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필자는 그에 앞서 제2장을 통해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의 평안도 출신 의사들이 수적으로 얼마나 되었는지, 그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은 누구인지 살펴볼 것이다. 도산 안창호가 일찍부터 평안도의 지도자가 되었고, 일제강점기의 흥사단 단원 중에 평안도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근현대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분야에서 평안도 출신의 엘리트층이 수적으로 다른 지역들을 압도하였고, 질적인 측면에서도 그들의 업적과 영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던 점도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의료계 역시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리고 평안도 출신의 의학도나 의사들에게 도산은 민족의 지도자이자 스승으로 여겨졌을 것이기에 직간접적으로 상호작용을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본고에서는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 관ᆞ사립 의학 교육기관을 졸업한 사람들의 출신지역별 분포를 집계하여 평안도 출신의 비중을 확인해보기로 한다. 아울러 평안도 출신의 대표적인 의료인과 흥사단 단원으로 활동한 의료인의 면면을 파악해볼 것이다.
도산 안창호와 관련된 인물들 가운데 유상규처럼 가깝게 묘사된 사람도 드물다. 유상규는 이광수에 따르면, “도산의 우정을 그대로 배운 사람”이라고 했고, 장리욱에 따르면, “도산을 스승으로만이 아니라 분명 어버이로 모셨다. 도산 앞에서의 행동거지는 물론이지만 또 도산의 신상 모든 일에 대해서 갖는 유군의 그 세심한 정성은 훌륭한 ‘효자’ 바로 그것이었다”고 회고하 였다. 나아가 도산 스스로도 유언으로, “내가 죽은 후에 내 몸은 내가 평소에 아들같이 역이든 유상규 군 곁에 묻어주오”라고 했다. 이처럼 도산과 가깝다고 알려진 유상규는 어떤 인물일까? 이것이 이 연구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유상규의 생애와 활동보다는 도산과의 관계, 특히 독립운동과의 관련성을 추적해 본 것이다. 아시다시피 도산은 1878년생으로 1897년생인 유상규와는 나이 차이가 19세로 부자지간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컸다. 유상규 또한 도산을 선생처럼 모시고 그의 ‘우정’을 배우고 따랐기 때문에 사제지간이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중국 상해와 국내에서 도산을 측근에서 보좌하고, 그의 활동을 보필했기에 민족운동의 동지이기도 했다. 두 사람을 이어준 여러 인연들이 보인다. 우선 지연(地緣)이다. 도산은 평남 강서출신이고 유상규는 평북 강계출신으로 서북출신 이라는 지연성을 가진다. 두번째는 신교(信敎)의 동질성이다. 도산과 유상규 모두 장로교도로 종교적 인연이 있다. 나아가 경신 학교 선후배 관계로 학연(學緣)도 있다. 무엇보다도 유상규는 도산이 창설한 흥사단 단원이자 도산이 이끈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기 요원으로, 귀국 후에는 흥사단 국내지부와 같던 수양 동맹회와 수양동우회 그리고 동우회에서 활동한 도산사상의 공감 자요 실천자로 여겨진다. 이 같은 두 사람의 관계를 추적하는 데는 유상규의 유족들이 편찬한 두 권의 책 『애국지사 태허 유상규』(흥사단출판부, 2007)와 『태허 유상규』(더북스, 2011)가 큰 도움이 되었다.
이 글의 목적은 2016년 현재 시점에서 도산에 대한 연구의 현황과 과제를 사회교육 중심으로 살펴보는데 있다. 1876년 병자 수호조약을 계기로 개항한 이후 1945년 해방되기까지의 시기, 즉 개화기 및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인물들인 유길준, 서재필, 김구, 이승만, 신채호, 박은식, 이상재, 이승훈, 안창호 등에 대한 연구는 대체적으로 많이 이루어진 편인데, 이들 중에서도 특히 도산 안창호에 관한 학문적 연구는 우위를 점한다. 도산 안창호에 관한 연구는 1969년에 이일천에 의해 시작되어 2016년 현재 박만규에 이르기까지 짧지 않은 기간인 47년 동안 이루어져 학위 논문이나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 수가 많은 편이다. 최근 연구자는 도산 안창호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가지면서 스스로에게 가지게 된 물음(自問) 셋이 있다. 하나는 나는 도산과 흥사단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혹은 얼마나 알고 있는가? 둘은 나는 누구로부터 어떤 자료를 통해 도산과 흥사단에 대해 배우고 학습하였는가? 셋은 내가 배우고 학습한 도산과 흥사단의 참 모습 혹은 원형은 어떠한가? 연구자의 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의 하나로 지금까지 이루어진 도산 연구에 대한 현황과 과제를 사회교육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첫째, 2016년 현재까지 이루어진 도산 연구가 주로 어느 분야에서 이루어졌는가? 둘째. 현재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분야는 있는가? 있으면 어느 분야 인가? 셋째,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분야에 대한 사례 소개의 하나로 사회 교육 분야의 연구를 살펴보고, 새로운 연구 방법의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도산 연구의 역사를 살펴 시대 구분을 하고, 시대 구분에 따른 시대별 연구 동향, 연구 주제어를 워드 클라우드 기법으로 분석하였다. 더불어 도산 연구 사례로 사회교육 관점에서의 선행연구를 살펴보고, 도산 연구의 과제를 탐색하였다.
근대 이후의 애국창가운동에 대해서는 음악적 차원에서 많은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 있다. 그러나 신민회와 도산과의 관계에서 파생된 애국창가운동에 대해서는 해명되어야 할 문제가 많다. 본 논문은 많은 애국창가의 작사자로서 도산에 주목하고 그의 새로운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본다. 신민회에 의해 전개된 애국 창가운동의 전개와 경술국치 이후 식민지화된 조국에서 더 이상 불리지 못하고 국외 한인사회로 번져나간 애국창가운동의 추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발표의 대주제는 “애국창가운동과 도산 안창호”이다. 도산은 애국창가를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지도자였다. 도산이 애국창가를 작사했고, 각종 모임에서 애국창가 부르기를 권장했으며, 애국창가를 통해 “정의돈수(情誼敦修)” 즉 ‘서로 사랑하기’를 통한 단합을 이끌어냈다. 도산의 애국창가운동에는 인간에 대한 신뢰,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중요성, 단합을 통한 힘의 중요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이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도산의 리더십, 도산 리더십 하의 공동체 문화를 특징짓는 애국창가는 도산의 이상과 도산의 리더십의 특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본고에서는 도산의 비전과 목표, 도산 리더십의 특징과 연관하여 도산의 애국창가운동이 가지는 의미와 성격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만드신 애국시가 수십 편에 이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또 그것이 ‘애국창가’라는 장르의 노래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그중에는, 한 시대를 풍미하였고 또 음악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노래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한국근현대음악사 관련 문헌을 보더라도 안창호 선생이 지으신 애국시(愛國詩)를 가사로 한 애국창가에 관련된 내용은 거의 없다. 심지어는 ‘도산 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의 홈페이지에도 ‘노래’라는 코너는 있지만 가사만 소개되었을 뿐이고, 도산기념관에서조차 노랫소리를 들을 수 없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국보급 문화유산과도 같은 선생의 노래를 보존은 고사하고 잃어버렸기 때문에 잊혀진 노래가 되어버리고만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일제(日帝)는 선생뿐만 아니라 선생의 노래마저도 철저히 탄압을 하였다. 노래 부르는 것은 물론 금지를 시켰고 악보를 압수하여 불에 태워 버렸다. 때문에 국내에서는 선생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몇몇 노래는 다른 사람이름으로, 또 몇몇 노래는 만든 사람의 이름이 없는 가운데 불리기는 했지만, 그 노래(가사)를 만든 사람이 도산 선생이라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 다. 다행히 최근 들어 여러 학자들의 노력 덕분으로 도산 선생의 작품 또는 도산 선생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애국시’가 수십 편 발굴이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시(詩)를 가사로 하여 만든 애국창가도 수십 편이나 발굴이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써, 1914 년 중국 만주에 설립된 민족학교인 광성중학교에서 발행한 『最 新唱歌集附樂典』과 하와이에서 1916년에 발행한『애국창가』 등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最新唱歌集附樂典』과 『애국창가』에 수록된 악보는, 거의 100년이 지났고 또 구전(口傳)된 것을 악보화하였기 때문에 가사와 음(音)의 정확성이 다소 떨어지며, 필기체로 흘려 쓴 것이 많고, 띄어쓰기가 없고, 악보 표기가 잘못되었거나 안 보이는 부분이 많은 등 가독성이 떨어지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곡을 만든 작곡자의 이름을 명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가사에 곡을 붙인 오리지널 곡인지, 기존 곡에 가사를 붙인 것인지, 한국 사람이 만든 곡인지, 서양 사람이 만든 곡인지, 일본 사람 만든 곡인지 알 수 없다는 문제점도 가지고 있다. 도산 선생의 애국시를 가사로 한 애국창가를 국민들에게 보급 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악보를 가독성이 있는 현대 악보로 복원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악보집으로 만들어 보급한다면, 음악회뿐만 아니라 교육용, 연구용 등 많은 용도로 활용이 될 것이고, 근대 관련 영화나 독립운동 관련 다큐멘터리의 배경음악을 만드는데도 활용이 될 것이다. 본고의 1차적 목적은 악보복원에 있다. 그리고 그 곡의 음악적 특징 및 음악사적 의미를 고찰해 보고자하는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 복원한 악보를 바탕으로 음악회 형식으로 재현해 보고자 한다.
역사사진은 당대를 해명하고 진실을 찾아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사료이다. 오늘날과 같은 디지털시대에 사진은 우리 주변 가까이에 늘 존재하고 있지만 한국 근현대사에서 사진의 존재는 여전히 드물고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당대 직업적인 신문기자나 혹은 사진 관련 전문인들이 아니면 사진기를 소장하 기는 어려웠다. 그뿐만 아니라 사진이 역사의 기록이 된다고 하는 의식을 가진 이도 많지 않았다. 더욱이 비밀리에 모이고 운동 해야 했던 독립운동가들이나 항일운동 단체에서 기념으로 남긴 사진이 적에게 들어가 증거물이 되게 되면 그 사진이 근거가 되어 일제 경찰에 체포당할 수도 있어 공식적인 기념사진을 남기는 것을 꺼리기도 하였다. 그 점에서 미국에서 활동하고 미국문화에 익숙했던 도산은 사진의 중요성과 그 역사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도산은 북미 최초의 결사인 샌프란시스코 한인친목회를 결성하고 북미 한인의 지도자로 부상하면서 공립협회와 대한신민회 등을 결성하고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미주 대한인국민회 활동 등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많은 기록 사진을 남기었다. 도산에게서 사진은 함께 기념하고 소장해야 하는 친근한 매체이면서 역사적 기록을 남긴다고 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와 관련 된 많은 사진 자료가 생산되고 전수될 수 있었다고 본다. 많은 사진 기록들이 소실되었으나 현재까지 살아남은 자료들은 소중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이번 도산 안창호 탄신 138주년을 맞이하여 도산학회의 정기 학술회의에서는「도산 안창호와 사진 그리고 역사」라는 대주제 아래 도산의 활동을 크게 국내·중국·미주로 구분하여 각각의 범주에서 남겨진 사진 자료를 통해 도산의 다양한 활동상을 보여줄 기회를 갖고 사진에서 보여주는 장면의 의미를 새롭게 돌아보고자 한다.
오늘 도산선생탄신 138주년 기념을 위해 모인 도산의 사람들에게 감사드린다. 도산선생의 미주 활동에 대한 원고 청탁을 받고 한동안 망설였다. 여기 계신 도산학자들과 더불어 저명한 역사학자들이 도산선 생의 미주활동에 대해서 집필한 많은 논문과 서적이 발간 되어있어 역사학자가 아닌 내가 더 보탤 내용이 무엇인지 고민을 많이 했다. 결국 나는 작가로서 제일 궁금한 점들을 살펴보기로 했다. 즉, 그 당시 도산선생과 동료들의 삶과 경험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 원고를 준비했다. 나는 항상 매크로적인 시점에서 매사를 보기 시작하는 버릇이 있어서 우선 도산선생의 활동 범위를 파악하기 위해 도산선생의 자취를 구글지도에 입력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