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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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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제11,12권 (2006년 12월)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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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가 ‘민족대업의 기초’, 즉 민족의 독립을 준비하기 위해 가장 정력적으로 추진한 것은 민족운동의 인재양성을 위한 興士團이었다. 이것은 그가 “우리 민족이 완전히 부흥하여 생존번영을 누리고 나아가 서 전체 인류사회의 공존공영에 공헌을 짓는 대 사명을 달성하는 유일한 길은 오직 흥사단의 주장”이라고 한데서도 알 수 있다. 그는 “흥사 단이 한발짝 한발짝씩 실력을 양성 강화하는 것은 한발짝 한발짝씩 조 선독립에 접근하는 것이고 최후에는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여 흥사단을 조직하고 그 운동을 계속한 것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8도 대표들이 참석하여 창단된 흥사단은 務實․力行․忠義․勇敢의 정신으로 덕성을 함양하고 신체를 단련하여 기력을 튼튼하게 하며 각자 전문지식 또는 과학기술을 습득하고 건전한 인격을 기른다는 실천방안을 제시했다. 창립 이후 흥사단은 단우의 모집에 주력하면서 실업을 장려하는 정책에 따라 북미실업회사와 흥업회사 등을 세우기도 했다. 안창호는 3․1운동 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할 때에도 상해지 역을 중심으로 중국본토는 물론 남북만주와 일본 및 연해주 지역까지를 포괄하는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조직했다. 흥사단 조직 확대운동은 1920년 9월에 상해에 원동위원부가 조직된 것을 시작으로 북경과 남경, 만주 등지에서 펼치려던 이상촌 건설운동과도 표리를 이루면서 1932년 4월 상해에서 일경에 체포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수양)동우회는 원동위원부의 흥사단 국내지부였다. 물론 일 제의 직접 통치하에서의 흥사단운동이었기 때문에 될수록 인격수양 단 체임을 표방하고 합법적인 활동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는데, 안창호는 이러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수양)동우회에 대하여 국내의 동지 들을 통해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간접적으로 지도하였다. 본고에 서는 (수양)동우회의 조직과 노선에 대한 안창호의 노선을 그가 체포 되는 1932년 이전까지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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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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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는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당일 상해에서 피체 되어 국내에 압송된 이래 1938년 3월 10일 숨을 거둘 때까지 6년 가까운 기간을 국내에서 보냈다. 그런데 신민회운동기나 미주활동기, 상해시기와 달리 그의 말년에 대한 기록은 단편적인 일화로만 전해질 뿐이다. 물론 투옥과 일제의 감시 속에서 뚜렷한 활동을 벌일 수 없었지만, 도산의 말년은 60평생의 파란만장한 역정을 되짚어 보고 민족운동 에 대한 자신의 마지막 구상을 가다듬는 시기였다. 또한 지역감정과 같이 도산의 활동을 둘러싸고 제기된 해묵은 문제들이 다시금 부각된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에 여기서는 도산 말년의 국내 행적과 관련된 단편적 자료들을 하나로 정리하는 가운데, 민족운동에 대한 그의 마지막 구상이 무엇이었는지, 어떠한 문제들을 놓고 힘겨운 씨름을 하였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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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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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에 대한 연구는 과거 자료의 한계 등으로 인해 교육자, 조직 운동가, 준비론자 등의 단면적인 접근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다량의 해외소장자료의 국내입수 및 자료에 대한 해석으로 인해 일제 식민지하 독립운동의 지도급 인사로 어떠한 사상을 견지하고 활동을 벌였는지에 대하여 총체적인 분석을 하는 상황으로 연구경향이 발전되었다. 안창호의 대표적인 활동은 국내외에서의 정치 조직결성과 운용, 임시정부를 통한 독립운동으로 볼 수 있으며, 민족내적으로는 지속적인 조직활동을 통해 단결을 도모했고, 대일전선에서는 비타협적인 독립운동을 펼쳐나갔다. 이런 의미에서 광의의 ‘政治’ 를 차용하여 안창호의 정치가로서의 면모와 정치관의 분석을 통하여 그 성격을 규명하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본다. 안창호의 사상 형성의 특징 중에 하나는 자신이 기존에 가졌던 견해를 일거에 버리지 않고 기존의 것을 기반으로 새로이 체득한 내용을 반영하고 보완하는 유연한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상황, 장소, 대상에 따라 발언의 수위와 내용도 다소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발언과 행동을 전체적으로 평가해 보면 굴절을 보이기보 다는 오히려 일관된 면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과연 안창호는 어떠한 사상을 견지하면서 정치활동을 해 나갔는지, 또 현재의 안창호에 대한 평가는 정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짚어보고 향후 그에 대한 보다 정확한 평가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면서 나름대로의 견해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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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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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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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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島山安昌浩(1878~1938) 선생은 교육자로 애국계몽운동에 앞장 섰으며,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하면서 독립의 방략을 다양화한 독립운동가다. 그는 민족운동가로서, 그 운동의 기반으로서 도덕적 가치를 우선했으며, 운동의 방략도 급진적이거나 과격한 것을 피하고 점진적인 것을 중요시했다. 그는 각종 운동을 주도하면서 개인적인 인격의 성숙을 전제로 조직력을 중시했으며 따라서 그의 운동은 개인의 인격 연마와 함께 동맹수련을 강조하여 탁월한 조직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민족을 중시한 민족주의자이면서 민족주의를 세계 평화 에 기여토록 해야 한다는, 말하자면 세계화를 지향한 지도자이기도 하 다. 2005년 8월, 국가보훈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도산 선생을 지목 했다. 광복 60주년을 맞는 이 달에 도산 안창호 선생을 이달의 독립 운동가로 지목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것은 광복 60주년을 맞아 지금까지 지내온 한국 민족의 진로를 되돌아보면서 앞으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데는 도산 선생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미래의 진로와 관련, 앞으로 한국 민족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는 도덕적인 수준을 높이고, 민족적으로는 통일을 이룩해야 하며, 세계사적으로는 세계평화를 지향하면서 한국 민족이 바로 그 세계사적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민족의 진로를 이런 관점에서 풀이할 수 있다면, 거기에 부합되는 지도자를 독립운동사에서 찾는다면, 바로 도산 선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를 선정했을 것으로 본다. 도산 안창호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선학들의 연구와 저술이 있다. 이 시기에 ‘도산 선생의 생애와 활동’이라는 다소 진부한 제목으로 그를 되돌아보는 것은 광복 60주년이라는 환경에서 그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시대에 따라 변화될 수 있겠지만,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지 않는 한 그 인물에 대한 평가는 기존의 연구를 크게 뛰어넘을 수 없을 것으로 본다. 그런 점에서 이 글도 새로 정리한다는 것 외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발견하기는 힘들 것으로 본다. 선생의 생애는 그 활동 지역이 넓고 그 활동 영역 또한 매우 다양하 다. 때문에 그의 생애와 활동을 단순화시켜서 언급한다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 이 글은 도산 선생의 생애를 그 시기를 따라 평면적으로 언급 할 것이기 때문에 다소 연보적인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좋은 충고를 기대한다.
6,900원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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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는 한민족의 근대화를 지도하며 구국운동을 전개한 선구자이며, 제국주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한민족의 자유를 쟁취하고자 투쟁방략을 세워 조직적으로 지도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리고 근대 민족 국가 수립의 그 날을 목표로 대립과 갈등을 통합의 논리로 풀고 조직을 활성화한 정치가였으며 민주주의 국민의식을 고취시켜 독립국가의 발전에 기여할 구성분자로서의 중견의 인물 배양에 힘쓴 교육자였다. 이처럼 다양한 삶 중에는 경제적 실력을 키워 독립운동을 지원하고자 했으며 외교활동을 통해 한국의 존재를 알려 독립할 자격이 있는 민족 임을 전세계에 알리고자 했으며 신문, 잡지 발간과 언론 홍보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의 소식을 공유하고자 했다. 도산 안창호 그는 한마디로 한국 근대 민족운동의 대계를 한 몸에 짊어진 인물이다. 수난의 시대에 고단한 삶을 살았던 그 무게만큼 오늘날 도산은 한국사의 큰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도산의 활동을 시대 구분해 보면 제1기는 1896년 독립협회 활동, 제2기 1903~1906년까지 의 미주에서의 민족운동기, 제3기는 1907년 신민회 결성과 구국운동기, 제4기 망명한 이후 재러한인사회에서의 활동기, 제5기 미주 대한인국 민회, 흥사단활동, 제6기 1919~1932년 중국에서의독립운동기, 제7기 일제에 피체된 후 국내에서의 활동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도산의 활동은 지역 및 시기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어 전체적인 흐름을 조망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도산을 평가할 수 없다. 도산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그리고 다양한 분야에서 구국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도산활동의 주요점은 독립운동으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궁극적으로 근대 민주공화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준비운동이 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추진하였던 도산의 활동과 운동을 혁명운동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도산을 개조론자로 명칭하고 특히나 일부 도산을 잘못 이해하는 이들에게 ‘개량주의자’로까지 폄하되어 있 는 실정에서 도산과 혁명운동을 연관 짓는다는 것은 다소 낯선 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도산은 자신을 혁명가로 자처하였고 끊임없이 변혁을 추구했던 자신의 활동을 혁명운동으로 규정한 바 있다. 본 연구는 도산의 독립운동을 그의 혁명관과 연관하여 1910년대, 1920년대, 1930년대 초반으로나누어 살펴보고자 있다. 이 시기는 중국 상해에서 활동하면서 미주에서의 문화운동에서 전환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상해에서의 도산의 활동은 이제까지 독립운동사상에서 볼 수 없었던 혁명적 활동이었으며 이러한 도산의 혁명운동이 우리 독립운동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나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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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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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조직의 명수’였다. 대한제국시기 명연설로 근대국가의 꿈을 설파하던 도산은 조국이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 자주적 국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늘 노력하였다. 때문에 도산은 국내를 비롯하여 미주․하와이․멕시코․중국․러시아 등 국외 각지에 한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면 지체없이 달려가 민족운동 실천단체를 조직하고 그를 바탕으로 ‘도산의 꽃동산’을 가꾸어 나갔다. 청년학우회․신민회․공립협회․대한인 국민회․흥사단․한국독립당․(수양)동우회 등이 그것이었다. 도산이 전지구적 활동반경을 바탕으로 한평생 민족운동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도산의 꿈을 믿고 따라준 분들이 있기에 가능하였다. 도산을 도와 재미한인사회의 민족운동을 이끌던 인물 중 한 분이 바로 洪焉(1880~1951)이었다. 홍언은 재미한인 민족운동의 구심점이었던 國民會의 지킴이로 평생을 보낸 ‘미스터 國民會’였다. 그러나 한국사학 계에서조차 “40여년간 미주 언론계에 몸담아 독립 고취에 힘쓴” 그의 이름을 아는 이는 흔치 않다. 도산과 홍언의 관계를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1915년 7월 5일 도산의 아내(안혜련)가 딸을 출산하자, 도산은 홍언에게 딸아이의 이름을 생각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도산과 홍언은 각자 새벽 산에 올라 솟아오르는 해를 보고 작명한 뒤, 하산하여 서로 지은 이름을 펴 보였다. 놀랍게도 둘 다 ‘繡山’이란 두 글자를 내밀었고, 두 분은 함께 웃고 말았다 한다. 바로 그가 도산의 첫째 딸 안수산 여사이다. 미주한인사회를 이끌던 국민회를 사실상 조직한 리더가 안창호였다면, 국민회의 여론을 이끌며 도산의 理想을 지지한 오피니언 리더는 홍언이었다. 따라서 미주한인사회의 구심체를 마련한 안창호와 문필가 이자 역사가로서 재미한인사회의 여론과 민족정신 고취에 선봉에 섰던 홍언의 생애와 활동을 살펴보는 것은 도산의 민족운동과 활동을 이해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익히 알려진 도산보다는 비교적 덜 알려진 홍언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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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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島山安昌浩(1878.11.9∼1938.3.10)는 근대 한국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그의 사상과 활동에서 나타난 탁월한 업 적은 오늘날 21세기 우리 민족을 이끌 역사의 나침반과 같다. 특별히 안창호의 위대성은 그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수많은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잘 드러난다. 본고에서 살펴볼 白一圭(호는 약산, 1880.3.11(음)∼1962.5.31, 원명은 白允祖)는 안창호가 관계했던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생애와 활동 속에 맺어진 안창호는 백일규의 얼굴에 비친 안창호의 참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이러한 고찰 방식은 안창호에 대한 다양한 이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매우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로 생각한다. 백일규에 대해선 방선주가 쓴 재미 3·1운동 총사령관 백일규의 투쟁일생 (水邨朴永錫敎授華甲紀念韓民族獨立運動史論叢, 1992)이 있다. 백일규의 일생과 활동에 대해 처음으로 밝힌 연구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런데 그의 일생을 소략하게 정리하다 보니 빠진 부분이 적지 않고 부분적으로 사실과 다른 오류도 적지 않게 발견 된다. 본고는 이런 선행 연구를 기반으로 백일규의 생애와 독립운동 정리하였고, 그의 생애와 활동 속에 나타난 안창호와의 관계를 하나하나씩 적출하여 그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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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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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昌世(Chang-Sei Kim, 1893~1934)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 교(한국재림교회)의 의사로서 한국 최초의 보건학 박사이며 의술을 통해 독립운동을 했다. 그의 부친은 한국재림교회 초창기 출판사업(현 시조사 전신)의 지도자 중의 한 분(사장)이며 교회가 인쇄술 습득을 위해 1905년 최초로 일본으로 파송한 金承元이다. 그는 어린 시절 부친을 따라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김창세는 도산 안창호의 동서로서 민족독립운동의 동지였다. 부인 李正實(1893~1987)3)이 李惠練 (Helen Ahn)의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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