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panese People’s Perception of Samyeongyujeong (四溟惟政)
본 논문은 ‘四溟惟政(1544~1610)에 대한 일본의 인식’을 주제로 하였다.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사명당과 교유한 일본인’을 조사하는 것이고 둘째는 ‘사명당에 관한 일본의 현존자료’를 찾아내는 것이다. 먼저 사명당은 임진정유재란 시기와 探賊使로서 일본에 갔을 때 많은 일본인들과 교유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서는 가토키 요마사(加藤淸正), 닛신화상(日眞和尙), 하야시 라잔(林羅山) 등이 있다. 또 닛신(日眞)과 엔지(圓耳) 등에게 준 글이 지금도 일본에 현존하고 있다. 나아가 유명한 주자학자인 하야시 라잔(林羅山)과는 『論語』, 『周易』 등을 인용하면서 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명당에 대한 일본인의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인데, 가토 키요마사와닛신은 불교신자로서 사명당과 깊은 유대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근대의 유명한 역사가인 토쿠토미 이이치로(德富猪一郞)는 사명당을 ‘지혜와 용기를 지닌 위인’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한편 사명당에 관한 일본의 현존자료는 많지 않다. 특히 사명당과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회담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그 이유를 타카이 마사유끼(貴井正之)교수는 ‘일본에 불리한 회담이었기 때문에 기록을 없애버렸을 것이다’고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사명당이 교토에 체재한 3개월 동안 교류한 인물들의 가내(家內)문서 등을 조사하면 새로운 기록이 발견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This study examines Japanese people’s perception of Samyeongyujeong (四溟惟政; 1544~1610). It is done in mainly two aspects. One is to survey ’Japanese who associated with Samyeongdang’, and the other is to find ’historical records on Samyeongdang in Japan’. First, Samyeoungdang met and associated with many Japanese people during the periods of the Japanese Invasion in 1592 and the Second Invasion in 1597, and when he went to Japan as Tamjeoksa (探賊使). Some of the Japanese people he associated with included Gato Kiyomasa (加藤淸正), Nissin Hwasang (日眞和尙), and Hayashi Rajan (林羅山). Writings that Samyeongdang gave to Nissin (日眞) and Enji (圓耳) are currently in Japan. Materials show that Samyeongdang quoted the Analects of Confucius (論語) and the Book of Change (周易) in his conversations with a notable neo-Confucianist Hayashi Rajan.
Japanese people’s perception of Samyeongdang is mostly favorable, and it seems Gato Kiyomasa and Nissin, as Buddhists, felt a close sense of fellowship with Samyeongdang. Tokutomi Iichiro (德富猪一郞), a wellknown modern historian, acclaimed Samyeongdang as ’a great man of wisdom and courage’. Meanwhile, there remains little historical records on Samyeongdang in Japan. It is particularly regrettable that his conversations with Tokugawa Ieyasu (德川家康) were not kept. Professor Takai Masayuki (貴井正之) presumed that ’the records were erased because they were disadvantageous to Japan’. However, if family archives of people who associated with Samyeongdang during his three-month stay in Kyoto can be examined, new records might be fou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