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 엘리엇은 전혀 새로운 시인으로서 20세기 영미시에서 우리가 전혀 본적이 없는 시를 쓴 시인이다. 그러나, 그는 유럽, 특히 프랑스 시의 전통에 확고한 뿌리를 둔 시인이다. 반면, W.B. 예이츠는 자신이 상징이라고 정의한 시의 특성을 추구한 시인으로 영시나 아일랜드 시에서 금세기에서 조차 어떤 시인도 그를 능가하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은 엘리엇에 영향을 준 프랑스 시인에 대해 이야기 한다. 엘리엇은 프랑스의 새로운 시인들과 접촉하게 되어 독특한 시를 쓰게 된 것은 명확한 것 같다. 엘리엇은 시인 코르비에르에게서 프랑스 시인들이 무시하고 가치를 보지 못한, 프랑스 시의 전혀 새로운 면을 볼 수 있었다. 이 글은 구하의 책에서 프랑스 시의 영향을 다룬다. 특히 트리스탄 코르비에르의 엘리엇에 대한 영향을 논하다. 코르비에르는 당시 프랑스에서 전혀 관심을 끌지 못한 무명시인이었다. 엘리엇은 이 시인에게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것을 자신의 시에 잘 사용하였다. 구하는 이점을 다룬다. 반면 예이츠는 불어시를 읽을 수 없었고 프랑스 시에 큰 영향을 받지 않은 것 같다. 예이츠는 그의 산문에서 엘리엇의 새로움과 위대함을 지적한다.
예술가와 그의 일생은 공적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일생은 역시 사려 깊개 다루어져야 한다. 이점에 있어 브랜다 매독스의 책 예이츠의 영혼: W.B. 예이츠의 내밀한 생활(뉴욕: 하퍼콜린사, 1999년)은 약간의 문제를 야기한다. 이 책은 그러나 예이츠학문에 기여하는 바가 상당히 큰 것 같다. 이 책은 한 예술가의 생활에서 비밀스러운 것을 알고자 하는 일반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즐겁게 만들 일에도 집중하는 것 같다. 지난 수십 년 간은 일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변화가 있었고 어떤 것도 숨기지 않고 들추어낸다. 그렇지만 이 두 사람의 개인사를 이야기하면서 저자 메독스는 자신이 무엇에 대해 저술하고 있는 지, 더구나 이 두 사람의 이미지에 손상이 가는 것이 무엇일까에도 주의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조지 예이츠의 그림은 우스꽝스럽고, 예이츠의 그림은 더욱 그렇다. 반면에, 이 책의 장점을 지적한다면, 이 책을 천천히 읽으면, 색인이 보여주듯이 얻는 게 많을 것이다. 즉, 예이츠부부가 자동기술 때 등장하는 넋(컨트롤)의 이름이 모두 섬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예이츠가 관계를 맺었던 모든 여성들이 (이 책이 전기이기 때문에) 주의 깊게 색인으로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색인에는 많은 시와 극 등 작품들이 정리되어 있는데 예이츠의 생애의 흐름에 따라 맥락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논문은 예이츠 부부가 행한 자동기술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예이츠와 조지가 자동기술을 한 시기의 편지를 읽고 다음은 영향을 미쳤을 수 있는 시들을 보는 것이다. 하나의 방법은 지동기술 이전과 이후의 시들을 비교하는 것인데, 이 논문은 자동기술 이전과 이후의 시와 환상록 발간 이후의 시가 어떻게 다른가를 살핀다. 이 논문의 의의는 어떤 시인들과 평론가들은 그를 마술사로 여기면서 낮게 평가한다. 나는 환상록을 만드는 과정이 예이츠의 시를 풍요롭게 만들었다고 여기며, 설령 그가 마술사가 아니었어도 그는, 그의 초기시들이 보여주듯이, 위대한 시를 썼을 것이다. 에즈라 파운드는 대학 때 예이츠의 초기시에 이끌려 영국으로 건너와 예이츠를 직접 만나고자 했다. 그들의 만남은 결국 현대시의 역사를 바꾸게 된다. 본 논문은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는 예이츠부부의 자동기술의 과정을 들여다 볼 것이고 2부는 환상록 이전에 쓰여진 시와 이후에 쓰여진 시들을 비교하고, 환상록의 의의를 평가한다.
이 논문은 먼저 2권의 주요 저서를 다루는데 한권은 R.F. 포스터의 예 이츠 전기이고 다른 한권은 데이비드 피어스의 우수한 저술로 학술적이고 미학적으로 아름답지만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 책들의 목적이 무엇인가? 예이츠는 정말로 인생을 아니면 예술을 완성하고자한 것인가? 우리에게 지금 예이츠의 인생과/혹은 작 품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학자, 전기작가, 시인이 많다. 그중 가장 탁월 한 학자로서 리처드 엘만은 예이츠와 그의 작품 두 가지 다 들여다 볼 수 있을 뿐 아 니라 그이 작품을 느낄 수도 있는 전기작가이다. 사학자로서 R.F. 포스터의 시선은 예 이츠가 인생에서 무엇을 하는 지를 보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준다. T.R. 헨의 방법은 시인 예이츠와 시를 멀리가지 않고 직접 다룬다. 다른 전기작가들과 학자들의 작품도 위의 저자들만큼 중요하다. 이 논문은 필요에 따라 자신의 글에 맞게 예이츠의 시를 편집하는 학자들도 다루는 데, 그들 중 일부는, 그러나, 자신의 목적에 맞춰서 예이츠 의 시들을 휘거나 자르기를 한다. 물론 그들은 이것이 예이츠와 그의 시에 얼마나 독 이 되는 지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고 나는 이것을 지적한다. 본 논문의 목적은, 그 러나, 이러한 전기나 저술을 판단하기보다는 예이츠의 작품의 진면목을 되찾아주고 싶 은 것이다. 현대시인으로서의 예이츠를 오해하거나 현대시인으로의 예이츠를 “마지막 낭만주의자”(예이츠 자신이 만든 말)라고 칭하면서 과소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책들을 간결하게 검토하는데, 이 작 업은 예이츠와 그의 포스트모던한 작품의 면모를 읽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그런데, 모더니즘 혹은 포스모더니즘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가? 아마도 어렵지 않을까? 나에게 이 질문을 던지면 나 역시 쉽게 답하지 못할 같다. 그래서 이 문제를 안고 책 몇권을 뒤적인다. 그래서 결국 이와 관련하여 제안을 하고 싶은데, 낭 만주의, 모던니즘, 포스모더니즘 등 -주의, 혹은 -이즘 대신에 문학사적으로 운동을 시 기(시대)구분 하는 것은 어떨까?
예이츠는 왜 아직도 많은 독자들과 학자들에게 흥미로울까? 왜 사람들 은 예이츠와 이우환과 사이 톰브리에 매료될까? 예이츠는 모던니스트 시기의 시인인 데도, 이우환과 사이 톰브리는 포스트모더니스 시기의 예술가들인데도? 이 논문은 이 흥미와 매혹의 원천이 무엇인지 알고자한다. 또 이 논문은 데리다를 보면서 그의 디콘 스트럭션-그가 텍스트를 어떻게 생각하고 읽는 지-이 나를 어떻게 작품들(이를테면 이 작품들은, 작가들은 디콘스트럭숀 미학을 알지 못했겠지만, 포스트모던 예술가들 사이 톰블리와 이우환이 만들었고 예이츠의 작품 일부는 디콘스트럭션의 미학으로 만들어 진 작품들이기 때문에)을 잘 읽을 수 있을까를 도울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이 논문은 젊은 학자들에게 지나치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몇몇 저명학자들의 디콘스트럭션의 잘 못된 읽기와 실천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것은 가능하면 빨리 수정되어야 할 방향이다.
예이츠는 확실히 완벽한 시의 시인이다. 아니면 적어도 그가 살아있는 동안 어느 때건 끊임없이 자신의 시를 다듬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에서 비추어 자신의 시를 완벽하게 만들려고 했다는 것만은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바로 이 질문에 답 해야한다: 그가 죽을 때까지 간행하지 않았던 시들을 간행해야 하는가? 나는 이 시들을 읽고 나서 예이츠의 판단에 동의하고자 한다. 즉, 발행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시 연구학자들에게는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달빛 아래서: 초 기미간행시』 (조지 본스틴; 뉴욕: 스크리브너, 1995)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난해한 원고를 읽고 해독하고 각 시에 주를 다는 본스틴의 노력은 가치 있는 일이었다.
예이츠는 초기시 일부를 미간행으로 남겼다. 본 논문은 이 미간행시들 중 「일출」을 분석하여 물의 은유법, 영혼의 이미져리, 코머의 (미)사용, 어린시절의 예이츠에게 미친 셸리의 영향 등을 포함하여 시인 자신이 선정하고 간행한 그의 시전집 과 희곡전집의 후기 작품에서 어떻게 이 시적 양상이 다시 나타나는 지를 분석한다. 「일출」은 예이츠 초기 산문 「셸리 시의 철학」과 「무드」가 보여주듯이 초기에 예이츠가 셸리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시를 처음 쓰기 시작할 때부터 시인 예이츠는, 시인과 과학자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시인은 논리보다는 이미지와 무드로 말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출」의 내용과 이 시가 쓰여진 방법은 미래 의 시인 예이츠의 진로를 보여준다. 따라서 이 시는 앞으로 예이츠가 어떤 시를 쓸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시가 된다. 이 시가 아직 미숙하지면 지금의 위대한 예이츠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원천이 될 것이다. 본 논문은, 아마도, 영미권은 물론이고 국내외 예이츠 학계에서는 세계 최초로 “미간행”(예이츠 생전에 출판을 막았던) 시 「일출」을 분석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본 논문은 W. B. 예이츠가 20세기의 주요 작가인지를 다시 고찰하려한다. 더 나아가 그가 지난 세기뿐 아니라 금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인지를 보기 위해 그의 “주요” 시를 재조명하려고 한다. 지난 세기의 대작가들인 T. S. 엘리엇과 W. H. 오든을 포함하여 예이츠가 1939년 사망 20-30년간 주요 평론가와 시인들이 내린, 예이츠는 대시인이다, 라는 평가가 있었으니까 지금의 평가가 더 자세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단지 엘리엇과 오든이 가졌던 이 평가에 대한 의심에 초점을 맞추려한다. 그 들은 예이츠의 신화에 대한 의심이 있었지만 본 저자는 긍정적이다. 그들의 의심은 예 이츠가 “마술”의 시인이라는 데 기인한다. 그가 마술의 시인이었다는 점은 문제가 되 기보다는 20세기의 불모성의 시학이라는 장애물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를테면, 엘리엇의 신화의 사용은 예이츠와는 다르다. 그는 황무지에서 보듯 이 그는 신화를 빌려다 사용하는데 신화를 신화로 다루고 있다. 본 논문은 예이츠가 그의 주요시에서 신화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이 사용이 그의 시들을 어떻게 위대하게 만들고 20세기의 큰 시인들과 차별성을 만드는지 고찰하는데 역점을 둔다.
우리나라 사과 재배에 가장 널리 이용되는 수형은 세장방추형으로 수령이 증가함에 따라 수관 내부의 광환경이 불량해진다. 전정을 통한 부분적인 수관 변경은 이러한 문제점 개선의 효율적인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이와 관련하여 나무 중간의 수관 변경에 따른 수관 내 광환경의 변화를 살펴보고, 과실 품질 향상을 위한 적절한 측지 관리 방법을 모색하고자 4.0 × 1.5m로 재식된 ‘감홍’/M.9을 대상으로 2년간 시험을 수행하였다. 처리 1은 측지를 짧게 단축하여 수관 폭을 좁게 만드는 것이었고, 처리 2는 측지를 유인하는 것이었으며, 처리 3은 대조구로 기존 세장방 추형의 수관을 유지했다. 1. 처리 1은 수관 하부로의 광투과율이 가장 높았고 기존 세장방추형에 비해 과중과 착색도가 높은 과실의 생산이 가능 했으며 높은 꽃눈 분화를 나타냈다. 2. 처리 2는 유인에 따라 가지의 중첩에 의한 음영 발생 증 가로 광투과율이 오히려 감소하였고 이에 따라 과실 착색의 저하를 초래하였다. 3. 따라서 광환경 개선과 하부의 과실 품질 향상을 위한 가 장 효율적인 측지 관리 방법은 중간에 위치한 측지를 길이 50 cm 내로 단축 전정하여 수관 폭을 좁게 유지하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본 논문은 이미 많은 학자들이 이런저런 방법으로 『갈보리의 언덕』을 읽었지만 주요 평론가들의 평가를 평가하여 예이츠의 『갈보리의 언덕』에 대한 평가를 바로잡는 것이 목적이다. 사실 대부분의 읽기가 불충한 것처럼 보이는데, 아마 이 작품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해서 그런 것 같다. 최고의 예이츠 학자인 헨렌 벤들러의 영향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녀는 이 작품에 대한 결론을 “별 알맹이 없는(negligible)” 작품이라고 내린다. 본 논문은 이 작품을 피상적이거나 빠르게 읽어 내려가기 보다는 가능한 한 면밀하게 읽고 음미하려고 한다. 본 논문은 이 극이 예이츠의 최고의 중기작 품으로 평가한다. 학자들은 이 작품에 대한 소개든, 주제 분석이든 간에 작품 자체를 충분히 이해하고 음미하려고 한 노력이 부족했었다. 벤들러의 짧은 논의는 한마디로 “알맹이 없는”이라 요약되는데 이 평가가 본 논의를 촉발했다. 그녀의 경우 아마 학위 논문의 주제와 연관해서 8장 “죽음, 정죄, 그리고 부활”에서 『갈보리의 언덕』을 짧게 논한다(이 장이 다루는 다른 극은 『부활』이다). 아마 주제에 한정해서 논하다보니까 이 극의 가치를 간과한 것이지 모른다.
본 논문은 블레이크와 예이츠 간의, 예이츠와 히니와의 관계를 시학의 관점으로 연구하며, 각 작가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작가간의 시의 변화를 살핀다. 그러나 사실 이 관계는 후기시인들을 변화시키는 전통을 연구하는 것이다. 예이츠의 존 돈과 블레이크와의 관계, 예이츠의 히니와의 관계를 보는 것이다. 즉, 과거와 현재의 작자들 사이의 교류가 바로 관계의 시학이 되는 것이다. 본 논문의 핵심은 과거와 현재 를 자신의 시학으로 만들고 이것을 근거로, 많은 작품을 남기게 된 예이츠의 핵심적 초국가적, 초개인적 현상을 시의 분석을 통해서 찾으려 한다.
본 논문은 현대문학의 중심에 예이츠를 두고 현대문학의 초민족주의시 학을 구획하고 정의하려고 한다. 20세기의 주된 작가 예이츠, 파운드, 엘리엇과 레이디 그레고리와의 문학적 교류를 다루고자 한다. 이들 중 레이디 그레고리와 파운드와의 관계는 면밀했었다. 예이츠가 극작품을 집필하기 시작할 때 레이디 그레고리의 예이츠에 대한 영향력을 컸었다. 파운드의 경우, 파운드의 초기에 예이츠의 영향력을 강력하였고, 스톤 오두막에서의 협업 이후에는 파운드의 영향은 예이츠가 낭만주의의 시삭을 극복하는 촉매가 된다. 먼저 서두에서 본 논문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려고 하는데, 예이츠는 가족적 사회적 배경을 근거로 예이츠를 바라보며 아울러 아일랜드 안에 서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내외에서 발생하는 아트 운동과 문학운동의 맥락으로 예 이츠를 보려고 한다. 작가 예이츠의 변화를 추적할 때 본 논문은 미시적 및 거시적 관점을 견지하여, 그의 시 세계의 보다 크고 명학한 면을 드러내고자 한다.
본 논문은 예이츠의 작품의 춤의 모티브, 특히 “어신의 방랑”과 다른 시 들에서의 춤을 연구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예이츠의 시와 일본의 노극 『천의(天衣)』를 비교한다. 이 논문의 의의는 일부 평자들이 잘못 주장하듯 노극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작품이 아니라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예이츠 작품을 분석하는 근거로서 중요하다는 것이다. 본 연구는 파운드와 펜놀로사가 번역한 2편의 노극 『천의』와 『사랑의 마술봉』을 다루는 시리즈 중 첫 번째 연구이다. 본 논문은 예이츠가 노극을 접하기 전과 후의 춤의 이미져리를 포함하는 작품을 다룬다. 따라서 본 연구와 차기의 연구는 예이츠가 얼마나 노극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영향에 불구하고 노극에서 출발하였다고 하더 라도 그의 작품이 여전히 가치가 있는 지를 규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