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는 한민족의 근대화를 지도하며 구국운동을 전개한 선구자이며, 제국주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한민족의 자유를 쟁취하고자 투쟁방략을 세워 조직적으로 지도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리고 근대 민족 국가 수립의 그 날을 목표로 대립과 갈등을 통합의 논리로 풀고 조직을 활성화한 정치가였으며 민주주의 국민의식을 고취시켜 독립국가의 발전에 기여할 구성분자로서의 중견의 인물 배양에 힘쓴 교육자였다. 이처럼 다양한 삶 중에는 경제적 실력을 키워 독립운동을 지원하고자 했으며 외교활동을 통해 한국의 존재를 알려 독립할 자격이 있는 민족 임을 전세계에 알리고자 했으며 신문, 잡지 발간과 언론 홍보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의 소식을 공유하고자 했다. 도산 안창호 그는 한마디로 한국 근대 민족운동의 대계를 한 몸에 짊어진 인물이다. 수난의 시대에 고단한 삶을 살았던 그 무게만큼 오늘날 도산은 한국사의 큰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도산의 활동을 시대 구분해 보면 제1기는 1896년 독립협회 활동, 제2기 1903~1906년까지 의 미주에서의 민족운동기, 제3기는 1907년 신민회 결성과 구국운동기, 제4기 망명한 이후 재러한인사회에서의 활동기, 제5기 미주 대한인국 민회, 흥사단활동, 제6기 1919~1932년 중국에서의독립운동기, 제7기 일제에 피체된 후 국내에서의 활동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도산의 활동은 지역 및 시기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어 전체적인 흐름을 조망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도산을 평가할 수 없다. 도산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그리고 다양한 분야에서 구국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도산활동의 주요점은 독립운동으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궁극적으로 근대 민주공화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준비운동이 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추진하였던 도산의 활동과 운동을 혁명운동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도산을 개조론자로 명칭하고 특히나 일부 도산을 잘못 이해하는 이들에게 ‘개량주의자’로까지 폄하되어 있 는 실정에서 도산과 혁명운동을 연관 짓는다는 것은 다소 낯선 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도산은 자신을 혁명가로 자처하였고 끊임없이 변혁을 추구했던 자신의 활동을 혁명운동으로 규정한 바 있다. 본 연구는 도산의 독립운동을 그의 혁명관과 연관하여 1910년대, 1920년대, 1930년대 초반으로나누어 살펴보고자 있다. 이 시기는 중국 상해에서 활동하면서 미주에서의 문화운동에서 전환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상해에서의 도산의 활동은 이제까지 독립운동사상에서 볼 수 없었던 혁명적 활동이었으며 이러한 도산의 혁명운동이 우리 독립운동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나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