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1878~1938)와 소앙 조용은(1887~1958)은 한국 근대 민족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였다. 안창호가 글쓰기보다는 대중 연설과 대중의 조직을 결성하고 이끌었던 실천적 행동가 유형이었다고 한다면 조소앙은 운동의 이론적 체계 확립에 중점을 두었던 학자풍의 이론가였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연배의 차이도 있고, 성장환경과 학문적 배경이 달랐다. 그리고 중국에서 함께 활동하기 이전에는 미국과 유럽의 문물을 경험했다는 점도 달랐다. 그러나 두 사람은 1920년대 이후 중국이라는 이국 땅에서 독립운동을 함께 전개했다. 그들은 대한 민국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이라는 민족주의적 독립운동 조직 내에서 함께 활동하였다. 1920년대 중반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둘러싸고 서로 대립하기도 했지만, 1920년대 후반 민족유일당운동을 전개하면서는 서로 뜻을 같이 하였다. 이때 두 사람은 좌우익의 이념적 대립을 해소하고 통일적인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이념과 주의의 통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안창호는 대공주의를, 조소앙은 삼균주의를 내세웠다. 필자는 이미 조소앙의 생애와 삼균주의에 대해 연구한 바가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조소앙의 삼균주의 자체를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안창호의 대공주의나 다른 사상체계와 비교하는 작업에는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안창호의 대공주의와 조소앙의 삼균주의의 관련성에 대한 기존의 연구를 미처 참고하지 못했다. 따라서 1930년대 초 조소앙에 의해 체계화 된 삼균주의를 안창호는 대공주의라는 용어로 표현하고자 했다는 사실만 지적했을 뿐, 대공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진행하지 않았다. 이에 양자의 구체적 관련성을 조사하거나 양자를 비교하는 작업을 수행하지 못했다. 이에 본고에서는 먼저 안창호의 대공주의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자 한다. 그러나 안창호의 대공주의에 대해서는 그가 남긴 직접적인 자료가 없다고 한다. 따라서 후대의 사람들이 그의 대공주의를 어떻게 기억하고 설명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서 접근할 수밖에 없다. 이를 바탕으로 기존의 연구에서 안창호의 대공주의가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가를 밝힌다. 그리고 대공주의가 조소앙의 삼균주의와 어떤 관련성이 있 다고 이해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다음으로는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대한 필자의 연구를 토대로 기존의 연구 성과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도산의 교육사상에 관한 연구는 주로 겉으로 드러난 행적과 업적을 바탕으로 평면적인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도산의 모든 활동을 넓은 의미의 교육활동으로 보고 그러한 운동을 가능하게 한 내면의 교육사상, 즉 교육을 바라보는 관점을 좀 더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하여 20세기 이후 현대의 진보적 교육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듀이의 교육관을 기본적인 틀로 사용하고자 한다. 듀이는 프래그머티즘의 철학을 집대성했을 뿐 아니라 그 사상을 토대로 진보주의 교육운동을 주도했으며 수많은 저작을 남겼다. 그 중 38세(1897년)에 작성한 ‘나의 교육신조(My Pedagogic Creed)’는 비교적 초기에 자신의 교육관을 5개 영역으로 나누어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신념을 피력하는 형식으로 서술하였다. 그 5개의 질문은 ①교육이란 무엇인가? ②학교란 무엇인 가? ③교재란 무엇인가? ④교육방법이란 무엇인가? ⑤교육과 사회진보 의 관계는 어떠한가? 이다. 그리고 1916년에 출판된 민주주의와 교육은 모두 26장(chapter)에 걸쳐 새로운 교육이 추구하는 방향과 과제를 전통적 교육과 대비하여 폭넓게 논술한 대표적 저작으로 그의 교육사상을 집대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도산의 교육관을 듀이가 제시한 5개 영역을 기본 틀로 하여 듀이가 시종일관 강조하고 있는 새로운 교육 관에 비추어 분석해 봄으로써 도산 교육관의 본질을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우리나라 시민교육적인 면에서 흥사단 교육활동 성과는 시대에 맞는 교육이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각 사안에 적극적이지 못하다는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101년의 성장과정에서 굴곡의 역사를 지나면서 흥사단 약법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여 의도하는 인물을 양성하였는가에 대해 반추해 볼 일이다. 현대의 흥사단이 시민운동을 주도하지 못하고 방관자적 자세를 견지한다는 일부의 비판도 존재한다. 굵직한 정치적 사안이나 한국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갈등상황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않고 관망하는 경우가 많다는 게 이유다. 흥사단은 그 이유를 흥사단원내 다양한 입장이 존재하기에 발생하는 중립적 입장 유지라 표명하지만, 그것이 역사 깊은 국민교육과 시민사회단체로서의 자세인지에 대해서는 입장이 분분하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흥사단의 시민교육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만 할 것이다. 흥사단의 시민교육활동은 크게 단원의 교육훈련과 일반시민대상의 교육활동으로 볼 수 있다. 흥사단원의 교육은 흥사단 본부와 ‘민족통일 운동본부’(1997), ‘투명사회운동본부’(2001), ‘교육운동본부’(2002)의 3개 운동본부주관으로 실시되는 활동과 각 지부별로 실시되는 교육활동으로 나뉜다. 흥사단 회원훈련 사업은 흥사단의 가장 기본이 되는 사업이다. 흥사단의 회원훈련은 크게 학생훈련과 청소년 아카데미의 집회활동과 성인 단우들의 월례회 등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그밖에 수련회와 각종 행사를 통한 훈련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흥사단의 가장 전통 있는 프로그램인 『금요강좌』이외에 각 지방별로 시민강연회를 개최하거나 교양강좌, 학부모교실, 취미강좌, 전통문화강좌 등 다양한 사회교육 프로그램을 개설 운영하며 지역주민을 위한 향토문화 가꾸기 등의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흥사단의 본부와 지방지부들은 통일, 교육, 환경 등 시민실 천운동과 건강한 지역공동체 문화를 가꾸기 위한 다양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흥사단 시민교육의 지향하는 목표와 내용을 흥사단 약법과 도산사상을 통해 점검해 보고, 흥사단 시민교육의 이론적 접근을 통해 보편적 성격과 특수성을 논리적으로 체계화해 일반적인 흐름을 파악해 낼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또한 미래 한국사회의 당면 문제점 해결을 위한 흥사단의 시민교육활동의 전망을 예측해 보고자 한다.
본고에서는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으로서 그리고 노동국총판으로서 도산이 어떻게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전개했는지 그 과정을 살펴 임시정부가 전개한 독립운동의 실상을 두 번의 시위운동을 통해 밝혀내고자 한다. 또한 시위 당시 작성·배포한 선언서 및 진정서에 대한 분석을 곁들여 시위를 추진한 의도와 의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국내 독립운동 가운데 특히 시위운동에 주목한 까닭은 임시정부가 많은 국민들을 동원하여 전개한 독립운동 방략이기 때문이다. 본 연구를 통해 임시정부가 수립 초기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펼친 실상과 도산의 독립운동 노선에 대한 오해가 밝혀지리라 기대한다.
해방 후 도산 안창호에 관한 연구는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져 왔다. 그 결과는 전기나 평전, 전집, 자료집, 논문집 등 다양한 형식으로 출판되었다. 전기는 1947년에 출판된 이광수의 도산 안창호가 판을 거듭하면서 오랫동안 가장 널리 읽혀지고 활용되었다. 그 후 1963년 주요한에 의하여 편찬된 안도산전서는 비교적 과학적이고 객관적 입장에서 생애와 사상, 그리고 일기와 연설문, 서간문, 회고록, 논문 등 그때까지 수집된 자료들을 망라한 저술로 초기의 도산 연구에 많은 기여를 했다. 2000년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에서 독립기념관에 보관된 새로운 자료들을 추가하여 그때까지 수집된 거의 모든 자료를 총망라하여 전질 14권으로 된 島山安昌浩全集을 편찬하였고, 이어서 2005년에는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의 지원으로 도산학회에서 전질 22권의 미주국민회자료집을 편찬하여 도산 연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본 연구는 그동안 이루어진 연구 성과 중에서 도산의 교육사상 및 교육활동과 관련된 연구 성과를 분석하고 앞으로의 연구 과제를 생각해보는데 목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연구 성과라고 하면 1차 자료의 발굴과 해석 및 창조적 재구성 결과를 의미한다. 교육과 관련된 도산 연구는 1차 자료와 기존의 연구물을 토대로 한 2차적 작업이 주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는 대학원의 학위논문과 학술지 혹은 학회에서 발표된 연구논문을 대상으로 분석하기로 했다. 따라서 잡지나 단행본의 일부로 실린 수필형식의 짧은 글은 제외하고 주(註)를 포함한 논문의 형식을 갖춘 것만을 대상으로 하기로 했다. 물론 기러기를 비롯한 잡지류에 게재된 수필 형식의 짧은 글이라도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될 수는 있지만, 많은 경우 이런 글은 다른 연구 논문과 중복될 가능성이 많아 여기서는 제외하기로 했다. 또한 ‘교육사상에 관한’ 연구를 어떻게 한정할 것인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도산에 관한 다양한 연구를 학문 영역별로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논문의 주제에 ‘교육’이라는 용어가 포함되어 있는 연구물을 원칙으로 하고, 주제에 명시되어 있지 않더라도 연구자가 교육학 전공자이며 그 내용이 교육에 관한 연구라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포함시키기로 했다. 또한 ‘교육사상’은 좁은 의미의 사상(철학)에 국한하지 않고 도산의 교육에 관한 생각과 주장 및 교육적 활동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했다. 그리고 연구물은 그동안 필자가 보유하고 있는 문헌 목록과 최근 이명화 박사가 종합 정리한 자료목록, 국립 중앙도서관 및 국회 도서관의 자료 검색을 종합하여 작성하였으나 여전히 누락된 것들이 있을 수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근현대사에서 도산 안창호(1878 – 1938)만큼 주요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는 인물은 드물 것이다. 그 동안 도산 안창호에 대 해서는 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졌다. 도산과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 하여 『島山安昌浩全集』을 발간하였고, 역사학을 비롯하여 정치학·경제학·교육학·체육학 등 여러 분야에서 많은 저서와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이제 그동안 이루어진 연구 성과를 점검하고, 앞으로 수행할 연구 과제를 살펴보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한다. 도산에 대해서는 여러 분야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연구 성과에 대한 점검은 별달리 없었다. 저서나 논문에서 연구사를 정리하는 것 외에는, 이명화의 「도산 안창호 연구의 성과 와 과제」가 유일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를 통해 1980년대 이전에는 도산의 교육·사상·철학 등에 대한 연구가 많았고, 도산을 위대한 사상가·교육자·민족의 지도자로 평가하는 것이 주요 연구경향이었음이 드러났다. 이에 비해 독립운동과 관련한 연구는 1990년대에 들어와서야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도산은 일평생을 민족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독립운동 최전선에 서 활약한 독립운동가였다. 1897년 독립협회에 참가한 이래 신민회· 대한인국민회· 흥사단을 조직하고, 이를 이끌었다. 그리고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으로 선출된 이래, 1932년 4월 일제경찰에 피체될 때까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수립 초기에 내무총장과 국무총리 대리를 겸직하면서, 임시정부의 조직과 체제를 갖추고, 임시정부가 정부로서 기능하고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데 도산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도산의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도산과 임시정부에 대해 서도 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졌다. 이 글은 도산의 독립운동,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관련한 연구 성과를 점검하고, 향후의 연구 과제를 전망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방법은 간행되거나 발표 된 자료 및 논문을 조사 정리하여 연구의 성과를 점검하고, 이를 기초로 향후 추진할 연구과제에 대해 언급하려고 한다.
본 글은, 도산 선생의 노래를 발굴 및 정리하여 실제로 활용이 용이한 새로운 악보집과 음원으로 복원시켜 국민들에게 보급하자는 것을 제안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작업의 단초를 제공하기 위한 성격을 띠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도산 선생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도산 선생과 우리 선조들이 만들어 낸 빛나 는 문화유산을 잘 보존하여 후세에 물려주자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먼저 도산 선생의 시를 가사로 만든 노래와 도산 선생의 작품으로 추정 및 언급이 되는 곡으로는 어떤 것이 있는지, 앞에서 언급한 세 편의 악보집에 수록된 곡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그 노래의 음악적 정체성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작곡자와 곡의 출처가 중요한데, 그것을 밝히는데 초점을 맞추겠다. 그와 함께 앞에서 언급한 문제점들을 감안하여, 명백한 오기로 기보된 것은 수정하고 훼손된 부분은 복원시킨 새로운 악보를 제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실제 연주를 해 보도록 하겠다.
이 글은 도산의 사사로운 개인 생활사에 관한 試論的 小考라 하겠다. 그동안 도산에 관한 연구는 상당하다. 유명한 연설가로, 독립운동가로, 교육자로, 민족의 스승으로 등 여러 분야와 여러 관점에서 조명되었다. 따라서 도산에 관해서는 더 이상 연구주제를 찾기 어려울 만큼 큰 진척을 보았다. 그러나 개인 도산 안창호의 사사로운 개인적 삶을 구명한 연구는 별반 없었다. 이 연구는 이러한 점에 유념하여 도산 삶 가운데 상해에서 활동하던 기간 (1919-1921)으로 한정하여 그의 개인생활의 일단을 살펴보려 한다. 마침 이 시기 상해에서의 개인 삶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일기>와 <편지>가 있어 이를 중심으로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흥사단은 2013년 5월 창립 100주년을 맞았다. 한국인에 의한 자생적 민간단체로 100년의 역사를 지닌 단체는 흥사단이 유일하 다고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수명을 다하고 시들어가는 조직이 아니라 현재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며 미래를 위해 다양한 준비를 하고 있는 조직이라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지난 100년은 민족사를 통틀어 가장 극심한 수난과 격변의 시기를 겪으며 세계가 괄목할 압축 성장을 이룩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흥사단은 민족과 더불어 영욕을 함께 하며 시대의 문제를 안고 씨름했다. 국권상실기에는 국권회복을 위하여, 광복 후에는 조국의 부흥과 재건을 위하여, 군부독재와 산업화 시기에는 민주화를 위하여, 민주화 이후에는 성숙한 시민사회 건설을 위하여 다양한 활 동을 해왔다. 그러나 흥사단의 다양한 활동은 어느 시기에나 외부의 도전과 내부의 갈등이 존재했다. 그러한 도전과 갈등은 대부분은 시대적 상황과 오해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흥사단 내부의 갈등 역시 목적 과 이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거나 인격훈련과 현실참여의 문 제에 대한 견해의 차이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따라서 흥사단운동에 대한 평가 역시 다양한 견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지난 4월 25일 창립 100주년기념 심포지엄에서도 ‘흥사단운동 100년의 민족사적 의의와 나아갈 방향’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그 밖에도 흥사단운동의 역사적 의의에 대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부분적으로 평가가 이루어졌다. 특히 도산학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도산과 흥사단의 역할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 졌다. 반면 해방 후의 흥사단의 활동에 대한 객관적이고 깊이 있는 연구는 부족한 편이다. 흥사단이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한국사회가 요구하는 내일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지난 100년에 대한 종합적이고 객관적인 평가를 통하여 흥사단만이 가진 강점을 찾아내어 그 토대위에서 새로운 미래를 설계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그동안 논의된 내용들을 바탕으로 좀 더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평가를 시도해 보고자 한다. 먼저 지난 100년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고, 흥사단이 민족사에 무엇을 공헌했는가를 짚어보고, 흥사단의 한계와 과제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1878~1938)의 기독교 신앙에 관해서는 이미 선행 연구에서 많은 부분이 해명되었다. 이 논문은 이들 선행연구의 성과를 수용하면서 도산 안창호의 선교사와의 관계를 좀 더 보완해 보려는 의도에서 시도되었다. 그러나 선행 연구에서 발굴 이용한 자료 외에 특별히 다른 자료들을 찾지 못해 기대한 만큼의 성과는 달성할 수 없었다. 도산 안창호는 1894년 선교사를 만남으로써 신교육을 받고 기독교를 믿게 되었으며, 1902년 9월 1차 도미할 때도 선교사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선교사 밑에 들어가 교회 일하기를 거절하였고, 당시 선교사들의 내세지향적 신앙과 정교분리 정책에는 비판적이었다. 그의 선교사와의 직접적인 관계는 1910년 4월 국외 망명 이후로는 1933년 9월 밀러가 당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그를 면회하고 안혜련 여사에게 편지한 것 외에는 거의 자료가 없는 것 같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안창호가 기독교에 입교하고 제1차 도미하기 이전까지 시기와 1907년 2월 귀국하여 1910년 4월 다시 해외로 망명하기까지의 시기로 나누어 선교사와의 관계를 다시 정리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