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핏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안창호와 사회주의’라는 이 글의 주제는 아주 작은 두 개의 단서에서 출발했다. 그 하나는 『주간조선』 1719호(2002년 9월 5일)에 실린 「[발굴 특종] 77년 만에 밝혀지는 ‘모함 투서’의 진상」이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도산 안창호가 미국에서 마지막 독립 운동을 하던 1925년 당시 소련 공산당과 연계가 있다고 모함한 한 투서로 미 정부 당국의 감시 대상 속에서 심문과 가택 수색까지 당한 사실이 77년 만에 처음 밝혀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확하게 말하면 이 기사는 특종이 아니다. 안창호가 ‘공산주의’ 관련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이 사실이 처음으로 등장한 자료는 《신한민보》1925년 6월 25일자의 「안창호씨도 쏘비에트주의자라고」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안창호가 “미국에서 볼셰비키주의를 선전하므로 미국 법률에 범하였다”는 이유로 추방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었다. 한편 김산(본명은 장지락)이라는, 당 시로서는 무명에 가까운 조선인 혁명가의 삶을 그린 책으로 유명한 『아리랑』에도 “1924년(1925년-발표자) 샌프란시스코에서 공산주의 서적을 자택에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검거 되었지만,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음날 석방되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따라서 1920년대 중반부터 이미 안창호가 ‘공산주의자’라는 소문 때문에 곤경에 처해 있었다는 이야기는 민족 운동 전선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에 안창호의 측근 인물도 한 좌담회에서 이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 다른 하나의 단서는 김산이 제공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안창호는 “이 제까지 받은 영향 중 두 번째로 커다란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그런 안창호에 대해 김산은 “손문과 중국 민족주의자들이 중국의 복잡다단한 문 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맑스주의로 전향함과 동시에 안창호는 공산주의 이론과 전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안창호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직 미숙한 한국 공산당을 반대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평가했다. 안창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면서도 ‘공산주의’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산당’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 주목된다. 주지하듯이 김산은 민족주의에서 무정부주의로, 그리고 다시 무정 부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민족 운동의 노선을 바꾸어 나가면서 일제와 투쟁한 인물이다. 민족 운동의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두루 섭렵한 뒤 최종적으로는 사회주의자가 된 김산이 안창호를 ‘반(反)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평가한 것이다. 이 글은 어떻게 보면 별로 큰 의미가 없을 것도 같은 이 두 단서에서 출발해 안창호의 또 다른 측면 곧 사회주의 또는 사회주의 운동과의 관련성을 살펴보려고 한다. 안창호는 분명히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1920년대 이후 민족의 해방과 나라의 독립을 위한 새로운 이데올로기 로서의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고 더 나아가서는 민족 운동 전선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운동과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 안창호였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이 글의 목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