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는 전통문화의 마지막 부흥기이자, 다양한 문화 활동에 따른 주체적 성숙기로 당시 상류 지배계층에 해당하 는 경화세족들은 원림을 통해 자신의 이상향이 내포된 생활 공간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특히 원림은 그들의 이상향을 현실세계에 표현하는 매개체로서 조선 후기에는 한양 각지 의 명소를 찾아 원림을 조성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게 나 타났으며 이는 사회적 현상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성종상 (2003)은 대다수의 원림이 산수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 경승이 빼어난 곳을 찾아 조성하였다는 점에서 원림에서 읽을 수 있는 생태미학으로 입지선정을 우선으로 꼽고 있 다. 그러나 오늘날 경화세족의 주 무대였던 한양, 즉 서울의 도시화는 사회·경제·문화 등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한양 각지에 조성되었던 대부분의 원림들은 소실 되거나 원형이 변질되는 등 당시 원림의 입지환경을 살펴보 는데 어려움을 야기하였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생태미학의 관점에서 문헌분석과 현 장조사를 통해 원림의 입지환경 특성을 살펴보고자 고문헌 분석을 중심으로 조선후기 경화세족들이 원림의 입지를 선 정하는데 있어 고려되었던 관념적 요소와 실제로 조성되었 던 환경 요소들을 파악하여 그 특성을 도출하였다. 조선후기 경화세족들의 원림 조영은 단순 미적인 공간의 조성보다는 당시 조영자의 자연관이 대입됨에 따라 상위개 념인 예술적 공간의 창출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원림의 입지 선정에 고려된 관념적 요소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그에 따른 조영자의 자연관을 살펴봄으로써 그 양상을 가늠 해볼 수 있다. 우선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조선후기에는 중세적 지배 체계와 성리학 이론이 붕괴되기 시작한 반면, 문학·예술·생 활 등 다방면에 영향을 미친 실학이 대두되었다. 또한 청대 문물의 수입과 상공업의 발달은 한양으로의 문물집중현상 으로 이어졌는데 이에 따른 최대의 수혜자가 바로 경화세족 이라 할 수 있다. 경화세족의 자연관과 관련하여 당시 저작된 문헌들을 살 펴보면 그들이 조성한 원림은 혼잡하고 시끄러운 세속에서 의 피난처였으며 좋은 주거지의 조건으로 산천이 아름다운 전원뿐만 아니라 번잡한 도회지라도 좋다는 관념. 즉, 성시 산림의 자연관이 대두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관료세계로부 터 이탈하지 않고, 도회지가 제공하는 문화혜택을 유지하려 는 노력이 나타나는 동시에 일종의 강박관념처럼 상식화되 어 있는 산수 전원의 미학이 살아있는 주거를 도회지에 구 현하고자 하는 시도가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이욱, 2014). 이는 과거 은일·은거를 위해 낙향하거나 지방의 경승지를 취득하는 양상과는 달리 한양 내에 원림을 조성함으로서 그들이 희구하는 산림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장소를 마 련하고자 하였으며(김동현, 2015), 이에 따라 조선 전기 은 거문화와 함께 형성되었던 별서원림조영의 풍조가 조선 후 기로 들어서면서 한양 내 원림 조성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과 자연관을 토대로 입지선정과 관련된 요소들을 밝히는 과정으로 종암별서, 연명헌, 옥경 산장, 자연경실, 옥호정, 소귀당, 삼계동정사 등 실제 한양 일대에 조성된 원림의 입지조건에 고려되었던 환경요소들 은 지형, 수계, 식생 등이 고려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지형은 원림이 위치한 주변의 산악·구릉을 이용한 사례와 바위나 암반을 원림의 영역에 포함시키는 유형으로 세분할 수 있 다. 주변의 산악이나 구릉을 이용한 사례로 옥호정은 후면 의 능선을 배경으로 원림공간이 펼쳐지고 있으며, 삼계동정 사 또한 백악산을 배경으로 생활공간과 연결되는 소로의 결절점에 암반지대가 위치하고 있다. 옥경산장의 입지로는 ‘골짜기 안에 비로소 깨끗하고 한가하며 넒은 곳이 있다.’라 는 기록을 통해 청계산을 배경으로 하는 계곡부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이종묵, 2006), 자연경실의 외원에 해 당하는 거연정은 ‘큰 바위들이 감싸 안은 듯한 정자’라는 기록을 통해 주변의 암반에 위요된 공간임을 확인하였다. 한편 바위나 암반을 원림 내에 유입시킨 사례로 옥호정은 후면 산지 정상부에 ‘일관석(日觀石)’ 각자를 새김으로서 자신의 원림으로 포함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확인되었으며 삼계동정사 내부에도 원림 전면의 ‘소수운렴암(巢水雲簾 庵)’, ‘삼계동(三溪洞)’ 등의 각자가 암반지대에 새겨져 있 다. 종암별서와 옥경산장, 연명헌은 각각 원림 내 바위에 이름을 부여하고 공간구성요소로 포함시킨 사례가 나타나 는데 종암별서 내 간운대는 ‘교묘하여 사람이 만든 듯하지 만 사실은 천연의 것이다.’라고 하여(이종묵, 2006) 바위 그 자체를 즐기고자 하는 의도가 확인되며 옥경산장은 거북 형상의 바위를 ‘구암(龜巖)’이라 명명하고 이를 중심으로 하는 경관을 기록한 바 있다. 또한 연명헌은 벼락을 등지고 서있는 병풍 형세의 바위에 ‘수옥대(漱玉臺)’라 명명하고 이를 조망 대상에 포함하였다. 원림의 입지선정에 수계가 반영된 사례는 대부분 주변의 계류를 이용하였다. 옥호정은 북악산에서 흘러나오는 시내 가 원림 내부를 거쳐 전면에 흐르는 수계와 합류하는 수체계 를 지니고 있었다. 삼계동정사 또한 ‘개울을 건너가야 한다.’ 는 기록을 통해 전면에 계류가 흐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 며 오늘날 삼계동정사 내부에도 계류가 포함되어 있다. 연명 헌은 와룡폭포가 이어지는 수계에 경처를 찾아 각각의 건조 물들을 조성하였다. 소귀당은 삼각산 북측 천관암에서 발원 하는 수원을 원림의 경계로 삼았으며, 폭포나 소(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구곡을 설정하고 만경폭(萬景瀑), 옥경대(玉 鏡臺) 등의 명명과 함께 이를 즐겨찾는 등 원림의 입지 선정 에 있어 수계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사례에 해당한다. 식생의 경우 주로 원림을 둘러싸는 요소로 이용되었다. 옥호정의 경우 후면의 산지에 송림이 표현되어 있으며, 삼 계동정사의 주변 경관을 표현한 기록에도 ‘시내와 산은 깊 숙하고 산은 울창하였다’는 내용이 있어 주변의 수림대가 원림을 위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종암별서와 관련된 기 록에는 ‘사계절의 빼어난 경관을 보았으니 산수의 볼거리를 굳이 먼 데서 구할 필요가 없다(김동현, 2015)’는 내용을 통해 계절별로 그 모습을 달리하는 식생이 원림의 주변에 펼쳐져 있음을 짐작하게 할 수 있으며, 연명헌 또한 ‘사방에 소나무와 상수리나무가 천 길 높이로 솟아있고’라는 기록을 통해 주변에 수림대가 형성되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상술한 내용을 토대로 조선후기 경화세족 원림의 입지환 경 특성을 살펴본 결과 당시의 원림 입지선정은 한양에 국 한된 경화세족 집단의 자의적 공간제약 속에서 경승지를 찾고자 하는 그들의 인식이 반영됨에 따라 성시산림이라는 관념적 이슈를 형성하였으며, 이에 따라 산수경관이 빼어난 장소를 점유하고자 하는 욕구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체계를 바탕으로 조성된 원림공간에는 지형과 수계, 식 생 등이 고려되었으며 이들의 상관관계를 살펴보면 지형을 중심으로 수계와 식생이 수반되는 형태를 보인다. 대부분의 원림이 한양 주변 산지에 조성되어 울창한 식생을 구비할 수 있는 여건이 기본적으로 마련되어 있었으며, 이에 따라 계절별 다른 풍취를 취하고자 하는 생태적 조영의도를 확인 할 수 있었다. 또한 지형의 단차에 의해 계류나 폭포, 소 등을 형성하는 공간을 점유함으로서 자신의 원림공간에 동 적인 요소를 부여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양상은 오늘날 조선후기 원림 관련 백과사전으로 평가되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의 기록에도 ‘남쪽 산기슭의 양지, 혹은 동쪽이나 서쪽 산기슭의 바깥에 언덕이 아담히 둘러쳐진 기름지고 물맛이 좋은 샘이 있는 터를 골라, 3칸 집을 짓고 동쪽과 서쪽에는 누대를, 중간에는 방을 둔다.’라 는(조창록, 2003) 일종의 주거모델이 제시되는 점으로 보아 산기슭, 샘, 숲 등으로 나타나는 주변 자연환경은 원림의 입지선정에 있어 구비되어야 할 요소로서의 대표성을 지닌 다. 또한 원림이라는 인위적 공간을 설정함에 있어 주변환 경에 대한 인공적 처리가 최소한으로 나타나고 자연현상에 대한 이해와 감상, 상징적 의미부여 등 원림에 대한 입지선 정 기법은 생태 미학적 관점에서 형식미를 넘어선 인지지락 의 경지를 짐작할 수 있는 사례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