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양 사상과 결합된 십이지 문화는 선인들의 우주관, 생사관을 담 고 있으며 풍수지리에서 궁합, 토정비결에 이르기까지 우리일상에 깊 이 스며들어있다. 게다가 우리는 태어난 해에 따라서 띠가 정해지니 동물과 사람을 가깝게 생각했다. 십이지는 시간이나 방위를 상징하는 데 우주의 운행원리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실체를 나타낸 것으로 인간의 생년월일이 운명을 좌우한다고 여기기도 했다. 십이지에 등장 하는 열두 동물은 단순히 감상이나 장식용으로 그리기도 했지만 각 동물이 특별한 상징을 담고 있다. 본고에서는 십이지를 중심으로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동물화 를 살펴보고, 사신도, 해치 등 상상 속 동물 그림을 알아보고자 한다. 특히 우리 옛 그림에 등장하는 동물화는 실제 하는 동물뿐 아니라 신화나 전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동물들도 있어서 상상력을 중시하 는 현대회화가 추구하는 바와 일치하여 앞으로의 연구가치가 높다. 동물화를 통해 살생보다는 그림으로 대신한 <호피도>나 개의 오륜 (五倫)까지 생각하는 선인들이 생명을 대했던 마음을 공감할 수 있었 으며, ‘자연합일사상(自然合一思想)’과 천지 만물과 내가 하나라는 ‘만물재동사상(萬物齋同思想)’을 바탕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옛 그림에는 있지만 멸종한 호랑이처럼 토종동물들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여겼던 까치가 유해동물로 간주 되는 현대사회의 생명경시 현상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고고학에 보이는 중국 초기 각화부호(刻畫符號) 자료는 지속적으로 발견되어 어느 정도 그 중요성을 표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고학, 역 사학, 문자학, 예술사학, 기호학, 민속학 등 여러 학문분야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선행연구에서도 서로 다른 각도에서 다양한 연구가 진 행되었다. 다만 현재까지도 이러한 각화부호(刻畫符號)의 명칭문제를 전문적으로 언급한 논문은 보이지 않는다. 본고에서는 선행연구의 연 구성과에 기초하여 관련자료들을 전면적으로 수집하고 서로 다른 분 류표준에 의거하여 분류정리를 진행하였다. 분류과정에서 먼저, 현재 학계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는 ‘각획부호(刻劃符號)’와 ‘각화부호(刻畫 符號)’의 경계가 불분명함을 발견하게 되었다. 실제로 ‘각획(刻劃)’과 ‘각화(刻畫)’는 본질상 구별이 있다. 전자는 칼과 같은 공구로 새긴 형태만을 표시하고, 후자는 새긴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회화라는 의미 도 그 안에 내재되어 있어 지칭하는 범위가 비교적 광범위하다. 따라 서 ‘각화부호(刻畫符號)’라는 명칭이 더욱 포괄적이고 정확하기 때문 에 이를 사용하기를 건의한다. 둘째, 부호(符號)의 구성원리에서 출발 하여 부호의 점(點), 선(線), 면(面)에 대한 결구분석을 진행하였다. 또한 중국 초기 각화부호(刻畫符號)에 대해 부호(符號)의 창제(創制) 특징에 의거해 명칭을 확정하자는 의견을 제기하고, ‘기하형부호(幾何 形符號)’와 ‘형성부호(象形符號)’와 같이 전면적으로 구분할 수 없는 각화부호의 문제에 대해서는 ‘선조류(線條類)’와 ‘형체류(形體類)’라는 총체적 구분방식을 도입하자는 관점을 제기하였다.
서예는 글씨의 예술이다. 부호나 문자를 통해 의사 전달을 우선하 던 고대로부터 점차 문자에 담겨진 내용을 중시하고, 그것을 보다 아 름답게 표현하는 데 가치를 두면서 예술로 발전해왔다. 예술로서의 서예는 서예본질을 이해하고, 참된 예술정신을 온양하 며, 자각적인 예술창작을 실천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러한 서예는 한 국서예사 가운데서도 특히 조선후기에 두드러진다. 조선후기의 서예문화는 古今에 대한 인식이 변환된다. 古의 가치를 절대적이고 맹목적으로 계승하지 않는다. 이러한 창신적 사고는 조선 후기 서예미학의 다양성을 열어가는 데 토대가 되었다. 조선후기의 서예미학은 기존의 심미규범과 창작을 고수하지 않고, 사고와 실천에서 변해야 한다는 의식이 팽배하였다. 서예본질에 대한 규명과 성찰 및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데 專心하였으며, 善變과 自得 에 주력하였다. 박지원이 ‘法古創新’을 논하고 이광사가 ‘活物’을 논한 것은 모두 그 시대의 ‘살아있는 서예’를 통해 ‘예술적 성취’를 추구하 려는 인식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고금을 막론하고 자신 의 생각과 철학이 내재되어 自得의 생동하는 서예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가 관건인 셈이다. 그 해답을 조선후기 서예미학에서 찾을 수 있다.
본 논문은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 제작 과정 및 결과물에 나타난 동물의 이미지를 통해 작가의 자연과 예술에 대한 사상의 단면을 살 펴보고자 한다. 뒤러가 남긴 수많은 작업들 –목판화, 동판화, 회화, 드 로잉 등 –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동물들은 작업의 시기와 종류에 따 라 다양한 역할을 보여준다. 작가의 변화하는 예술관을 나타내기도 하며 때로는 새로운 경험의 기록이 되기도 한다. 자연에 대한 철저한 관찰과 모사에서 출발하는 뒤러의 회화나 판화 는 그 제작 과정에서 수많은 드로잉을 남겼다. 특히 동물의 부분적 혹은 전체적인 모사는 단순한 스케치나 습작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주로 기독교적, 신화적 주제를 담고 있는 뒤러의 판화와 회화 속에서 새로운 상징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러한 동물의 이미지들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조합되거나 화면의 곳곳에 배치되어 작품의 의미를 더 욱 풍부하게 만든다. 한편, 특정 동물의 등장은 특히 관객을 향하는 시선 처리를 통해 화면 속의 내러티브와 관객을 연결하고 정서적 공 감을 유발하는 매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뒤러의 자연과 동물에 대한 접근 방식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대표 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태도와는 차이점을 보인다. 이탈리아 르네 상스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던 뒤러는 다빈치와 마찬가지로 자연 의 비례에 대해 천착하며 관찰에서 비롯된 상상력을 강조했지만, 그 의 자연에 대한 근본적인 관심사와 회화적 표현 방식은 달랐다. 다빈치가 동물들의 해부학적 구조, 움직임의 관찰을 통해 자연의 보이지 않는 원리와 패턴을 탐구하고자 했다면, 뒤러는 자연에 존재하는 개 체들의 표면적 특성의 이해와 세부적인 묘사에 주력했다. 뒤러의 “동물들 무리 속에 계신 동정녀(The Virgin among a Multitude of Animals)”와 “아담과 이브 (Adam and Eve),” 즉, 천상 과 인간의 타락을 각기 상징하는 두 작품 속에서 동물들을 통해 표현 된 자연에 대한 깊이 있는 관찰과 심볼리즘의 결합은 르네상스적 자 연주의와 고딕적 상상력을 조화시킨 뒤러 작품 세계의 핵심을 보여준 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은 한류를 문화콘텐츠로 이용해 왔다. 한국은 한국의 신화역사 로 또 다른 문화콘텐츠를 시도할 수 있다. 신화역사는 고대사 책에서 천왕 건국자의 역사이다. 한국은 고조선의 계승자이다. 북한은 고조선 의 계승으로 수도 평양에 단군릉을 개각하였다. 남한은 수도 서울에 고조선을 계승하는 문화가 없다. 남한도 수도 서울에 고조선을 계승 하는 문화상징물을 필요로 한다. 연구 방법은 한국의 신화역사를 자 기 준거의 해석 패러다임과 상호 의존 해석법으로 분석하여 한국고대 사 원형을 추구한다. 한국의 신화역사에는 고조선의 문화가 있다. 고 조선의 문화는 왕국 수도, 핵심 성산, 그리고 신선문화가 있다. 대한 민국에도 수도 서울, 백악산, 그리고 신선문화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구비한 곳이 있다. 수도 서울의 백악산, 백석동천이다. 수도 서울의 백악산 백석동천을 중심으로 한국의 신화역사를 대변하는 12신상 중 심의 상징물을 만들고 신선문화를 계승하는 축제를 만들 수 있다.
玉洞 李漵(1662-1723)는 평생 학문과 예술로 살다간 近畿南人 실학자였다. 그의 가문은 李繼孫에 이르러 문학으로 起家하였고, 증조 李尙毅 대를 거치면서 문벌가문으로 성장하였고, 영조 이후로는 이서 형제의 학인들을 중심으로 실학사상을 형성․발전시킨 유서 깊은 가문 이다. 먼저 이서 학문정신의 가학적 연원을 살펴보면, 증조 李尙毅는 中 正과 自得을, 조부 李志安은 『大學』과『中庸』을, 부친 李夏鎭은 敬의 수양태도, 博學의 추구, 聖經의 객관적 수용 등을 강조하였는데, 中正의 정신, 自得의 정신, 誠敬의 수양, 독서를 통한 다양한 분야의 관심은 이서 학예정신의 근간을 이루는 것들이다. 이서가 가르침을 받은 중형 李潛은 自得을 중시하였으나 『弘道遺稿』에 나타나 있는 이서의 학문은 철저한 성리학자의 면모이다. 이서 예술정신의 가학적 연원을 살펴보면, 증조는 道本文末적 사유를 견지하였으나 서예로 이 름이 있었고, 從祖 李志定은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초서의 대가로 그 의 시는 仙趣가 있다. 그의 서예는 從姪 李夏鎭과 從孫 李漵형제에게 가전되었다. 부친은 唐宋古文과 中唐의 詩를 지향하고, 서예는 鍾繇 와 王羲之를 추구하였다. 이서의 가학연원과 관련하여 선조들의 使行 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부친이 중국에서 가져온 다량의 장서 와 서화는 이서의 서예성취와 서학형성에 큰 바탕이 되었다. 요컨대 이서가문은 어려서부터 가학으로 六藝를 익히고 이를 기반으로 자신 들의 세계를 구축하였다. 대대로 수양과 실천을 중시한 생활태도, 독 서를 통한 박학적 학문태도, 詩書를 위주로 하는 예술관은 이들의 공 통된 경향이다. 이서는 이전까지 문학으로 성가하였던 집안을 경학으로 전환하고, 다양한 관심 분야와의 유기적 결합이나 새롭게 접하는 분야를 發明함 에 있어 절대적 가치기준으로 삼았다. 그의 이러한 학예정신은 분명 선대의 가르침인 자득정신과 성경사상의 실천적 측면이 어느 정도 작 용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지만, 자신이 새롭게 발명함으로써 가 학의 새로운 전통을 열었다고 하겠다.
본고는 서예작품에 보이는 단선(團扇) 형식의 원류에 대한 고찰을 통해 단선(團扇) 형식의 형성은 부채 본연의 변화과정과 두루마리 형 식의 서예작품이 서로 만나 형성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송(宋) 휘 종(徽宗) 조길(趙佶)의 <초서단선(草書團扇)>을 시작으로 단선(團 扇) 형식의 서예작품은 궁중 문화의 형태로 북송(北宋)시기에 출현하 게 되었다. 남송(南宋)시기에는 궁중에서 더욱 유행하게 되어 그림 중의 작은 경치[畫中小景], 문장 중의 작은 곡조[詞中小令]와 함께 남송 예술 중의 특색 있는 풍경을 구성함과 동시에 서화(書畫)작품이 동일한 형식 중에서 응용되는 것을 성공적으로 실현하였다. 단선(團 扇) 형식이 궁중 문화에 국한됨으로 인해 문인(文人)들의 호응이 결 여되었다. 이로 인해 원명(元明)시기의 서예작품에서 광범위하게 응 용되지 못하여 거의 500여년 동안 침묵하게 되었다. 서예작품의 형식 이 끊임없이 종합되는 과정에서 단산(團扇)의 옛 형식도 청(清) 중후 기에 서예작품에서 거듭 응용되기에 이르렀다. 그 형식도 더욱 풍부 해지고 접선(摺扇) 형식과 함께 부채 서예작품의 큰 줄기를 이루게 되었다. 원형을 주요 특징으로 하는 단선(團扇) 형식은 두루마리 서 예작품 중에서 특수한 지위를 차지한다. 초기 중국 문명이 천지(天 地)에 대한 이해를 함유하였을 뿐 만 아니라 불교문화 중에서 원융경 계(圓融境界)에 대한 추구를 융합하고 더욱 민속 중에서 “한데 모여 화목하다[團圓和美]”라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게 되었다.
서예는 문자의 조형미를 표현하는 예술이며, 문자의 뜻과 자형을 통하여 작가의 성정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문자를 표현하는 도구는 상당히 많다. 그러나 서예가 다른 예술과 구별되는 점은 사용하는 도 구가 부드럽고 탄력성이 풍부한 붓을 사용하는 데에 있다. 붓은 일반 적 필기도구와 다르고, 사용 방법도 다르기 때문에 단기간에 장악하 는 것은 쉽지 않다. 따라서 서예가의 예술미에 맞도록 붓을 적절하게 운용하는 방법이 바로 필법이다. 필법은 서예의 기본 규율이며, 장기 간에 걸쳐 발견한 서예가들의 공인된 규율이기도 하다. 필법은 서예의 삼요소인 필법ㆍ필세ㆍ필의 중에 하나이다. 필법과 필세는 서예의 방법론에 속하고, 필의는 서예가의 성정을 나타내는 방법에 속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필법은 글씨의 점과 획을 긋는 방 법이고, 필세는 점과 획, 글자와 글자, 행과 행 사이의 호응관계를 구 성하는 것이며, 필의는 서예가의 정취ㆍ기개ㆍ인품을 표현하는 것이 다. 본 연구에서는 서예의 기본 규율인 필법에 대한 가치를 연구하고, 학습 방법을 모색하는 데에 있다. 이를 위하여 필법의 형성과정, 필법 의 변천, 필법의 종류 등으로 나누어 분석한 다음 필법의 가치를 분 석하였다. 분석의 결과 필법의 가치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 다. 첫째, 규율장악이다. 필법은 결구에 속하는 점ㆍ필획ㆍ결자ㆍ장법 을 표현하고, 이를 운용하여 다양한 형태의 결구를 결정한다. 따라서 규율장악은 다양한 형태의 결구와 작가가 뜻하는 바를 정확하게 표현 하며, 동시에 객관성을 확보하는 데에 있다. 둘째, 변화모색이다. 이는 창작 이전에 의재필선을 통하여 충분히 의식적으로 구상하여야 하고, 이를 능숙한 필법의 규율장악을 통하여 표현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장기간 능숙한 필법의 규율장악을 통하여 무의식적 작용에서 나타나 는 의외의 효과를 꾀하는 데에 있다. 셋째, 학양표현이다. 학양이란 서예뿐만 아니라 서예 이외의 모든 방면에서 필요한 것이고, 이를 작 품에서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작품이 곧 학양표현이라고 하였다. 종합하면, 좋은 서예작품은 필법ㆍ필세ㆍ필의라는 삼요소를 갖추어야 하는데, 이를 다른 말로 풀이하면 규율장악ㆍ변화모색ㆍ학 양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필법의 기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필법의 가치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사실 서예는 먼저 필법 장악이 우선이고, 다음은 이것의 기초 위에 서 변화를 모색하여야 하며, 마지막으로 작가의 학양과 성정을 나타 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필법은 서예에서 가장 중요 한 관건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필법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 글은 비록 필법의 형성과 변천 과정 및 필법의 종류와 가치에 대한 초보적 이고 개략적 연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필법에 대한 연구는 서예 의 기초를 탄실하게 하는 관건이기 때문에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 다. 이를 바탕으로 삼아 변화를 모색하고 성정을 나타낼 수 있는 새 로운 서예 창작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면, 분명히 이 글은 현실적 가 치가 있을 것이다.
中國繪畫의 역사를 살펴보면, 山水畵가 등장하여 中國 繪畫史에서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된 이후에야 비로소 筆墨의 예술적 경지 그리고 창작동기와 이론 등 화가와 관련된 것들 역시 상당히 높은 수 준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宋代는 중국 산수화 역사상 황금기로, 유명 화가의 그림이 많을 뿐만 아니라 수준도 높아 고금의 일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형식과 기법은 중국 산수화 전통발전에 매우 특수한 공헌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北宋시기 范寬이 그린 <溪山行旅圖>는 중국 산수화의 최고봉일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이 중국 산수화를 이해할 때 반드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은 거의 전부 ‘한번 보고 나면 잊기 어려울(一見難忘)’ 정도이며, 많은 감상자들은 호기심을 갖 고 또 많은 감상자들이 감동을 받는다. 그렇다면 이 한 폭의 그림은 감상자들에게 왜 이렇게 감동과 호감을 주는 큰 힘이 존재하는 것일 까? 본고에서는 北宋 范寬의 <溪山行旅圖>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 그의 筆墨과 意境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연구 방법은 먼저 <계 산행려도>의 필묵을 構圖 ‧ 筆法으로 나누어 분석하고, 다음으로 예 술적 경지의 의경을 분석을 고찰하였다. 그 결과 필묵의 경지인 雨點 皴과 화면분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그림이 보는 감상자들에게 道 의 세계로 회귀해야 한다는 의경을 통해 잊혀 존재를 일깨운다는 점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