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1958년 처음 짐 맥게리(Jim McGarry)를 비롯한 창립 멤버들 이 <슬라이고예이츠학회>(The Yeats Society of Sligo)를 설립하고, <예이츠 컨트리 예술 축제>(Yeats Country Arts Festival)를 그해 5월에 개최하고, 그 이후오늘 까지의 예이츠 섬머스쿨의 연대기적, 문화적, 학술적 성장과정을 Sligo 지도와 예이츠의 전기 적 사실에 기초한 역사적 자료를 제시하면서 세밀하게 구성하고 있다. 또한 이 역사적 배경에 기초하여 예이츠 학자들이 <예이츠 인터네셔널 섬머스쿨>(Yeats International Summer School)을 운영해온 과정을 그린다. 또한 예이츠의 시와 학자들의 예이츠 시 의 이해를 중심으로 자세하게 연대기를 작성하여, 특히 창립초기의 학문적 배경과 문 화적 배경을 탐색하여, 이른바 슬라이고의 “조그만 지하문화”(Sligo’s small cultural underground)에서 성장하여 슬라이고 민속촌으로 변모해가는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예이츠는 왜 아직도 많은 독자들과 학자들에게 흥미로울까? 왜 사람들 은 예이츠와 이우환과 사이 톰브리에 매료될까? 예이츠는 모던니스트 시기의 시인인 데도, 이우환과 사이 톰브리는 포스트모더니스 시기의 예술가들인데도? 이 논문은 이 흥미와 매혹의 원천이 무엇인지 알고자한다. 또 이 논문은 데리다를 보면서 그의 디콘 스트럭션-그가 텍스트를 어떻게 생각하고 읽는 지-이 나를 어떻게 작품들(이를테면 이 작품들은, 작가들은 디콘스트럭숀 미학을 알지 못했겠지만, 포스트모던 예술가들 사이 톰블리와 이우환이 만들었고 예이츠의 작품 일부는 디콘스트럭션의 미학으로 만들어 진 작품들이기 때문에)을 잘 읽을 수 있을까를 도울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이 논문은 젊은 학자들에게 지나치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몇몇 저명학자들의 디콘스트럭션의 잘 못된 읽기와 실천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것은 가능하면 빨리 수정되어야 할 방향이다.
청금석 부조 는 W. B. 예이츠가 중국을 주제로 다룬 시이다. 중국적인 것에 대한 제한된 지식으로 인해 시인은 그 테마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중국 청 금석 부조에서 받은 영감을 받아 이 시를 썼다. 이 논문은 중국적 요소가 지닌 본래의 의 미와 예이츠의 재현을 자세히 비교함으로써 예이츠의 상상력이 실제로는 오독에서 비롯 된 것이며 따라서 일부 예이츠 학자들의 해석이 오해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몰개성은 경험의 진실을 가져오기 위해 예술가의 입장에서 행하는 실천 이다. 그러한 진실한 경험은 현실과 아름다움을 모두 포함한다. ‘실재적’인 능력 안에 서 우리는 몰개성의 경험이 충만함과 전체성을 가져온다면 몰개성의 미적 상태가 더 큰 이해를 암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T. S. 엘리엇, W. B. 예이츠와 존 키츠는 인 간 삶의 모든 의미를 ‘결집’하여 예술로 만듦으로써 ‘감수성의 메커니즘’을 고안하여 예술을 창조했다. 이 위대한 시인들에게 몰개성화의 과정은 궁극적으로 현상과 현실이 구별되는 방식에 기반을 둔다. 따라서 엘리엇은 일상의 경험을 단편, 무정부 상태 및 불규칙성과 동일시하지만 예이츠는 일상의 수준에서 나타나는 동일한 경험을 대립적 으로 본다. 한편 키츠는 탐닉이 최대 상태의 일상의 사건들과 상황들로 일상을 위치시 킨다. 전체성의 출현이 연기되는 분명한 현상에 대한 해결책으로 엘리엇, 예이츠, 키츠 는 경험의 진리를 실현하기 위한 확실한 조치인 ‘몰개성,’ ‘존재의 통일,’ ‘부정적 능 력’을 제시한다.
토마스 트러헌, 윌리엄 블레이크, W. B. 예이츠는 영문학사에서 신비주 의 시인으로, 때로는 예언자로도 인정받는다. 세 작가는 모두 체제 비순웅적이고 비관 습적이었고 문학계의 시적 평가에서 모호성과 불신에 직면했다. 트러헌의 일부 저작물은 유실되었고 일부는 거의 사고로 불탔으며 그의 생애에서 단 한 작품만 살아남았다. 예이츠의 보다 사적인 시 중의 많은 것이 출판되지 않았고 블레이크는 그의 신학적 견해를 고려할 때 여전히 수수께끼와 혼돈스러움으로 남아있다. 비평가들은 트러헌의 기독교가 켈트 신비주의에 기대어 있다고 논평한다. 반면 블레이크의 시는 유아의 순 결한 순수성에 대한 트러헌의 믿음을 유지하기 때문에 일부 비평가는 트러헌이 블레 이크를 예비했다고 논평한다. 예이츠의 신비주의에 미친 블레이크의 영향은 잘 알려져 있고 문학 비평에서 입증되어 있다. 이 글은 트러헌, 블레이크, 예이츠의 시에 반영된 어린 시절의 영성에 초점을 맞추어 17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신비주의 시인들 의 글에 철학 및/또는 시의 연결점이 입증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결론으로 이 글은 이들 시인들의 신비시를 재맥락화하기 위해 탈자아적 심리학적 접근과 같은 최근의 학제간 프레임워크에 주의를 기울인다. 주제어: 유년시절의 영성, 신비주의, 영시
예이츠와 조지 하이드-리즈의 자동기술은 예이츠의 시학에 커다란 전환 점을 제공한다. 자동기술 이전에 예이츠의 시는 아일랜드의 문화와 역사, 모드 곤과의 사랑 등과 같은 아일랜드와 연인에 대한 사랑이 주요한 소재이었다. 그러나 자동기술 이후에 예이츠의 시학은 전 세계의 역사와 문화, 우주 등으로 확장된다. 더욱이 예이 츠와 아내의 자동기술은 인공지능의 초지능 상태와 유사하다. 그래서 이 연구는 예이 츠와 아내의 자동기술과 강인공지능의 초지능의 상태와의 유사점을 비교 분석하면서 예이츠가 그의 시에서 추구한 사상을 추적해 보는 것이다.
이 논문은 베케트의 문화적 상상력에서 예이츠가 차지하는 지위와 그 함의를 논의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문화민족주의에 기반하는 특수성을 담보하는 예 이츠의 문학과 이에 대항하는 세계주의적 모더니즘의 보편성을 지향하는 베케트의 문 학이라는 이분법을 해체하고 두 작가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이 논문은 두 작 가가 공유했던 20세기 초 아일랜드 개신교 공동체가 경험했던 문화 및 정치적 변화에 주목한다. 더불어 1930년대, 50년대, 70년대를 대표하는 베케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예이츠의 영향을 분석함으로써 베케트와 예이츠의 관계를 조명한다. 베케트가 아일랜 드와의 관계를 양가적으로 형성하는데 있어서 예이츠는 중요한 매개로 작동한다. 궁극 적으로 베케트에게 아일랜드는 유령화된 예이츠의 나라로 표상된다.
본고는 1904년 희극 [뉴스 퍼뜨리기] 속 아이리시 멜랑콜리의 개념 분 석을 통해 레이디 그레고리의 첨예한 문제의식을 파헤쳐 보고자 한다. 우선, 매튜 아 놀드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제안한 켈틱 멜랑콜리를 비교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 레이디 그레고리의 아이리시 멜랑콜리를 이론화한다. 궁극적으로 아이리시 멜랑콜리는 아일랜드 소작농이 갖는 전복적인 정치성과 창조적 가능성을 대표하는, 그러나 때로는 자기파괴적인 힘도 가진 정동으로 비춰진다. 더 깊은 이해를 위해 레이디 그레고리의 미출판된 에세이 [아일랜드의 웃음]과 1906년 초연 희곡인 [감옥문] 역시 언급한다.
예이츠의 시는 유토피아를 찾는 내용이 많다. 자신의 삶이 고통스러웠 음을 반증한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반평생 쫓아다닌 모드곤의 사랑을 얻지 못했고 사 회적으로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갈라진 아일랜드가 늘 서로 싸우고 헐뜯고 비난하는 세상을 경험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드니 또 다른 형태의 고통인 생로병사의 문제점에 직면한다. 그때마다 그의 시는 유토피아를 향한다. 늘 고통 속에서 몸부림 쳤던 시인 의 생은 어쩌면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예이츠는 예술가의 임무는 비극 속 에 신음하는 인간을 유토피아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결 국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인의 유토피아는 결코 물질적인 장소의 개념이 아니다. 시인 은 자신의 마음 깊숙이 존재하는 생각, 사고의 프로세스, 자유롭게 상상하는 힘, 죽은 자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예술적 창조의 힘, 그리고 명상의 힘이라고 말한다. 시인에게 는 그 정신적인 힘 그 자체가 유토피아이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예이츠와 타고르는 두 개의 다른 문화, 국가, 전통 을 대표하고 있으며 영국의 식민통치하에서 문학 활동을 하였다. 본 연구의 목적은 20 세기 전후 영국 식민지 상황에서 예이츠와 타고르가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민족주의 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고찰하는 데 있다. 예이츠와 타고르는 당시 극단적 민족주의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민족주의를 표방한다. 항상 자기 민족을 대변하지만 타고르는 다른 나라의 문화와 종교 그리고 민족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타고르는 인종적 경향을 강조하는 민족 주의 과정에서 인류애가 결여된 민족주의가 나타난다고 확신한다. 반면 예이츠는 자신 의 조국 아일랜드의 전통과 문화의 변질에 대해 우려한다. 타고르와 예이츠 모두 인류 역사의 비전에서 민족주의를 다룬다.
예이츠 시에서의 현실 인식은 약간 우의적이며 아일랜드 민중들에 대한 애증과 속물성에 대한 비웃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1926 부활절을 계기로 해서 민중에 대한 존경심으로 바뀌지만 이어지는 내전기의 폭력과 광기를 보면서 다시 증 오로 바뀌고 있다. 백석은 일제하의 엄혹한 시기를 살면서 그 어려움 속에 조선 민중 들이 서로 보듬고 지켜나가던 따뜻한 풍습과 공동체 정신을 시화하고 있다. 그의 시에 서 특히 돋보이는 것은 따뜻한 친족 관계이다. 이 논문에서는 이 두 시인의 유사점과 차이점, 그 뒤에 흐르는 인간애를 분석하려 시도한다.
이 논문은 예이츠 희곡이 내포하고 있는 메타연극적 장치를 논의한다. 혼비가 제시한 메타연극의 다섯 가지 유형을 기준으로 하여 예이츠 희곡 『삼월의 보 름달』을 분석함으로써 그의 희곡의 메타 연극성을 입증한다. 그럼으로써 이미 시극, 제의연극, 디에게시스 연극 등의 여러 명칭으로 불리고 있는 예이츠의 희곡이 메타연 극으로 분류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데 그 목적을 둔다.
이 논문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책들을 간결하게 검토하는데, 이 작 업은 예이츠와 그의 포스트모던한 작품의 면모를 읽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그런데, 모더니즘 혹은 포스모더니즘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가? 아마도 어렵지 않을까? 나에게 이 질문을 던지면 나 역시 쉽게 답하지 못할 같다. 그래서 이 문제를 안고 책 몇권을 뒤적인다. 그래서 결국 이와 관련하여 제안을 하고 싶은데, 낭 만주의, 모던니즘, 포스모더니즘 등 -주의, 혹은 -이즘 대신에 문학사적으로 운동을 시 기(시대)구분 하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