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와 관련된 인물들 가운데 유상규처럼 가깝게 묘사된 사람도 드물다. 유상규는 이광수에 따르면, “도산의 우정을 그대로 배운 사람”이라고 했고, 장리욱에 따르면, “도산을 스승으로만이 아니라 분명 어버이로 모셨다. 도산 앞에서의 행동거지는 물론이지만 또 도산의 신상 모든 일에 대해서 갖는 유군의 그 세심한 정성은 훌륭한 ‘효자’ 바로 그것이었다”고 회고하 였다. 나아가 도산 스스로도 유언으로, “내가 죽은 후에 내 몸은 내가 평소에 아들같이 역이든 유상규 군 곁에 묻어주오”라고 했다. 이처럼 도산과 가깝다고 알려진 유상규는 어떤 인물일까? 이것이 이 연구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유상규의 생애와 활동보다는 도산과의 관계, 특히 독립운동과의 관련성을 추적해 본 것이다. 아시다시피 도산은 1878년생으로 1897년생인 유상규와는 나이 차이가 19세로 부자지간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컸다. 유상규 또한 도산을 선생처럼 모시고 그의 ‘우정’을 배우고 따랐기 때문에 사제지간이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중국 상해와 국내에서 도산을 측근에서 보좌하고, 그의 활동을 보필했기에 민족운동의 동지이기도 했다. 두 사람을 이어준 여러 인연들이 보인다. 우선 지연(地緣)이다. 도산은 평남 강서출신이고 유상규는 평북 강계출신으로 서북출신 이라는 지연성을 가진다. 두번째는 신교(信敎)의 동질성이다. 도산과 유상규 모두 장로교도로 종교적 인연이 있다. 나아가 경신 학교 선후배 관계로 학연(學緣)도 있다. 무엇보다도 유상규는 도산이 창설한 흥사단 단원이자 도산이 이끈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기 요원으로, 귀국 후에는 흥사단 국내지부와 같던 수양 동맹회와 수양동우회 그리고 동우회에서 활동한 도산사상의 공감 자요 실천자로 여겨진다. 이 같은 두 사람의 관계를 추적하는 데는 유상규의 유족들이 편찬한 두 권의 책 『애국지사 태허 유상규』(흥사단출판부, 2007)와 『태허 유상규』(더북스, 2011)가 큰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