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에서 神山은 불로장생하는 신선이 용ㆍ봉황 등 상서로운 동물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곳, 별천지ㆍ낙원ㆍ이상향, 혼탁하고 각박한 현실을 벗어나 도달하고 싶은 곳으로 여겼다. 바다 멀리에도 신산이 있다고 여겼으며 이를 본고에서 편의상 ‘海中神山’이라고 命名하였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해중신산은 세 개의 섬으로 구성되었다고 여긴 ‘三神山’이다. 옛 先人들은 이 해중신산ㆍ삼신산을 찾아보려 하였으며 노래나 문학 그리고 닮은 모습(造形 작업) 등으로 표현하였다.
해중신산(삼신산 포함) 圖像은 본 연구에 소개한 조선시대 후기인 18 세기에 만든 도자기의 그림에서처럼 다양하다. 그 중심은 섬(산)이고, 物象으로 동물(새ㆍ사슴ㆍ거북이ㆍ어류(물고기ㆍ게ㆍ새우 등), 식물(연꽃 ㆍ소나무ㆍ대나무ㆍ不老草), 태양(대개 산의 위쪽), 바다의 표현인 물결, 구름, 배(운송 수단), 집(누각 포함), 인물(신선) 등이 있다.
그 典型的인 모습은 부여 외리 출토 산수문전(도3)~(도5)ㆍ부여 능산리 출토 백제금동대향로(도1)와 符節처럼 연결되는 (도12)이다. 즉 바다 물결 위에 경사가 급한 바위 절벽이 둘러있는 산과 그 산을 배경으로 동물(날짐승ㆍ길짐승)ㆍ식물(소나무ㆍ불로초 등) 등의 물상을 표현하였다.
이외에도 산을 원경으로 배치하고 그곳으로 갈 배를 부르거나 도착한 모습, 산을 근경으로 배치하고 물상을 더 자세하게 나타낸 경우, 산은 생략한 채 뭍 또는 물 속의 물상 중심으로 나타낸 경우도 있다. 물상은 여러 종류인 경우가 많지만 때로는 몇 종류로 그친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 해중신산(삼신산 포함) 도상은 조선시대 도자기 이외의 역사 문화유산에도 다양하다. 이 도상의 원류는 우리나라 신석기ㆍ청동기시대로 소급된다. 그리고 삼국시대에 이르면 공주 무령왕릉 출토 은제 탁잔(도2)(도2-1)ㆍ부여 외리 출토 산수문전(도3)~(도5)ㆍ부여 능산리 출토 백제금동대향로(도1) 등에서 보듯 매우 精緻한 단계에 있었다. 이 도도한 흐름은 (도12)에서 보듯 조선시대 후기인 19세기까지도 큰 변동 없이 전개되었다.
조선시대 도자기 그림 가운데 해중신산 圖像이 있다는 본 연구의 결론은 우리나라 도자사ㆍ회화사 연구에서 첫 주장이다. 이 논문을 계기로 고려ㆍ조선시대 도자기의 그림을 고유의 믿음ㆍ사상ㆍ종교의 전통과 토대에서 탄생한 역사문화유산으로 바라보았으면 한다. 뚜렷한 근거도 없이 산수화(경기도 광주 司饔院 分院 일대의 漢江과 주변 풍경, 중국의 소상팔경을 그린 그림)ㆍ정물화로 보거나 또는 불교ㆍ중국 중심으로 해석하고 또는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단하는 기존 학계의 잘못도 시정 되었으면 한다.
Since the reform and opening up, the modernization of Chinese society has greatly liberated and released the productive forces, and broadened the ideological and cultural horizons. Under the guidance of the concepts of "Chinese characteristics", " view of global history" and " the awareness of a community of shared future for mankind ", Chinese society has gradually entered a prosperous and well-off era from the era of scarcity. with c
At the same time, contemporary China also typically shows many "faces" of consumerist aesthetic cultureharacteristic of utopia , such as "Wu", "Xin", "Mei" and "Le". The pursuit and imagination of "Wu-topia", "Xin-topia", "Mei-topia" and "Le-topia" are constantly transformed into confusing ideology in the era of Consumerism under the mechanism of capital, technology, market, media and advertisement which makes Utopia lose its ideal feelings, revolutionary spirit and critical nature. As a result,utopia is becoming dystopia. Heading for the future,it would be significant for us to understand deeply the aesthetic cultural phenomena in the development-transition period of China ,transform creatively the excellent traditional Chinese cultural thoughts, absorb foreign civilization ideas, and reconstruct the new social aesthetic culture finally.
본 연구의 목적은 노인 스스로가 관리 운영하는 여가복지시설 경로당의 기능을 조사 ․ 분석하여, 지역노인들이 건강한 노년을 보낼 수 있도록 기여하고자 하는데 있다. 경로당은 2017년 12월 기준 서울시 전역에 3,369개소, 1개동에는 7.8개꼴로 있으며, 전국에는 약 68,000개소가 있어 접근성이 가장 뛰어난 노인의 여가복지시설이다. 뿐만 아니라 전통미풍양속과 문화의 전달자 역할을 수행하며 훌륭한 노인복지전달체계로서의 사회간접자본이라 말할 수 있다. 본 연구는 2016. 4. 1~2016. 6. 30까지 서울시내 3,369개 경로당 회장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유효샘플 3,100개를 분석하였다. 자료 분석은 SPSS/WIN 21.0프로그램을 이용하였다. 본 연구결과에서 서울 경로당별 등록 회원수는 21~50명 미만이 70.7%로 가장 많았고, 51~100명 미만도 14.7%에 달했다. 경로당의 주요 기능인 중식 관련 도우미 지원금은 20만원 이하가 46.2%로 열악함을 보여주었다. 프로그램 만족도는 매우 만족이 67%로 높았으며, 치매예방과 검진, 건강걷기, 힐링도시농업 등이 70% 안팎의 높은 만족을 나타냈다. 경로당 연면적 규모는 30평 미만이 64.7%로 비좁아 프로그램 진행에 한계로 작용하고 있는것으로 드러났다. 경로당 시설기준 보완과 맞춤형 프로그램 제공, 회장?총무의 리더십 등이 활성화의 주요 요인으로 나타났다. 경로당 기능 개선을 통하여 효율적인 운영역량을 확보하고 경로당의 질관리 및 강화에 보탬이 되고자 한다.
Based on the arrangement of the excavated bronzes at the tomb of Marquis of Haihun Liuhe of the Western Han dynasty in Nanchang Jiangxi, this paper first discusses the naming and function of the bronzes, which points out that the four liters is juan-basin, ten liters is pan-basin, twenty liters is pen-basin, the function of xing-warmer also be providing heat preservation of food, Zhong is dedicated to the large size of wine vessel. Secondly, from the period, the bronzes of Liu He’s tomb are divided into four groups, which are Zhou Dynasty bronzes, King of Changyi bronzes, the bronzes of Liu He who were deposed to the ruins of the Changyi and the bronzes of Marquis of Haihun, which belong to Liu Bo, Liu He, Li Jiaji and Nanchang. In addition, on the combination of Liu He’s tomb musical instruments, which are chime of 14 niu-bells, 10 yong-bells, and more than 10 pieces of iron stones, could be three sets on the three sets of musical instruments, which could be hung along three sides of the hall: the musical instruments assemblage match the rite for the rank of a marquis.
본 연구는 해결중심 부부미술치료가 중년기 부부의 결혼만족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연구대상은 결혼생활에 대한 불만을 호소하는 중년기 부부이다. 연구기간은 2017년 2월 25일부터 2017년 4월 28일까지 주 1회 총 10회기를 실시하였다. 측정도구는 결혼만족도 척도(Marital satisfaction Scale: MSS)와 K-HTP를 사용하였다. 자료 분석은 결혼만족도 척도에 대하여 사전, 사후검사와 추후 점수 간의 차이를 비교하고 그 변화를 분석하였다. K-HTP는 사전, 사후 검사결과를 비교 분석하고 변화에 대해 평가하였다. 연구결과는 첫째, 해결중심 부부미술치료가 중년기 부부의 결혼 만족도의 전반적 결혼생활 만족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 해결중심 부부 미술치료가 중년기 부부의 결혼만족도의 부부관계의 만족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K-HTP 사전 및 사후 검사 결과와 단계별 진행과정에서 나타난 변화들에서 부부관계와 결혼생활 만족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결과는 해결중심 부부미술치료가 중년기 부부의 결혼만족도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논문은 ‘四溟惟政(1544~1610)에 대한 일본의 인식’을 주제로 하였다.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사명당과 교유한 일본인’을 조사하는 것이고 둘째는 ‘사명당에 관한 일본의 현존자료’를 찾아내는 것이다. 먼저 사명당은 임진정유재란 시기와 探賊使로서 일본에 갔을 때 많은 일본인들과 교유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서는 가토키 요마사(加藤淸正), 닛신화상(日眞和尙), 하야시 라잔(林羅山) 등이 있다. 또 닛신(日眞)과 엔지(圓耳) 등에게 준 글이 지금도 일본에 현존하고 있다. 나아가 유명한 주자학자인 하야시 라잔(林羅山)과는 『論語』, 『周易』 등을 인용하면서 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명당에 대한 일본인의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인데, 가토 키요마사와닛신은 불교신자로서 사명당과 깊은 유대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근대의 유명한 역사가인 토쿠토미 이이치로(德富猪一郞)는 사명당을 ‘지혜와 용기를 지닌 위인’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한편 사명당에 관한 일본의 현존자료는 많지 않다. 특히 사명당과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회담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그 이유를 타카이 마사유끼(貴井正之)교수는 ‘일본에 불리한 회담이었기 때문에 기록을 없애버렸을 것이다’고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사명당이 교토에 체재한 3개월 동안 교류한 인물들의 가내(家內)문서 등을 조사하면 새로운 기록이 발견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본 연구는 비행청소년의 우울과 풍경구성기법(LMT) 반응특성의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LMT가 비행청소년의 우울을 측정하는 진단 도구로서 풍경구성기법의 유용성을 검증하는데 알아보고자 하였다. 연구의 대상은 G시에 소재한 00소년원 110명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연구도구는 우울척도와 풍경구성기법(LMT)을 사용하였다. 풍경구 성기법(LMT) 평가지표는 LMT 시행절차에 근거하여 구성과 채색이라는 관점에서 8개의 전체지표를 설정하고, 구성지표와 채색지표로 분류하여 살펴보았다. 풍경구성기법(LMT)지표와 우울과의 관계는 교차분석을 실시하였다.
분석결과, 본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구성지표에서 구성의 통합성은 전체적 통합의 조화와 4-6개 이하의 통합과 조화의 비율이 유사하게 나타났고, 공간사용은 90%이상 사용하는 비율이 높았으며, 형태의 사실성에서는 6요소 이하로 표현하는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 또한, 소묘선의 질은 보통과 불안정으로 표현하는 비율이 유사하게 나타났다. 채색지표에서 채색의 정도는 요소만 칠한 경우가 가장 많았으며, 채색의 적절성은 6개 이하의 요소를 적절하게 채색한 경우가 가장 많았다. 색의 수는 0∼9색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채색의 안정성은 보통이 높았다. 둘째, 우울수준에 따르는 비행 청소년의 풍경구성법(LMT) 반응특성은 우울 수준에 따라 유의미한 차이를 보였다. 구성지표 4개 중에서 통합성, 공간사용, 소묘선의 질에서, 채색지표 4개 중에서 채색의 적절성과 채색의 안정성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阮元이 자신의 고증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금석 탐구에도 온 힘을 기울여 작성한 논술이 그 유명한 「南北書派論」과 「北碑南帖論」이다. 그 논지는 한마디로 남첩의 고운 글씨를 버리고 북비의 굳센 글씨를 쓰자는 것이다.
완원이 남북서파론을 제기한 원인은 먼저 건륭 ․ 가경연간에 금석학이 흥기함에 따라 북비의 출토가 날로 증가했으며 이것들에 대한 인식도 또한 점차 그 문헌적 가치를 중시하는 것에서 그 예술적 가치를 긍정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고증학풍의 영향으로 乾嘉學派가 考據工夫를 제창한 데에 있다. 완원의 실천 강조는 고증학에서 진리를 추구하던 실사구시가 무실적 실천으로 향한 청대의 학풍의 변화를 반영한 것으로 한예를 포함한 북비에 대한 탐구를 통해 당시 첩학으로 인해 쇠약해진 당시 서단을 타파하고 서예의 새로운 방식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완원은 고금의 서예를 남과 북 두 파로 나누었을 뿐 아니라 두 파의 대표적인 서가들을 나열하였다. 그리고 상세하고 확실한 자료를 가지고 두 파 서풍의 통서와 성쇠를 묘사하였다. 그는 남파는 대부분 척독에 많이 썼기 때문에 전예의 유법이 쇠퇴했으며 북파는 비석과 편액에 많이 응용했기 때문에 비교적 많은 전예 ․ 팔분 ․ 초서 필법을 보존하고 있다고 보았다. 완원이 서예가 남북 두 파로 나눠진 사실을 제기한 목적은 당 ․ 송이래 성행한 첩학의 기풍을 바로잡는 데에 있었다. 그가 북비가 남첩보다 우수하다고 여긴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남북서파의 연원으로 보면, 그는 북파의 서는 비를 위주로 해서 고법을 간직할 수 있었고 곧바로 한대 예서에 근원한다고 보았다. 후세에 대한 영향으로 보면, 완원은 당인들의 글씨는 북파로부터 얻은 것이 많다고 보았다. 또 다른 이유는 남북 서법 풍격상의 고하의 구별이다. 완원은 북파의 글씨는 강건함을 장점으로 여겼으며 남파의 글씨는 자태가 아름답다고 여겼으므로 둘 사이의 고하는 자명하다고 여겼다.
완원의 남북서파론은 아무래도 극단적이며 서체 발전의 불균형 현상을 소홀히 했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 새로 발견된 금석 문자에 광분하고 있던 학자들이나 서가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리하여 그의 남북서파론은 만청시기 ‘重碑抑帖’의 풍조를 일으켰으며 현대의 몇몇 ‘二王’의 서예를 부정하는 견해까지도 완원의 이론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강유위(康有爲. 1858∼1927)는 청나라 때부터 중화민국 때까지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이며 뛰어난 서예가였으며 교육자이다. 그는 장서가(藏書家)였던 조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책을 접하여 경학을 배웠다. 19세에는 대학자인 주차기(朱次琦)의 문하에 들어가 육구연(陸九淵)과 왕수인(王守仁)의 사상에 심취하였다. 또한 서양의 자연과학과 사회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정치적 개혁에 많은 포부를 가졌다.
그는 전통적인 인습(因習), 주자학적 권위주의, 과거제도가 요구하는 것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광서제(光緖帝)에게 변법(變法)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상서(上書)를 7차례 올리며 ‘무술변법(戊戌變法)’의 주도자로 나섰으나 실패하자 해외로 16년 간 망명하였다.
그는 평생 유명한 저서를 다수 남겼으며, 일찍이 구양순을 배워 풍골경발(风骨勁拔)한 서예로서 이름을 날렸다. 훗날 육조비판(六朝碑版)을 두루 접한 뒤로 당인(唐人)을 버리고 북비(北碑)를 지향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글씨는 근엄한 법도(法度) 속에서도 변화와 창신을 발휘하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경지를 형성했다. 특히 그의 서론(書論)인 비학(碑学)을 이론적으로 종합 정리한 『광예주쌍즙(廣藝舟雙楫)』은 서예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그의 서예와 서학이론은 근⦁현대 서예계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본고는 강유위 ‘서예실천’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그가 주장했던 서예이론과의 관계를 기술하였다. 그의 이념과 사상 간에는 내재적 연계와 함께 내재적 모순이 공존한다. 다시 말해서 본고는 강유위의 『광예주쌍즙』의 한계를 논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의 중⦁만기시기 서학이론의 변화 및 그의 서학이론과 실천의 모순에 대해서도 다뤘다. 아울러 그의 서예작품의 기법과 풍격 등을 바탕으로 그의 서예이론사상의 맥락을 귀납, 정리하여, 종합적인 평가를 하려고 노력하였다.
강유위는 운필에서 방원(方圆)의 겸용을 주장했고, 특히 그의 행서에는 북비의 의취가 녹아들어가고 필획과 골력이 강건하며, 필세가 기울고 험절(險絕)하여 웅강하고 아름다운 기운을 내포하고 있다. 결체에서는 방필(方筆)의 후중함을 통해 서예의 부족한 듯하며 두터운 형태를 드러냈다. 그리고 단정하고 너그러운듯하면서도 자연스럽고 꾸밈없는 모습을 잃지 않았다. 장법은 들쭉날쭉 엇갈린 멋이 생기고 흥겹고 방종하면서도 호탕한 기운이 흐른다. 이로써 그의 서예는 ‘이기위승(以氣為勝), 이력위미(以力為美)’의 독특한 풍격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의 만년서예는 대체로 비첩융합(碑帖融合)의 모습이 보인다. 특히 행초서의 용필에는 강한 개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의 행초서는 위비(魏碑)에서 비롯되어 전⦁예가 겸비하고, 장초(章草)와 첩학으로 흘러들어가는 등 다양한 서체가 뒤섞여 나타났다.
강유위는 많은 저술과 수많은 서예작품을 남겼다. 이러한 방대한 자료 에서 그의 서예작품과 서학이론을 분석하고 검토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에 본고의 미흡한 부분에 여러 선배와 독자들의 아낌없는 질정(叱正)을 희망한다.
“예술은 자연을 모방한 것”이라 한다면, 예술이란 자연적 ‧ 인문적 토대에서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술이 발전하려면 당시대의 문화와 밀접해야 한다. 경험 접촉도가 빈번해야 대상을 여실히 파악하고 반영하고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세계미술사와 문화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서예사도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그 시대의 유행하는 대상과 방식이 어떠한 것을 수준 높게 발전시키는 토대가 된다. 서예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한자는 이미 우리 실생활에서 멀어져 있고, 세로쓰기 방식 또한 매우 특수한 필기방식이 되었다. 또한 한자보다는 한글이 주류 서사대상이 되고, 사유의 대상이 됨으로써 한자의 조형에 대한 감수성이 매우 약화된 실정이다. 쓰기 방식도 세로쓰기보다는 가로쓰기에 익숙해져 있고, 기록하고 전달하기 위한 문자의 기능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의 몫이 되었다. 서예가 이러한 문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전통과 현대, 예술과 디자인, 실용과 예술이 만나 시너지 효과를 내고 새로운 형태의 서예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
현대서예와 캘리그라피는 전통서예와 차별화 된 글자구조를 새롭게 구성하는 일이다. 이 일은 매우 창의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다. 전통적 서예방식은 모델이 있었고, 그 기준으로부터 어떻게 수용하여 어떻게 변용하였는가 하는 일정한 방향이 정해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쉬웠다. 반면 현대서예와 캘리그라피는 방향도 방법도 수준도 목표도 없이 망망대해에 표류된 상태에서, 경험과 지식과 지혜와 직관을 방법삼아 방향을 잡고 영역을 확장하며 목표에 이르러야 하는 고행일 수 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말이 있다. 서예 역시 시대에 따라 그 풍격이 변해왔다. 그런데도 변화의 시기마다 자신이 ‘정통(正統)’이라 여기고 변화를 ‘이단’이라 주장하며 거부한 부류가 있었다. 하지만 거부한 것은 소멸되고 거부당하던 것이 주류를 이루며 새 전통(傳統)으로 남았다. 서예사를 회고해보면 한나라 때 초서의 유행을 비난하였고(非草書), 왕희지 글씨의 연미함을 폄훼하였고(古質而今姸), 안진경의 글씨를 추서(醜書)라 비난하였으며, 축윤명과 문징명 등의 글씨를 문둥이 같다고 욕을 하였다. 이렇듯 서예의 역사도 순탄치 않았다. 비난을 받으며 문자 쓰기가 예술로 인식되기 시작한 이래로 왕희지에서 안진경으로, 소동파로, 등석여로 이어지면서 서예사의 뼈대를 형성해왔다. 한글의 역사도 순탄치만은 않았으며, 한글서예의 역사도 시대와 그 시대 주류계층의 수요에 따라 유행을 바꿔왔다. 오늘날의 한글서예 역시 실용과 예술사이, 고전주의와 대중화 사이에서 사뭇 긴장관계가 형성된 듯하다.
문화는 대개 주류계층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형성된다. 서예 역시 각 시대마다 주류 계층의 유행을 타고 이어져온 유행서풍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디지털 대중시대의 서예문화 또한 다시 한 번 새로운 패러다임에 직면해 있다. 이 시대의 주류 계층인 대중들이 공감할 수 있는 담론과 이데올로기를 생성하고, 그와 동시에 이 시대에 맞는 서예양식을 구축해 나가는 일에 촉각을 세워야 할 것이다.
예술과 경영이 만날 때 예술경영이라는 효과를 탄생시킨다. 한국의 다양한 예술 분야 가운데서 K-pop은 한류의 바람을 전 세계에 불러 일으켰고, 그 가운데서도 방탄소년단(이하 BTS)의 아이돌 그룹은 한국 K-pop 역사에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이것은 한류 콘텐츠의 대단한 성공 사례를 보여준 것이다. 따라서 본고는 BTS를 중심으로 한 성공사례를 연구한 것이다. BTS의 북미와 유럽 투어에서 전체 79만석이 공연 전에 일찌감치 매진되었고, 음반 발매나 유튜브 조회 수도 음반 발표 24시간 내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판매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열기는 동남아시아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고, 향후 이들의 전망도 밝아 세계적인 인기는 당분간 밝아 보인다.
이처럼 단 기간에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BTS의 성공 비결은 무엇인가? 이 점에 대해 BTS의 성공 배경에 대한 경영적 ‘기술’ 혹은 전략이 무엇인지를 다각적으로 분석해 보았다. 우선 국내외 언론들과 전문가들의 반응을 분석해 보았고, BTS 멤버와 이 그룹을 이끌고 있는 방시혁 기획사 대표의 리더십을 분석해 보았다. 국내외 언론과 전문가들의 공통된 반응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성공 사례의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첫째, BTS의 팬덤인 ‘아미’의 활약이다. 둘째, ‘아미’를 열광하게 한 BTS의 실력과 성실함이다. 셋째, BTS의 솔직한 개방성이다. 넷째, 솔직한 개방성을 통해 팬들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다섯째, 유튜브와 SNS의 적극적인 활용이다. 여섯째, BTS는 노래 속에 Hip-Hop이나 EDM, Rock, Pop 등 다양한 장르를 하나의 노래로 융합했다. 일곱째, Love Yourself 라는 노래를 통해서 동시대의 고민 속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담았다. 이 모든 것 가운데 무엇보다 BTS의 음악성이 가장 중요한 성공 원인이 되었으며, 동시에 이들의 개별적인 가치를 발굴하여 7인의 그룹으로 탄생시킨 방시혁 대표의 안목과 지도력이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방시혁은 멤버들에게 자율성과 책임성을 동시에 부여해 주고 있다. 이로써 BTS는 K-pop의 미래를 이끌어 가고 있고, 외국인들이 한국어 가사를 외우면서 한글과 한국문화를 익혀가는 한류역할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예술적 가치가 경영 전략과 만나면서 BTS는 예술경영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되고 있다.
서예는 문자를 매개로 하여 자신의 성정을 나타내는 특수한 예술이다.
따라서 서예는 문자를 떠날 수 없고, 이를 서사하는 것과 내용 전달이라는 두 가지 효능을 갖추고 있다. 내용 전달에서 서예를 주제로 삼아 시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을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시는 절제된 언어, 서예는 문자를 빌려 사상과 정감을 나타낸다. 논서시는 시와 서예의 발생과 형성과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지금까지 작가의 이름이 기록된 최초의 서론은 최원의 『초서세』이고, 이는 『시경』과 같은 사언시로 썼기 때문에 논서시의 원류로 삼을 수 있다. 시는 한나라의 賦, 위ㆍ진나라의 行, 당나라의 근체시에 이르러 비로소 완전한 체제가 완비 되었다. 논서시의 발생과 형성과정은 이와 맥락을 같이 하였다. 즉 한나라 최원의 『초서세』는 논서시의 발생과 원류, 위ㆍ진나라 조식의 「장가행」은 형성과정의 대표작품, 당나라 논서시는 체제의 완성이라 하겠다.
최원의 『초서세』는 사언시의 형식을 빌려 서예의 기원과 초서의 발생 ㆍ법도ㆍ효능ㆍ심미ㆍ감상 등을 언급한 최초의 논서시이기 때문에 이를 논서시의 발생과 원류로 삼기에 충분하다. 조식의 「장가행」은 당시 유행하였던 行의 시 형식으로 문자의 생성과 서사 재료를 논하였다. 논서시의 체제가 완비된 당나라에서는 서체ㆍ서예가ㆍ서예작품에 대한 것 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에 대한 연구는 비록 논서시의 발생과 형성과 정이지만, 이를 근원으로 폭 넓게 확대하여서. 연구한다면 문인서예와 나아가 새로운 서예 창작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본 논문은 부뉴엘이 이미지와 상상력을 극단적으로 활용하여 그려낸 <안달루시아의 개>와 <황금시대>에 나타난 회화적 이미지의 저항적 의미를 탐구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이는 초현실주의의 환각을 통해 드러난 시선이 어떻게 영화 속에서 왜곡된 이질적인 이미지들로 나타나는가를 밝혀 내는 것이다. 그의 반이성주의 및 반부르주아적 태도는 영화 속에서 각종 억압 체제를 비판하는 힘과 욕망으로 나타난다. 이렇듯, 그의 영화는 초현실주의의 영향, 자신의 신념, 그리고 풍부한 상상력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초현실주의의 기법인 카다브르 엑스키(cadavre exquis)가 영화에 접목된 이중인화의 장면들은 기존의 질서를 전복하는 기능을 한다. <안달루시아의 개>와 <황금시대>는 꿈과 몽상에 기초한 환각의 서사로 이루어진 초현실적인 영화이다. 부뉴엘의 초현실주의적 미학 원리는 작가의 고유한 시선, 사회제도에 대한 강한 저항의 시선, 그리고 종교적 우상 숭배에 저항하는 신성 모독적인 종교적 시선에서 잘 나타난다. 이 세 가지 시선은 초현실성을 바탕으로 기존의 억압체제를 비판하는 저항의 수단이다. 그의 두 작품은 사회와 종교의 억압성을 비판하고 초현실적 시선으로 자신이 욕망하는 세계를 몽환적으로 그려낸 일련의 저항적 회화이다.
검여 유희강은 광복 이후 한국 서단에서 많은 영향력이 있었던 서예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가학과 신학문 교육기관 및 중국 유학 등을 통해 서예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또한 소탈하고 겸허한 인품으로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였고, 서예뿐만 아니라 예술 전반에 걸쳐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교유하며 학문 세계를 추구하였다. 그는 한학자ㆍ서지학자ㆍ시인ㆍ소설가ㆍ미술평론가ㆍ화가ㆍ전각가ㆍ미술애호가 등 넓은 인맥을 통해 학문ㆍ문화ㆍ예술 등에 대한 자외공부를 넓혀나갔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서예는 단순한 서사 기능을 넘어서 ‘문자향ㆍ서권기’를 갖추는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이러한 검여의 교유에 대해 서예ㆍ한학ㆍ문학ㆍ 회화 등으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검여의 사숙에 대해서는 첩학서예와 비학서예를 나누어 분석하였다. 그는 첩학서예를 연마하면서 비학서예를 더욱 추구하였다. 그의 작품을 보면, 유용ㆍ황정견ㆍ소식ㆍ조지겸ㆍ등석여ㆍ강유위ㆍ포세신ㆍ김정희 등을 흠모하고 사숙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들의 글씨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추구하였고, 이를 통해 자신의 개성 있는 서예 풍격을 형성해 나갈 수 있었다.
교유와 사숙이 검여 서예에 미쳤던 영향을 정리하면, 비첩병용ㆍ법고 창신ㆍ금석기ㆍ혼박웅일ㆍ필법입화ㆍ자외공부ㆍ불굴쇄신 등이다. 검여는 한국 서단에 북위서풍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고, 금석기를 추구하여 김정희의 맥을 이어 나갔으며, 좌수서의 불굴쇄신 정신으로 후학들의 사표가 되는 서예가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