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예이츠 부부가 행한 자동기술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예이츠와 조지가 자동기술을 한 시기의 편지를 읽고 다음은 영향을 미쳤을 수 있는 시들을 보는 것이다. 하나의 방법은 지동기술 이전과 이후의 시들을 비교하는 것인데, 이 논문은 자동기술 이전과 이후의 시와 환상록 발간 이후의 시가 어떻게 다른가를 살핀다. 이 논문의 의의는 어떤 시인들과 평론가들은 그를 마술사로 여기면서 낮게 평가한다. 나는 환상록을 만드는 과정이 예이츠의 시를 풍요롭게 만들었다고 여기며, 설령 그가 마술사가 아니었어도 그는, 그의 초기시들이 보여주듯이, 위대한 시를 썼을 것이다. 에즈라 파운드는 대학 때 예이츠의 초기시에 이끌려 영국으로 건너와 예이츠를 직접 만나고자 했다. 그들의 만남은 결국 현대시의 역사를 바꾸게 된다. 본 논문은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는 예이츠부부의 자동기술의 과정을 들여다 볼 것이고 2부는 환상록 이전에 쓰여진 시와 이후에 쓰여진 시들을 비교하고, 환상록의 의의를 평가한다.
이 논문은 워즈워드와 예이츠의 시에 나타난 자연과 회귀성이 초기 작품들과 후기 시들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 연구한다. 두 시인들은 그들의 감정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매개체를 자연에서 끌어왔다. 워즈워드에게 자연은 지식과 즐거움을 주고, 전 생애에 영향을 미친다. 워즈워드가 인간과 자연사이의 유대관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예이츠는 그러한 관계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 데 있어서 모호한 태도를 보인다. 예이츠는 낭만적 서정시에서 시작 활동을 시작하여 후기 시들에 이르기까지 자연으로부터 회귀적인 주제들을 더 깊은 통찰력으로 보여준다.
마야의 교리는 삶의 본질을 구성하는 경험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경험은 삶의 실제를 구성하는데, 마야는 세상의 그런 당혹스러운 경험을 이해하는 능력과 관련하여 경험을 무지의 범위 안에 두어 존재의 가치를 평가하는 척도의 일환으로 삼는다. 두 번째로 마야는 앞서 말한 사건과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면 해방을 제안하는 로고스를 창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본질적으로 모순되는 피상적 경험의 출현을 겪지만 동시에 더 높은 수준에서 피상적 경험에게 변함없이 계속되는 실질적인 경험을 겪는다. W. B. 예이츠, T. S. 엘리엇과 W. H. 오든의 시에서 우리는 각 시인이 삶의 혼란스럽고 상충되는 경험을 이야기함으로써 마야 교리와 조화를 이루는 예술적 성장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 시인들은 각 개성에 따라 큰 투쟁을 하면서 통합과 행복을 가져오는 궁극의 경험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는다.
이 논문은 미국 남부의 농본주의운동에 의한 예이츠의 수용을 배경으로 예이츠의 문학적 유산이 다양한 문화적 맥락 속에서 전유되는 방식을 검토하고 있다. 남부의 전통과 현대성 사이의 대립적 구성을 바탕으로 농본주의 비평가들은 예이츠의 문학적 비전 속에서 그 둘의 결합의 가능성을 찾았고, 그를 그러한 통합과 완성의 표식으로 주조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이츠에 대한 미국 남부의 수용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남부 모더니티의 중심에 도사린 불안감, 다시 말해 현대시와 전통 사이의 연속성을 주장하고 싶은 열망과 그 연속성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지역적 특수성 사이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남부의 예이츠 수용은 예이츠의 문학적 유산이 문화적 역사적 충돌을 통해 지속적으로 재문맥화될 것임을, 그리고 예이츠의 지역적 수용의 혼란스러운 방향성은 그 위대한 시인의 문학적 유산의 창조적 계승 가능성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쿠훌린의 죽음은 극작가 예이츠의 마지막 작품으로 아일랜드의 영웅 쿠훌린과 예이츠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극작가의 연극에 관한 최종적 생각들이 프롤로그를 전달하는 “노인”에게 투영된다. 이 논문은 프롤로그에 나타나 있는 극작가 예이츠의 연극에 대한 사상과 연극 장치로서의 프롤로그의 기능에 초점을 두어 연구한다. 또한 예이츠가 그의 연극 경력 동안 꾸준하게 시도해온 반연극적 장치들이 이 작품의 프롤로그와 상호작용하면서 어떤 시너지 효과를 창출해내는지 탐구한다. 결론으로써 쿠훌린의 죽음의 프롤로그는 예이츠의 반연극적 장치들이 관객들에게 다가가 보다 적합한 연극적 환상을 만들어내는데 유용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예이츠의 『자서전』은 어린 시절의 회상, 가족과의 이별, 다양한 집단과의 교류, 그리고 자아형성을 거쳐 시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그러나 연대기적 진행은 서사를 일관성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예이츠가 자신의 경험에 부여한 여러 문체적 장치에 의해 그 서사는 분명하지 않고 애매함을 지닌다. 이미지의 불연속성과 여러 기억들, 애매함과 명료함을 넘나드는 표현 등이 결합되어, 그의 자아와 주변세계는 모호하고 단편적인 속성을 지닌다. 예이츠는 또한 종종 응축된 이미지에서 새로운 인물과 사건을 갑자기 도입하여 연속된 절들 사이의 연계가 서로 상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 불연속성은 그가 시간, 장소, 인물을 독특하게 표현하거나, 접속사의 연속적인 사용 및 생략하는 구문을 선택하거나, 식구, 친구 및 경쟁자에 대해 단편적으로 재현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자서전』을 저술하면서 예이츠는 글을 쓰는 현재의 순간에서 바라본 자아, 그렇지 않았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자아를 재구성한다.
예이츠는 그의 순환적 역사의식과 함께 통합적 존재를 통해 최종적이며 고통스러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재생의 가능성을 믿고 있다. 또한 죽음에 대한 프로이트적 반응형성을 통해 형성된 가학피학적 성적 욕구와 욕망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죽음과 성적 욕망의 통합된 삶의 에너지를 느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는 3월의 보름달과 「그의 기억」, 「숲속에서의 그녀의 환상」, 「늙은 미친 제인이 무용수들을 바라본다」 등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죽음과 성적 욕망의 통합을 확인하려고 한다.
블레이크는 후기시의『밀턴: 두 권의 시집에서 시』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신화적 우주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한다. 블레이크의 신화적 우주는 고대 그리스의 우주와 달리, 성경의 우주를 변형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우주를 독자에게 전달한다. 그의 대우주는 천국, 지옥, 골고누자, 뿔라, 울로, 제너레이션, 지상 세계로 나눠지며, 더불어 인간의 육체는 소우주로 설명된다. 독자들은 밀턴이라는 주인공을 통해서 블레이크의 우주를 탐험하지만, 이 시에서 블레이크의 우주를 명료하게 이해하기는 힘들 것 같다. 이는 블레이크가 시적 영감을 받은 대로 시를 구술해 나가기에 그의 우주에 대한 노래가 체계적으로 서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 시에서 블레이크의 영감과 상상력에 깊은 찬사를 보낼 것이다.
예술가와 그의 일생은 공적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일생은 역시 사려 깊개 다루어져야 한다. 이점에 있어 브랜다 매독스의 책 예이츠의 영혼: W.B. 예이츠의 내밀한 생활(뉴욕: 하퍼콜린사, 1999년)은 약간의 문제를 야기한다. 이 책은 그러나 예이츠학문에 기여하는 바가 상당히 큰 것 같다. 이 책은 한 예술가의 생활에서 비밀스러운 것을 알고자 하는 일반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즐겁게 만들 일에도 집중하는 것 같다. 지난 수십 년 간은 일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변화가 있었고 어떤 것도 숨기지 않고 들추어낸다. 그렇지만 이 두 사람의 개인사를 이야기하면서 저자 메독스는 자신이 무엇에 대해 저술하고 있는 지, 더구나 이 두 사람의 이미지에 손상이 가는 것이 무엇일까에도 주의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조지 예이츠의 그림은 우스꽝스럽고, 예이츠의 그림은 더욱 그렇다. 반면에, 이 책의 장점을 지적한다면, 이 책을 천천히 읽으면, 색인이 보여주듯이 얻는 게 많을 것이다. 즉, 예이츠부부가 자동기술 때 등장하는 넋(컨트롤)의 이름이 모두 섬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예이츠가 관계를 맺었던 모든 여성들이 (이 책이 전기이기 때문에) 주의 깊게 색인으로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색인에는 많은 시와 극 등 작품들이 정리되어 있는데 예이츠의 생애의 흐름에 따라 맥락으로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