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가 ‘민족대업의 기초’, 즉 민족의 독립을 준비하기 위해 가장 정력적으로 추진한 것은 민족운동의 인재양성을 위한 興士團이었다. 이것은 그가 “우리 민족이 완전히 부흥하여 생존번영을 누리고 나아가 서 전체 인류사회의 공존공영에 공헌을 짓는 대 사명을 달성하는 유일한 길은 오직 흥사단의 주장”이라고 한데서도 알 수 있다. 그는 “흥사 단이 한발짝 한발짝씩 실력을 양성 강화하는 것은 한발짝 한발짝씩 조 선독립에 접근하는 것이고 최후에는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여 흥사단을 조직하고 그 운동을 계속한 것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8도 대표들이 참석하여 창단된 흥사단은 務實․力行․忠義․勇敢의 정신으로 덕성을 함양하고 신체를 단련하여 기력을 튼튼하게 하며 각자 전문지식 또는 과학기술을 습득하고 건전한 인격을 기른다는 실천방안을 제시했다. 창립 이후 흥사단은 단우의 모집에 주력하면서 실업을 장려하는 정책에 따라 북미실업회사와 흥업회사 등을 세우기도 했다. 안창호는 3․1운동 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할 때에도 상해지 역을 중심으로 중국본토는 물론 남북만주와 일본 및 연해주 지역까지를 포괄하는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조직했다. 흥사단 조직 확대운동은 1920년 9월에 상해에 원동위원부가 조직된 것을 시작으로 북경과 남경, 만주 등지에서 펼치려던 이상촌 건설운동과도 표리를 이루면서 1932년 4월 상해에서 일경에 체포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수양)동우회는 원동위원부의 흥사단 국내지부였다. 물론 일 제의 직접 통치하에서의 흥사단운동이었기 때문에 될수록 인격수양 단 체임을 표방하고 합법적인 활동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는데, 안창호는 이러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수양)동우회에 대하여 국내의 동지 들을 통해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간접적으로 지도하였다. 본고에 서는 (수양)동우회의 조직과 노선에 대한 안창호의 노선을 그가 체포 되는 1932년 이전까지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