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

도산학연구

권호리스트/논문검색
이 간행물 논문 검색

권호

제13권 (2010년 12월) 10

1.
201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도산안창호선생의 생애와 사상과 활동을 연구하여 규명하고, 도산사상을 선양하기 위해 도산학회를 세운지 벌써 22년이 지났습니다. 도산학회 는 지금까지 도산사상세미나, 도산사상연구발표회, 기념학술대회를 개최 함으로써 안창호선생의 생애와 사상과 활동을 규명하고, 안창호선생과 도산사상이 우리 민족운동사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깊이 있게 연구하여 왔습니다. 올해는 안창호선생의 탄신 130주년을 한 해 앞둔 해이자, 안창호선생께서 주도해 조직한 신민회의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입니다. 이에 도산학회는 오늘 ‘신민회 창립 100주년의 역사적 의미’라는 대주제하에 학술회의를 개최하게 되었고, 제가 기조강연을 하게 된 점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학술회의의 대주제인 신민회에 관해서는 박만규선생님을 비롯한 여러분들의 발표와 토론에서 자세히 논의될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신민 회가 창립된 1907년이 우리 민족운동사상에서 어떠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하는 문제를 거시적인 측면에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역사를 규명하는 데 있어, 숲에 들어가 꽃과 나무의 모습을 정확히 그려 내는 것이 중요하지만, 높은 창공에서 조감(bird's eye view)의 방식으로 살펴보는 것도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105인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는 작업의 하나로 신민회의 활동, 신민회의 지방조직 등의 문제를 실증에 의하여 구체적이고 미시적으로 연구한 바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기조강연에서는 1907년의 역사적 의미를 「한국민족운 동사상의 1907년」이란 제목 하에서 조망해 보고자 합니다.
4,800원
2.
201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혁명가 안창호는 한말 꺼져가는 국운을 극적으로 되살려 보려고 필사의 노력을 한 바 있다. 안창호는 당시 상황을 위기의식을 갖고 바라보았으며, 그의 인식은 신민회 발기 취지서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안창호는 대외주권의 훼손에 대하여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이 외교권을 박탈하여 외치를 좌우하고 있는 상황을 위기로 간주한 것이다. 안창호는 대내주권의 훼손에 대해서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외국인이 차관으로 앉아 실질적으로 내정을 좌우하고 있는 상황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안창호는 각종 이권과 영토의 할양이 진행되는 현실을 국권 소멸이 진행되는 것으로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즉, 대한제국의 생명이 1905년 에 이미 백척간두의 위기상황에 놓인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략을 고민한 것이다. 그는 정치체제를 개혁함으로써 한민족의 국권을 지킬 수 있다고 판단했고 이를 실천하기에 이른다. 그는, 대한제국의 멸망을 막을 수는 없지만, 한민족의 국가주권을 보전해야겠다는 판단아래, “신민회”라는 비밀 정치 결사체를 조직하였다. 신민회를 결성할 즈음에 안창호의 활동을 추적해 보면 그가 구상한 정치 체제가 공화제 수립으로 모아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기준으로 보면, 황제의 나라를 전복하고, 공화제 정치체제를 구축하겠다는 구상이므로,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다. 지금 기준으로 복원하자면, 자본주의 시장 경제체제를 폐지하고 공산주의 체제를 수립하자는 비유와 유사한 것이다. 안창호는 신민회를 통해, 새나라 새국민 운동을 전개하여, 공화제를 수립하고자 하였고, 나라를 구하는데 실패한 이후에도 좌절하지 않고 국가주권을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의 길로 나서게 된다. 공화제의 수립을 주장했던 안창호는 국권회복의 방법으로 “전쟁을 통한 독립운동”을 제시한 바 있다. 안창호는 신민회를 통해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공화제를 설정하고 이를 통하여 꺼져가는 국운을 되살려보려 하였다. 공화제의 주인이 될 신민을 양성하고, 스스로 실력을 기르기 위해 경제,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결국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국권을 상실하자 이를 회복하기 위하여 독립전쟁을 주장하고 준비하여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신민회 활동이 어려워진 1910년대 안창호의 독립운동 구상안을 보면 신민회 활동 경험이 바탕이 되었음을 잘 알 수 있다. 그의 독립운동 구상 안이 기초, 진행준비, 완전준비, 완전결과의 단계를 설정하고 있고 세부적인 활동계획을 구상하고 있는데 이 구상의 내용들은 신민회 활동의 경험과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독립운동 구상안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신민회는 기초단계(준비단계)의 중심조직으로 구상한 것으로 자리 매김할 수 있다. 이 글은 먼저, 안창호가 펼쳤던 구국운동의 지향점으로서 공화제를 살펴 볼 것이다. 다음으로는 공화제의 주인인 근대적 시민의 양성을 위해 펼쳤던 신민운동 그리고 실력을 기르기 위해 펼쳤던 경제, 교육운동을 정리해 볼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도산의 구국구상이 공화제로 부터 출발하였음을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5,100원
3.
201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5,400원
4.
201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도산 안창호(1878~1938)와 남강 이승훈(1864~1930)은 대한제국기~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을 대표할 만한 거목들이다. 이들은 모두 평안도 출신이지만 그 명성과 영향은 전국적인 것이었고, 지금까지 많은 이들에게 사표(師表)로 기억되고 있다. 이들에 대한 연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남강이 민족문제에 관심을 갖는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인물이 바로 도산이라 알려져 있다. 신민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에서 같이 활동했으니 도산과 남강이 ‘친밀’ 한 관계였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막상 구체적으로 어떻게 ‘친밀’했는가를 따지자면 조금 막연해진다. 물론 그에 대한 전기나 연구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적지 않지만 구체적 자료를 통해 이 점을 밝혀보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이것은 도산에 대한 연구에 작게나마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를 위해서는 두 사람이 모두 관련된 인물과 단체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두 사람의 직접적인 접촉을 보여주는 믿을 만한 사료가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도산과 남강의 첫 대면 시기를 짐작해본 뒤 이어 오희원․오치은 두 사람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들이야말로 도산․남강과 함께 여러 단체에서 이들을 도우며 적극 활동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과 관련된 단체인 서우학회․서북학회, 대성학교․오산학교, 신민회 등을 검토하겠다. 이들 각각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 이 글에서 새롭게 밝혀낼 부분은 거의 없다. 대신 이 글의 초점은 두 사람의 ‘관계’를 입증하는 데 맞춰져 있으므로, 다소 장황하고 번거럽더라도 이런저런 자료들을 많이 인용․제시하려 한다. 이 점에 대해 독자의 이해를 바란다. 부디 이 글을 통해 그 동안 도산․남강에 대해 작은 부분이라도 새롭게 드러난다면 더없는 다행이겠다.
6,400원
5.
201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호형호제’(呼兄呼弟) 관계를 유지하며 일제하 민족 독립운동 현장에서 생각과 행동을 함께 하였던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9)와 해석(海石) 손정도(孫貞道, 1882-1931) 사이에 이루어진 구체적인 만남과 협력, 동역의 역사를 살펴보고 두 사람의 우정과 동역 관계를 가능케 하였던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공유가치(common value)가 무엇인지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두 사람의 관계사를 살펴봄에, 해석의 생애를 중심으로 도산과의 관계를 조명하는 방법을 취할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이루어진 연구에서 도산에 대한 것은 자료 발굴이나 연구에서 상당한 수준을 이루었으나 상대적으로 해석에 관한 연구는 초보적인 단계임으로 어느 정도 일반적인 상식처럼 이해되고 있는 도산의 생애와 활동을 염두에 두고 해석의 생애를 살펴보는 것이 두 사람의 관계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도산과 해석 두 사람은 나이에서 4년 차이가 나지만 출신 배경과 살았던 시대 환경이 같았고 또한 비슷한 과정을 거쳐 기독교 신앙을 습득한 후 항일 민족운동에 헌신하였던 관계로 공통되는 부분이 많다. 우리나라 근대 민족운동사와 교회사, 세계사 맥락에서 두 사람의 생애를 비교하여 살펴보면(<부록> 참조) 도산과 해석은 평남 강서지역의 선비 집안출신으로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기독교를 통해 신학문을 접하고 근대화 흐름에 동참하였다는 점, 일제의 침략과 지배 현실에서 현실에 순응하기보다는 저항의 논리로 항일 민족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는 점, 삼일운동 이후 상해 임시정부 활동에 동참하여 독립운동 진영내의 갈등과 분열 요인을 치유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다가 한계를 느끼고 임시정부활동을 포기한 후 생애 후반을 흥사단 활동과 독립운동 기반으로서 이상촌 건설을 위해 노력한 점 등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결국 도산과 해석은 종교적으로는 유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후 기독교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변절하지 않은 ‘동지’(同志)였다 하겠다.
8,600원
6.
201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혜련여사(이후 존칭 생략)는 도산 안창호의 부인으로 미국식으로 안 혜련, 혹은 헬렌 안(Helen Ahn)이라 불리운다. 도산의 유품과 관련 자료들이 유족들에 의해 독립기념관 추진위원회에 기증된 때는 1985년 3월 11일이다. 독립기념관이 개관을 준비하면서 유족들과 미주 한인사회의 도움을 받아 유족 소장의 자료들을 기증받게 된 것이다. 한국에 오게 된 도산 자료는 도산 연구는 물론 한국근현대사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남편인 도산 안창호의 유품과 자료를 오랜 세월 동안 소중히 보존해 서 후세에 유산으로 전달한 이혜련, 그녀는 역사학자 이상의 역사의식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남편을 존경하며 이들 자료가 후대에 그 어떤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인가를 자식들에게도 가르친 이혜련은 한 가족의 어머니요, 재미 한인사회의 대모로서 큰 삶을 살았다. 이혜련의 삶은 정치 결사에 참여해 투사적으로 살지는 않았으나 민족 수난기에 남편인 도산 안창호가 大義에 헌신할 수 있도록 희생적인 뒷바라지를 하며 자신이 가장이 되어 가족의 생계와 자식 교육을 책임진 위대한 어머니이며 강철과 같은 여성이었다. 당시 한국의, 아니 재미 한인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한인사회를 안정시키는 절대적 존재들이다. 생활을 책임지고 자식의 교육을 책임지며 많은 여성들이 남성을 대신하여 가장이 되었다. 그럼에도 이혜련의 삶이 범상치 않음은 가장이었지만 가족주의에만 매몰되지 않았던 점에 있다. 이혜련은 독립운동계의 지도자 안창호의 아내에서 머물지 않고 한인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큰 삶을 살았다. 또한 모든 면에서 솔선수범 하며 행동 자체가 교훈이 됨으로써 아버지의 부재에도 자녀들을 훌륭하게 성장시킨 그녀에게 재미 한인사회는 큰 존경을 표하였다. 도산 안창호와 결혼식을 올린 이튿날 유학길에 동반한 이혜련은 다른 미주 이민자들과 다름없이 문화적 차이와 인종차별, 그리고 언어장벽으로 고통받고 경제적 여력이 없는 불안한 생활 속에서 고통받았다. 한인 여성들은 전세계에서 가장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여권이 신장된 곳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살고 있었지만 여권 신장 문제로 고민하거나 갈등하지 않았다. 아니 관심 밖의 일이었다. 자신들이 성장한 고향을 떠나 낯선 이국의 땅에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던 이혜련의 내면에도 이질적 갈등 요소들이 자리잡을 여력이 없었다. 재미 한인여성들의 제일의 관심은 내 나라를 다시 찾아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일이었으나 자신의 이름보다 누구의 어머니, 누구의 부인으로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 이에 대해 개의치 않았다. 그녀들의 자아는 자신들의 문제보다는 내 자식을 독립된 국가의 훌륭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일이었다. 이혜련이 미주에 이주한 때는 1902년으로, 재미한인사회로 보면 이주 초창기에 해당한다. 초창기 이혜련의 사회적 활동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공립협회를 결성하고 국권회복운동에 뛰어들어 바빠진 남편을 뒷바라지 하면서 동시에 자식의 성장과 교육을 도맡아하고 무엇보다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가장으로서의 삶을 살기에 여력이 없었다. 어머니로서 생활인으로서의 고단한 삶 가운데에서 혜련의 꿈과 목표 역시 남편인 안창호와 마찬가지로 조국 독립이었으며 이민 1세대로서 혜련은 동포사회에 그 꿈을 공유하고 전파하였다. 이혜련 삶의 궤적은 독립기념관 소장의 안창호자료 중에 남편과 가족, 그리고 주변의 인물들과 주고받은 편지들과 대한여자애국단 관련 기록,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에서 간행한 『안창호전집』,『미주 국민회 자료 집』과 《新韓民報》, 그리고 딸 안수산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었다. 본 논문은 안창호의 부인으로서가 아닌 인간 이혜련의 삶에 주목하고 재미 한인사회 여성운동사측면에서 한국근대사를 살펴볼 생각이다.
8,900원
7.
201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도산 안창호의 일생을 살펴볼 때 나타나는 큰 특징은 전 세계가 독립 운동의 무대였다는 점이다. 그는 독립운동을 위해 그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이 세상 끝까지라도 방문하고 일을 성사시키고야 말았다. 도산은 전 세계를 遊歷하였지만 장기간에 걸쳐 머물면서 사업을 진행한 곳은 미국과 중국․러시아를 제외하고 멕시코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17년 10월부터 1918년 8월까지 10개월가량 멕시코 전역을 순행하면서 한인들을 위무하고 한인사회에 독립운동 활기를 불어 넣었다. 안창호는 도산 개인의 자격이 아닌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이라는 공적인 직함을 가지고 멕시코를 방문하였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1910년 대 해외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단체는 대한인국민회였다. 1909년 2월 국민회가 창립되면서 미주 본토에는 북미지방총회를, 하와이에는 하와이지 방총회를 설치하였으며, 시베리아와 만주지방에도 지방총회가 조직되어 대한인국민회는 무형의 정부로서 해외 한인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멕시코에도 1909년 4월 국민회 메리다지방회가 조직되면서 한인들의 이익을 옹호하고 독립운동을 지도하는 기관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어려운 경제사정에도 불구하고 멕시코지역의 한인들은 국민회를 중심으로 상호단결하여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지켜나가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멕시코지역 한인사회는 국민회를 중심으로 단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 무엇보다도 한인들 의 경제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을 강구하지 못했다는 점이며, 멕시코 국민회에는 절대적인 지도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멕시코 이민자들 가운데 지도적인 지식층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한인사회를 이끌어 나갈 지도력이 빈곤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미주의 국민회에 지도자를 갈구하였지만, 중앙총회에서도 이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주지 못하였다. 이같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멕시코 한인들은 국민회 중앙총회에 의무금․가옥채․기계채 등을 보냈고, 동맹저축, 애국동맹금 등한 각종 특별 의연을 거두었다. 3․1운동 기간에는 메리다지방회 소속의 한인들이 1919년 12월 1일까지 중앙총회에 ‘21례’와 인구세 등을 합쳐 약 1천 달러가 넘게 보냈다. 이같이 멕시코의 한인들이 미주의 국민회와 각종 독립운동 사업을 후원할 수 있었던 데는 안창호의 순행이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요컨대, 멕시코 한인사회가 단결되고 독립운동을 후원할 수 있는 배경에는 국민회의 실제적인 지도자인 안창호가 짧은 기간이지만 순행을 통해 한인사회를 단결시켰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안창호의 방문을 통해 멕시코 한인들은 국민회를 중심으로 단결되었으며 한인사회를 안정시키고, 나아가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는 점에서 멕시코 한인사 및 독립운동사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안창호의 멕시코 순행에 대해서는 별다른 연구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의미도 크게 평가 받지 못하였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안창호의 멕시코 순행에 대한 자료를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그 성과와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6,000원
8.
201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독립운동 시기에 도산 안창호(1878 - 1938)만큼 활동한 기간이나 범위가 넓었던 지도자는 드물다. 안창호는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한 이래 1938년 서거할 때까지 일관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국내를 비롯하여 연해주와 미주지역· 중국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민회와 대한인국민회· 흥사단 등을 비롯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대표적인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한국근대사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안창호는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으로 선출된 이래, 국무총리 대리를 겸직하면서, 1921년 5월 노동국 총판을 사임할 때까지 2년여동안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이 시기는 임시정부 수립 초기로서, 임시정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물론이고, 사실상 행정수반이나 다름없었던 안창호의 역할과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된다. 안창호와 관련해서는 그의 활동과 사상을 비롯하여,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졌다.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한 실 상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연구업적이 발표되었다. 이를 통해 안창호가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체제를 정비하고 활동한 내용을 비롯하여, 통합정부를 수립한 과정들이 상당히 밝혀졌다. 이 글은 이러한 선학들의 연구성과를 기초로 안창호와 임시정부의 관계, 그 중에서도 임시정부를 이끈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이해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내무총장으로 조직과 활동기반을 마련하여 임시정부를 출범시키고, 국내외에서 수립된 세 임시정부의 통합을 실현한 과정, 그리고 임시정부가 파국으로 치닫게 된 원인과 그가 임시정부를 떠난 과정을 살펴보려고 한다.
7,700원
9.
201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얼핏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안창호와 사회주의’라는 이 글의 주제는 아주 작은 두 개의 단서에서 출발했다. 그 하나는 『주간조선』 1719호(2002년 9월 5일)에 실린 「[발굴 특종] 77년 만에 밝혀지는 ‘모함 투서’의 진상」이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도산 안창호가 미국에서 마지막 독립 운동을 하던 1925년 당시 소련 공산당과 연계가 있다고 모함한 한 투서로 미 정부 당국의 감시 대상 속에서 심문과 가택 수색까지 당한 사실이 77년 만에 처음 밝혀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확하게 말하면 이 기사는 특종이 아니다. 안창호가 ‘공산주의’ 관련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이 사실이 처음으로 등장한 자료는 《신한민보》1925년 6월 25일자의 「안창호씨도 쏘비에트주의자라고」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안창호가 “미국에서 볼셰비키주의를 선전하므로 미국 법률에 범하였다”는 이유로 추방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었다. 한편 김산(본명은 장지락)이라는, 당 시로서는 무명에 가까운 조선인 혁명가의 삶을 그린 책으로 유명한 『아리랑』에도 “1924년(1925년-발표자) 샌프란시스코에서 공산주의 서적을 자택에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검거 되었지만,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음날 석방되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따라서 1920년대 중반부터 이미 안창호가 ‘공산주의자’라는 소문 때문에 곤경에 처해 있었다는 이야기는 민족 운동 전선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에 안창호의 측근 인물도 한 좌담회에서 이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 다른 하나의 단서는 김산이 제공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안창호는 “이 제까지 받은 영향 중 두 번째로 커다란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그런 안창호에 대해 김산은 “손문과 중국 민족주의자들이 중국의 복잡다단한 문 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맑스주의로 전향함과 동시에 안창호는 공산주의 이론과 전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안창호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직 미숙한 한국 공산당을 반대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평가했다. 안창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면서도 ‘공산주의’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산당’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 주목된다. 주지하듯이 김산은 민족주의에서 무정부주의로, 그리고 다시 무정 부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민족 운동의 노선을 바꾸어 나가면서 일제와 투쟁한 인물이다. 민족 운동의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두루 섭렵한 뒤 최종적으로는 사회주의자가 된 김산이 안창호를 ‘반(反)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평가한 것이다. 이 글은 어떻게 보면 별로 큰 의미가 없을 것도 같은 이 두 단서에서 출발해 안창호의 또 다른 측면 곧 사회주의 또는 사회주의 운동과의 관련성을 살펴보려고 한다. 안창호는 분명히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1920년대 이후 민족의 해방과 나라의 독립을 위한 새로운 이데올로기 로서의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고 더 나아가서는 민족 운동 전선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운동과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 안창호였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이 글의 목적이 있다.
5,800원
10.
201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9,2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