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atss A Vision helps the reader understand his poetic world. He sees the world as a process recurring at regular intervals. The consciousness of man is always placed in an opposite pair: the sun and the moon, man and woman, love and hatred, life and death, becoming a gyre penetrating and circling each other. A line and a plane are combined in a gyre. A line is the symbol of time and expresses a movement. It symbolizes the emotional subjective mind, the self. On the other hand, a plane, in combination with the moving line, making a space of three or more dimensions, is the symbol of all that is objective, nature, and intellect. The gyre combining both the line and the plane is always expanding and contracting. The archetypal form in a penetrating gyre reflects all lives, civilization, and the cycle of nature. All things move from right to left and then move in the opposite direction. We can apply this principle to the cone of civilization. “The Gyres” shows human history as a recurrent gyre, which is Yeats’s view of civilization. The Old Rocky face expresses both the anti-self of the poet and the prophet of civilization, gazing upon the world in front of him. Even though beauty is born with its value, it must be destroyed owing to its own contraction. When a brave hero falls down, the war must be defeated. Faced with the destruction of an old civilization, humans cannot but accept the tragedy with superhuman will. A prophetic voice, longing for wisdom during long penance, tells those who rejoice. Another poem “Meru” shows the wisdom of life realized through the rise and decline of civilization. Civilization is hooped together; however, it is characterized by various conflicting aspects. Though man believes he can eliminate the terror, civilization is doomed to break down again, as it must rise and fall as a process. Hermits come to know that the day brings round the night; even the brilliant civilization and art disappear in the dark of history. “Lapis Lazuli” is another excellent poem revealing Yeats’s insight into the Western and Eastern civilization. When this poem was written, the Italians had invaded Abyssinia, and the Germans had occupied the Rhineland. Yeats knew that war and devastation were now inevitable. Civilization reaching the highest point is to be ruined due to the conflicts among races and countries. And even the great works of art can’t endure the destructive war and abrasion of time. The future generations, however, will feel joy building up new things again. Through the history of civilization night brings the dawn, and a new life comes into being after the devastation.
본고는 예이츠의 미학을 바흐찐의 대화성 이론과 연결하여 그의 작품에 구현된 다중성의 참된 의미를 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예이츠의 미학이 낭만주의 미학과 연속성을 형성하지만, 최종단계에선 갈라서는 점을 바흐찐의 대화성과 단일언어성의 이론으로 분석한다. 주지하다시피 예이츠작품의 핵심은 정과 반의 양자를 인위적 통합하지 않고 같은 공간에 매듭지음으로 내재된 폭발력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이런 특징은 바흐찐이 제시한 단일 언어로서의 시가 갖는 한계를 넘어 서는 것이다. 즉 바흐찐은 서사나 비극 혹은 시 등이 속한 상류장르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보편적 진리를 구현하기 때문에 역사성과 역동성 혹은 미결의 과정을 담기엔 이미 낡아버린 단일성의 세계를 구축하며, 오직 소설장르만이 상류장르가 재현할 수 없는 것을 나타낼 수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그 자신이 말한 언어자체의 대화적 특성을 편협하게 적용한 오류에서 기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화성 이론은 예술과 사회의 긴장관계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틀을 제공하며, 예이츠가 수많은 작품을 통해 다성적 삶과 경험에의 충실을 추구한 것과 상통한다. 우리의 삶이 온갖 모순으로 점철되듯이 이에 충실하려면 완결된 청사진에 따라 모든 경험을 왜곡하여 주조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완성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예이츠가 살았던 아일랜드의 당시 상황은 분리 독립과 이에 따른 내란 등 극도의 혼란과 무질서의 난무로 특징져진다. 그의 작품이 긴장과 갈등으로 넘쳐 남은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의 중심에 위치한 그가 시대와 대화하며 고뇌한 흔적에 다름 아니며, 자아와 타자 상호의 대화성을 극도로 끌어 올려 양자의 정체성이 유지, 해체, 변화되는 과정을 담으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결국 예이츠는 각 개인이 갖는 특이성을 자유와 연결시키고 이 자유의 바탕에서 사회의 헤게모니적 담론이 구성하는 몰개성적 주체성과 분리만을 가져오는 인공적 통합에 도전하며, 서로 서로의 다양성이 억압되지 않고, 또한 다양성의 극단인 혼란의 함정에 빠져들지 않는 세계의 비전을 제시한다.
『에머의 유일한 질투』에서의 쿠쿨레인은 예이츠의 다른 극에서 보여주는 두려움 없는 신화적 영웅이 아니다. 그는 자연계와 초자연계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으며 자신의 운명 또한 에머의 손에 달려있는 전적으로 수동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이러한 쿠쿨레인의 속수무책과 그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세 여인 및 브로크리우가 보여주는 욕망의 파노라마는 그의 영웅적 모습이 단순히 그들이 갖고있는 그의 경험적 종합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면이 있음을 암시한다. 즉 이들의 욕망을 고려해야만 경험적 종합으로 환원되지 않은 그의 영웅적 이미지를 이해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들 욕망사이의 갈등을 기억과 희망의 변증법을 중심으로 고찰한다. 에머가 에이스니로 하여금 쿠쿨레인의 이름를 부르고 그에게 키스를 하도록 하는 제의적인 모습은 그의 영웅적 정체성과 이름과 욕망간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에머에게 주어진 잔인한 선택은 확정되지 않은 미래를 이미 확정된 것으로 가정함으로써, 에머는 미래의 희망을 희생한 것이 단순히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그녀의 욕망을 비밀스럽게 실현시킨다. 시디의 여인(the woman of sidhe)의 욕망은 쿠쿨레인과의 결합을 통해 자신의 영혼의 완전히 실현하려는 것이다. 쿠쿨레인이 비통한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 자신과의 결합에 머뭇거리는 것을 알고 그 기억을 자신과의 키스로 지우도록 유혹한다. 그런데 이 초자연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이 여인은 결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수 없는 운명에 놓여있는데 이는 모든 기억을 지운다는 그 세계조차 이미 언어와 기억으로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극에서 에머와 시디의 여인의 욕망이 좌절되는 것에 비해 브로크리우만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실현을 위해서는 자신과 철저히 동일시했던 쿠쿨레인의 모습을 포기해야하는 대가를 치루어야 가능하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욕망은 애매한 실현으로 그친다. 이렇게 욕망은 결코 실현되지 않으며 항상 대체되고 환치된다는 점은 이 극의 초두의 두 노래에서 이미 암시되어 있다. 이 노래는 여인의 미와 이를 묘사하는 비유사이의 긴장, 특히 지나간 비유에 대한 기억과 다가올 비유에 대한 기대 사이의 긴장을 잘 보여준다. 이 긴장은 욕망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기억과 희망의 변증법을 상징적으로 예시해 준다
이 논문은 Coleridge의 3편 supernatural poetry 중 “Kubla Khan”에 초점을 맞추었다. Yeats는 1920년대부터 Coleridge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Gibson의 최근의 저서, Yeats, Coleridge and the Romantic Sage (2000년)는 Coleridge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서이며, 앞으로 두 시인의 비교연구에 참고가 될만한 자료이다. 그런데도, 이 책을 정독하면, Yeats을 왜곡시킬 수 있는 많은 요소들이 발견된다. 본 논문은 Gibson의 이 책을 출발점으로 했으나, 두 시인의 비교 과정에서 상당한 입장의 차이를 보인다. 이 논문은 두 시인의 뛰어난 두 시, “Kubla Khan”과 “Coole Park and Ballylee, 1931”을 보다 많이 조명하면서, Yeats시의 본질에 보다 가까이 가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 중하나가 Rene Magritte식의 “Surrealism”적 접근이다. 즉, 이미지는 이미지로 읽으라는 것이다.
예이츠는 후기 시에서 다가오는 죽음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 생을 찬미하는데, 주로 성(性) 에너지의 재 긍정을 통해서 제시한다. 그는 자신의 육체적 쇠퇴를 극복하기 위해 종교에서보다는 삶의 극단적 표현인 성에서 위안을 찾으려고 한다. 이러한 시도는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대한 프로이트적 방어기제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예이츠 시에 나타나는 이러한 방어기제를 A Full Moon In March, “His Memories,” “His Vision In the Wood,” “Crazy Jane Grown Old Looks At the Dancer” 등을 통해 살펴본다. A Full Moon In March에서는 어머니 이미지의 Queen과 아들 이미지의 Swineherd사이의 외디푸스적 갈등에 분석의 초점을 둔다. 특히 반동 형성, 투사, 퇴행 등의 방어기제를 중심으로 Queen과 Swinherd사이의 에로틱하고 잔인한 관계의 흐름을 쫓아간다. “His Memories”에서는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떨치기 위해 나이든 화자가 신화적 인물인 헬렌이 과거에 자신과 난폭한 사랑을 나누었음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모습을 다룬다. “Her Vision in the Wood”에서는 나이든 여인이 자기 팔뚝을 손톱으로 피를 내어 보게되는 마조히즘적 환상을 통해 자신의 늙음을 극복하려는 모습을 분석한다. “Crazy Jane Grown Old Looks At the Dancer”는 환상을 통해 마조히즘적-사디즘적인 춤을 추는 젊은 여인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육체의 쇠퇴를 극복하려는 늙은 제인의 모습을 다룬다.
폴드만의 “Among School Children” 읽기는, 언어의 근본적 비유성, 즉 말해진 것과 다른 것(들)을 의미하는 속성에 근거한 그의 해체론 전개에 중요한 예이다. 이 시에 관한 그의 논의의 초점은 마지막 시행 “How can we know the dancer from the dance?”가, 전통적 해석들에서와는 달리, 수사의문문이 아니라 문법적 의문문으로 읽힐 수 있으며, 이 때 이 시행은 예술적 형식과 내용 사이 그리고 더 나아가 기호와 지시체(또는 의미) 사이의 숨겨진 차이성을 드러낸다는 데 있다. 드만에게 있어서 이 차이성은 언어의 자의성과 언어 기호의 비고착성에 직결되며, 이들은 다시 의미의 불확정성을 넘어 읽기의 불가능성으로까지 이어진다. 의미의 불확정성은, 다시 말하면, 주어진 표현에 적용될 문맥을 결정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퍼스에 따르면, 의미작용(signification)이 무한한 기호과정에 속해있긴 하지만, 해석의 공동체(community)라는 의미작용 외부의 원리에 의해 의미작용에 제한을 가할 수 있다. 에코는 이 원리로부터 비록 어떤 해석을 배타적으로 또는 우선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그 해석이 부적절하다는(illegitimate) 것은 문맥을 통해 결정할 수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이때 문맥이란, 한 텍스트내의 특정한 표현이 문제가 될 때, 그 표현을 들러 싼 텍스트 자체, 더 정확히 말해서, 그 텍스트의 요소들 사이에서 최소한으로 요구되는 일종의 일관성이라 할 수 있으며 이 텍스트의 일관성은 해석의 최소 조건이 된다. 드만의 “Among School Children” 읽기는 이 조건에 비추어 부적절함이 드러난다. 결국, 해석의 최소 조건에 의해 의미의 불확정성은 읽기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텍스트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의 다양한 읽기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예이츠, 엘리오트, 조이스등 모더니즘 문학작품 속에서 독자는 서구문명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모더니즘 문학은 르네상스 이후 4세기를 주도하면서 이루어낸 영국적 실용가치관이 주도한 현대문명을 비판한다. 가까이는 영국빅토리아 시대의 극단적인 형태의 정치, 경제, 도덕, 문화에 대한 공격인 것이다. 즉, 정치에 있어서는 제국주의, 경제에 있어서는 자본주의, 도덕과 문화에 있어서는 속물주의, 종교에 있어서는 기독교에 대한 반성과 해부를 그 특징으로 한다. 무엇보다 예술이 도덕, 정치, 종교의 시녀의 역할에서 벗어나 예술자체로 독립할 것을 주장한다. 따라서 예술은 그 실용성보다는 미 자체로 다시 태어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예이츠의 부르주아 문명에 대한 비판은 그의 영적이고 시골적인 것을 찬미하는 기질과 그의 18세기 앵글로 아이리쉬 문화에 대한 애착 그리고 순진하고 신선한 원시성을 지닌 아일랜드 풍물에 대한 매튜 아놀드 같은 이의 찬미에 힘입어 주로 실용적 가치관으로 무장한 아일랜드 중산 계급의 심미적인 결핍을 공격하는 양상을 띤다. 한편, “재림”이라는 시에서는 서구문명의 해체까지를 예언하며, 또 한편으로 “비잔틴으로의 항해”에서는 예술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세계를 그려낸다. 그의 문명비판의 특징을 좀 더 확실히 규명하기 위해, 서구 문명을 소유와 지배로 규정한 아도르노와 비교해 본 결과, 예이츠가 부르주아의 소유욕을 비판할 지라도 아도르노처럼, 서구 문명에 내재된 착취, 지배라는 사회학적 억압기재를 찾아내지 못했다. 돈과 실용적 가치관으로 무장한 자본주의에 심취한 부르주아는 죽음을 미적으로 승화시킬 능력이 없고 성적에너지를 자연스럽게 구가할 수 없었으므로 그의 공격 대상이 되었을 뿐이었다. 다시 말하면 예이츠는 아도르노처럼, 문명을 지배와 억압이라는 사회학적인 차원으로 비판하기보다는 시적 가치와 미적인 삶을 충실히 구가할 수 없게 하는 파괴자로 인식한 것이다. 그런데 예이츠가 지배의 구조를 서구 문명 안에서 찾아내지 못한 것과 달리 그는 예술로만 지배되는 이상적 국가를 제시한 점은 그 역시 부르주아로서의 지배 욕구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예이츠는 문명의 속성인 지배를 향유한 계급으로서 지배와 착취의 현장을 외면했으며 피지배자들을 동정하기보다 그들의 미적인 결핍을 지적했다. 특히 그가 예술로만 지배되는 파시즘적인 미학을 가진 것에서 그의 부르주아로서의 지배이데올로기는 살아있다고 말 할 수밖에 없다. 예이츠와 대다수 아일랜드인의 공동 목표는 아일랜드적 문화를 만들려는 데서는 공통점을 보일지라도 정치와 경제적 독립을 이루는 면에 있어, 서로의 감각은 매우 큰 차이를 드러냈다고 평가된다. 그 당시 대다수의 아일랜드인들이 예이츠의 문학을 “노예의 깨어진 거울”로 평가 절하시킨 것이라든지 아일랜드 내에서 예이츠 미학에 대해 별로 호응이 없었던 것도 예이츠가 자신의 시에서 착취당하는 자와 착취의 현장을 외면한 것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즉, 정치와 경제, 사회계급에 민감했던 아일랜드 중산계층은 예이츠의 예술 지상국 창조를 하나의 환상으로 보았을 가능성과 자신들에 대한 예이츠의 공격을 새롭게 도전하는 노예에 대한 상전의 방어로 보았을 가능성을 열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