생이 남긴 글 들과 참고 자료를 읽고 선생의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장소를 답사하는 가운데 우 연히 그 벽화의 소종래에 대한 심증을 얻게 되었다. 仁祖反正과 함께 찾아온 北人의 몰락으로 그들의 地域的, 師承的 근거가 되었 던 江右 지역은 200년 가까이 출사길이 막혔고 그로 인해 학문이 침체되어 있 었다. 그러던 것이 1796년에 내려진 正祖의 賜祭文을 기점으로 하여 이 지역에 학문이 불이 일듯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의욕적으로 다시 일어난 남명에 대한 文廟從祀 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賜祭文碑 건립과 함께 山天齋의 재건 이 이루어졌다. 산천재 벽화는 1818년 산천재의 중수 때 강우 유림들이 四聖賢遺像을 환봉 한 것과 함께 그려진 것으로 필자는 추측한다. 이 벽화에 그려진 인물은 商山四 皓, 巢父・許由, 伊尹이고 그 소종래는 바로 정조의 사제문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정조의 사제문에는 정조의 깊이 있는 남명관이 잘 나타나 있는데 이 것이 江右 유림에게 있어 당시의 현실에서 남명을 선양하기에 시의적절한 계기 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산천재 벽화의 연원은 결국 남명의 사상에 맥이 닿 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