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스 피터 요쿰 교수는 예이츠 연구 서지학자들 중에 가장 저명한 학자로 예이츠와 예이츠연구를 말한다. 예이츠에 대한 방대한 글과 아직 시인 예이츠, 인간 예이츠에 대한 글이 쏟아지고 있는 것을 모으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의 통찰 력 있는 예이츠와 예이츠 연구에 대한 견해를 들을 수 있는 인터뷰를 하게 된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독자들은 그의 말을 귀담아 음미하시기 바란다.
예이츠는 당연히 무관의 아일랜드 대표시인이며, 건국 시인이다. 아일랜 드의 연극(애비 극장)의to 창립에 중추적이었으며, 애비 극장은 아직도 아일랜드의 위 대한 극예술 제도로 남아있다. 그의 아일랜드 문예부흥에의 헌신은 아일랜드의 민담과 전설을 감상하는 새로운 청중을 만들었다.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예이츠는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생각들조차도 스스로 일부 반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후기 작품들의 이론적 측면은 두드러지게 내적 통일성을 보이다. 즉, 사회와 개념, 이론들과 정신세계, 이미지론, 순환적 역사관, 등 사이의 구분이 쉽지는 않다. 이런 이유로, 나는 간단히 “예이츠의 우생학적, 영적 미학”이라는 주제를 다루고자 한다.
열정적 톤과, 영감을 일으키는 리듬과 구문으로 된, 탑(1928년)과 나선형 계단과 기타 시들(1933년)은 우울함과 분노로 차 있으나, 절망을 거부하는 힘으로, 비통함에서 긍정적 정신을 짜낸다. 한 마디로 이런 특징을 정의하면, 확신−즉, 수사적, 극적, 자기 극화적, 영웅적−확신이라 할 수 있는데, 시인은 이것으로 경험의 공적, 사적 영역 사이의 놀라운 결합을 만들어 낸다.
이 논문은, W. B. 예이츠의 「내란기의 명상」과 데릭 왈콧의 「대저택의 몰락」의 비교 연구로서, 왈콧이 예이츠에게서 많은 것을 빌려왔지만, 시적 기교라기보다는 목적과 태도의 모델로서 빌린 것이라 생각한다. 예이츠의 시에서는, 식민지 유산의 개념들을 빌리고, 그 개념을 다루는 작가개념을 받아들인다. 즉, 영국의 지배에서 독립 후 자신의 나라의 문화적 재건을 인도한다. 날카롭고 관조적 역사관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격리시키는 예이츠의 경향과는 다르게, 왈콧은 예이츠처럼 조국과 거리를 두지만 역사와 식민지적 유산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자신을 고립시키기보다는 서양의 규범과 식민지적 유산을 개방적이고 거침없이 활용한다.
예이츠의 『꿈꾸는 백골들』(1917)은 그가 일생동안 쓴 두 편의 정치 희곡 중 하나이다−다른 하나는 『캐스린 니 훌리훈』(1902)이다. 이것은 또한 3편의 다른 댄스 희곡들 중의 하나로, 일본의 노 드라마의 영감으로 그가 새로 고안한 연극의 형식이다. 플롯은 간단하다. 저 세상의 두 연인들은 700전 조국을 배반한 죄로 서로에게 키스할 수 없다. 그래서 여기서 젊은이에 의한 자신들의 죄의 정화를 갈망하지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들은 이제 다시 연옥으로 돌아간다. 젊은이는 도피 중일 것이고, 그들은 밤하늘로 돌아간다. 본 논문은 이 극의 구조적 힘, 특히 3명의 악사들이 이 연극에서 무슨 역할을 하는지 분석한다.
잭 예이츠는 W. B. 예이츠의 동생이다. 잭은 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작가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작가 잭은 새뮤엘 베켓에게 영향을 준 것 같으며, 베켓은 잭을 작가로, 화가로 주목했다. 본 논문은 잭의 예술에 대해 평한 베켓의 글 두 편을 다루며, 또한 잭의 문학과 예술의 특징을 논의하며, 잭과 베켓의 희곡 두 편을 비교, 분석한다. 베켓의 희곡은 잭의 영향을 보인다.
식민주의의 억압 하에서 예이츠와 소월은 문학과 민족의 정체성을 연계하여 민족정신을 다시 불러일으키려 한다. 두 시인은 신화와 민담에서 민족의 정신적인 근원을 찾아내고 이를 시에 담는다. 예이츠는 정신적 힘을 지닌 신화와 민담을 통해 아일랜드를 “상상의 공동체”로서 창조한다. 반면 소월은 신화와 민담에서 식민주의에서 고통 받는 민족의 고통을 실제적으로 환기시킴으로써 역설적으로 민족의 정신을 고취한다.
예이츠는 「1913년 9월」에서 중산층의 물질중시와 현실안주를 비난하면서, “낭만적 아일랜드”가 사라진 상황을 안타까워한다. 영웅적인 투사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죽었지만, 그는 새로운 아일랜드 창조에 중산층과 강경한 민족주의자들을 오히려 방해요인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낭만적 영웅심’이 사라지게 한 현 상황에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인식하면서, 화자인 예이츠의 분열된 혼란스러움이 재현된다. 「1916년 부활절」에서도 부활절봉기에 대한 화자의 유동적인 마음이 잘 나타는데, 봉기에 수반된 폭력에 대한 찬사라기보다는 폭력에 대한 의구심을 드러낸 양가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들에서 재현된 예이츠의 입장과 태도는 고정되거나 미결정의 상태로 끊임없이 출렁이는 이중성을 드러낸다.
죽은 부친과 동료 문인에 대한 그리움이 창작 동기가 된 『환영을 찾아서』는 애가인 동시에 작가의 사후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엿 볼 수 있는 초월 시 작법 서다. 시인은 죽은 자의 소유물을 응시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그들의 영혼이 어디로 갔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와 더불어 작가는 그들이 사라 진 사후세계를 상상 함으로써 현실세계로부터 영혼세계로의 항해를 시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들은 죽은 자들에 대한 회상 및 연민을 그린 점 때문에 낭만적 태도로부터 탄생 되었고 죽은 이들이 남겨 준 정신적 유산에 관심을 보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작품을 만들려는 점 때문에 부분적으로 모더니즘 작품의 특성을 나타낸다. 나아가 구체로부터 추상으로 의미의 다양화를 시도한 점 때문에 포스트모던 경향 역시 띤다고 평가할 수 있다.
셰이머스 히니는 여러 비평적 산문을 통해 시와 시인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시는 복잡다단한 현실에 목소리를 부여하여 결국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규명할 수 없는 현실의 복잡한 실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시인은 언어가 지닌 다중적인 의미 전달의 특성을 통해 결코 단순화할 수 없는 현실의 내면을 진실에 가깝게 제시한다. 특히 히니는 자연과 인간이 맺는 상호 관련성을 자신의 시의 주요한 틀로 삼는데, 이를 통해 시인은 자연의 생명력을 고취시키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시와 시인에 대한 그의 관점은 점점 더 실용성과 경제성을 강조하는 요즘의 풍토에서 시의 대사회적 역할을 제시하는 한편, 예술로서의 존재성을 강조하여 시와 시인에 대한 본래적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
예이츠가 「1916년 부활절」(“Easter 1916”)에 묘사한 부활절 민중봉기와 김남주가 오월시에 제시한 5·18민중항쟁은 국가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민주화에 대한 민중의 꿈이 외세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밖으로 분출된 진정한 민중의 항쟁이다. 부활절 민중봉기와 5·18민중항쟁은 서로 다른 문화와 정체성을 가진 민중이 자신들의 희망과 삶의 터전을 지키고 미래의 세대에게 자신들의 삶의 애환을 상속시키지 않고 종지부를 찍기 위하여 형제애의 정신으로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희생하는 숭고한 영웅적 행위를 하여 결과적으로 국가의 독립을 성취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구현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러한 민중은 바로 예이츠의 ‘존재의 통합’을 구현한 사람들이며, 참다운 ‘귀족’이다.
엘리엇은 자신이 대학의 학생이었을 때 예이츠는 이미 대단한 시인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두 시인들의 상징주의적인 표현기법은 매우 밀접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특히 엘리엇은 몰개성을 두 가지로 나누어 평가하면서 예이츠가 이 두 가지 모두를 실현해 내기 위해 노력한 시인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그들은 지적인 작품 창작 태도를 견지하거나 음악성을 강조하고 있는 점도 흡사하다. 예이츠의 예술 세계는 “작곡된”것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예이츠가 작품 창작과정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나친 감상적 표현을 삼가려는 그의 창작 태도는 엘리엇의 객관적 상관물의 원칙과 상통한다.
중기의 예이츠는 삶의 의미를 회복시키기 위해 삶에 초점을 맞춘 시론을 선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입장에도 불구하고 그는 초기와 마찬가지로 초월적인 세계를 마스크로 선택함으로써 중기시에는 마스크에 대한 동경과 이것의 결함을 제시하며 삶의 가치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공존하고 있다. 삶과 마스크의 갈등은 때로 중기 마스크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기 위한 예술의 이미지와 삶의 갈등으로 드러난다. 그의 시적 목표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불만족스러운 마스크로 인해 예술은 행복한 것이라는 마스크 이론이 함유하고 있는 예이츠의 주장이 훼손되고 있다. 중기의 마스크는 그의 중기 시론과 마스크 이론을 다 같이 훼손하며 삶과 마스크의 갈둥을 첨예하게 만들고 있다.
예이츠의 초기 시 「방황하는 엥거스의 노래」는 자연의 영혼들, 특히 숲속 요정 소녀의 혼을 불러내어 영적 교류를 나누려는 초혼제 성격을 보여주는 면에서 초자연적 샤머니즘 성격을 갖고 있다. 하지만 61세 때인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에 이어 70세 생일을 기념하여 쓴 「청금석 부조」 후기 시들은 예이츠가 공인으로서 동시에 전문 시인으로서 자연의 영혼들과 교감하고 신화의 정신을 복원해 삶의 본질을 가르치고, 이로 현실에서 사회, 문화, 종교문제를 개혁하려는 네오 샤머니즘 정신에까지 진화하고 있다. 예이츠의 네오 샤먼적 이미지는 시인으로서 음악, 춤, 주술에 가까운 예술의 혼을 통해 세상의 모순과 갈등을 건강하게 해결하려는 모습이며, 현실에서는 노년에 터득한 세월의 유쾌함을 세상에 가르치려는 모습이다.
예이츠의 「하얀 새들」에 대한 기존의 독법은 텍스트 내적인 영역에 국한되어 상징의 구조, 출처, 의미를 해석하는 데 치중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작품에 대해 전기적 읽기를 함으로써 예이츠와 모드 곤의 삶에서 이 작품이 지니는 극적인 의미를 도출하고자 한다. 예이츠의 첫 번째 청혼과 모드 곤의 거절이라는 사건은 이 시의 창작 계기가 된다. 이러한 텍스트 외적 맥락에서 「하얀 새들」은 예이츠와 모드 곤이 연인들로서 주고받은 독특하고도 미묘한 마음의 실제 활동과 교류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삶의 한 단편”으로 기능한다. 텍스트 내적 해석으로는 맛볼 수 없는 새로운 의미가 전기라는 더 넓은 맥락에 의해서 생성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 논문은 작품에 대한 전기적 읽기가 극적 읽기와 반드시 상충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아울러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