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문(연꽃문양)은 다른 역사문화유산(나전칠기, 회화, 금속 공예, 기와 등)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려·조선시대(임진왜란 이전) 도자기 문양에서 압도적인 비중이고 모습도 다양하다. 그 모습은 자연 생태계의 모습과 가깝고 닮은 경우(原연화문·蓮池연화문), 氣·化生을 적극 나타낸 경우로 구분된다. 이 시기 도자기에는 분명 연화문임에도 불구하고 연화당초문·모란문· 菊花文·寶相華文·如意頭文으로 잘못 불리는 문양들이 있다. 이 가운데 연화당초문은 연화문과 덩굴문이란 독립된 두 문양의 단순한 결합으로, 모란문은 연꽃잎과 연잎사귀 모습을 분리하여 꽃나무 모습이 되자 꽃봉오리가 비슷한 모란으로 착각하며, 국화문은 子房에 비하여 연꽃잎(연판)을 가늘고 길게 표현하자 비슷한 국화로 착각하며, 보상화문은 연꽃잎에 기· 화생이 많이 표현되어 다소 복잡한 모습이 되자 다른 꽃으로 여기며, 여의두문은 연꽃잎이 如意의 머리처럼 보여 각각 부여된 이름이다. 연화문은 한 도자기 안에서도 한 모습보다 여러 모습인 경우가 더 많고, 原연화문부터 연속 덩굴 연화문에 이르는 단계도 보여 준다. 또한 原연화문·蓮池연화문보다 기·화생을 더 나타낸 덩굴 연화문 쪽이 많다. 이 현상은 우리 先人들이 연화문의 다양한 모습은 물론 성격, 기·화생의 강약, 표현 위치 등을 철저하게 이해하며 표현하였음을 의미한다. 이 시기 도자기에 있는 기·화생을 담은 연화문들은 물론이고, 중앙에 서 외곽으로 또는 위쪽으로 상승하는 표현들, 나무처럼 표현한 연꽃, 산을 화생하는 연꽃 표현 등은 중국에서 또는, 불교와 함께 전래된 불교를 상징하거나 관련되는 표현이 전혀 아니다. 우리 겨레의 역사문화강역 안에서 신석기·청동기시대부터 믿음과 전통을 담아 치밀하고 높은 수준으로 전개된 표현이다.
한국 춤의 변천은 자연이 인간에게 미치는 두려움과 생존을 위한 삶 가운데에 행하여진 원시 예술 가운데 하나이다. 자연에서의 숭배의 관념과 정령의 힘인 주술적 행위가 오늘날 춤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굿’ 의 형태로 전해졌다. 현대는 다양한 공연예술이 선보이고 있고 독특한 형식으로 관객들과 만나고 있으며, 우리 고유의 전통연희로 발전되어 왔다. 이러한 다양한 연희는 극문학과의 결합으로 탈춤, 굿, 판소리 등 공연예술로 발전이 되었고, 우리 민족의 정신문화를 나타내는 가장 한국적인 연희로 전승되었다. 이러한 공연예술 가운데 대표적인 남사당놀이의 판굿인 상쇠놀이, 북놀이, 징놀이, 설장고놀이, 소고놀이 등은 현대의 문화 콘텐츠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징놀이는 지역적으로 국한되어 소수의 명인에 의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는 현실이며 더욱 징춤에 대한 관심은 매우 미약하고, 이를 대상으로 연구한 논문과 문헌 자료가 거의 없다. 남사당놀이 이수자인 필자는 징춤의 의미를 파악하고, 징춤에 내재한 사상과 예술성 고찰에 본고의 목적을 두었다. 징춤에는 철학적이고 미학적인 예술적 특성이 있으며, 강향란의 징춤에 내재한 예술적 가치는 한과 서러움, 외로움을 화려하지 않고 역동적이고 거친 느낌의 춤사위에서 흥과 신명으로 표출하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징춤이 전통문화의 소중한 자산으로서 올바르게 전승되고, 전통 보존의 맥을 이을 수 있는 관심을 고취하고자 징춤의 예술적 가치 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첫째, 공연예술에서 공연자와 관객과의 즉흥적 소통으로 상호 교감을 이룬다. 둘째, 징춤에서의 징의 울림은 형이상으로 철학적, 미학적인 예술적 치 유의 개념이 있다. 셋째, 상호작용에 의한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이해하고 배려함이 인격 형성의 교육적 가치가 있다.
‘歷史는 勝者의 論理’라고 흔히들 말한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의해 660년 7월 18일 멸망하면서, 百濟의 마지막 수도였던 ‘扶餘’는 불타고 한반도 역사의 전면에서 완전히 사라져 統一新羅時代와 高麗·朝鮮時 代에 걸쳐 ‘작은고을’로 겨우 命脈을 유지해 왔다. 1300여년이 지나 또 다른 침략세력인 ‘日本’에 의해 한반도가 植民支 配를 받는 기간에 아이러니하게도 ‘부여’가 일본 아스카 문화의 뿌리라는 것과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구축하려는 숨은 의도에 의하여 역사의 전면으로 재부상하게 된다. 1914년 전국 郡·面統合을 주도한 오하라신조(小原新三,1873.-1953.)는 조선에 오기 전 일본 나라현(奈良県)의 사무관으로 재직하면서 아스카·나라시대의 문화와 백제문화가 깊은 관계가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던 사람 으로, 작은마을이었던 부여군(10개면)을 주변의 3개군(석성군·임천군·홍산 군)을 흡수하여 부여군(16개면)으로 통폐합하여 부여군의 위상을 제고(提 高)하였다. 이어 1915년 충남도장관으로 재직하면서 경복궁에서 열린 공진회에서 ‘부여팔경 디오라마’를 제작하여 116만 여명의 관람객에게 부여를 홍보하는 기회를 갖기도 하였다. 한편, 1915년 ‘공주’와‘논산’에서‘부여’간, 정기 교통편이 개통되는 등 타 도시와 교류 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졌다. 1927년에 조선팔경 선정시 작은고을이었던 ‘부여’를 선정하는 등 다방면에서 ‘부여’의 位相提高노력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예부터 이름이 있던 곳들을 대상으로 부여의 23곳 관련 그림엽서들이 발행되었고, 그 중에서 발행 주체가 명기된 4곳은 부여고적 보존회(1915-1929), 재단법인 부여고적보존회 (1929.2.20.-1939.5.30.), 산구팔경당(山口八景堂), 다까바다게상점(高畠商店) 등이고, 발행 주체 표기가 되어 있지 않은 것들도 다수 살펴보았다.
IT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의사소통을 위해서 스마트폰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카카오톡이나 라인과 같은 모바일 메신저는 인간과 인간사이에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중요한 전달 수단이 되었다. 초창기의 모바일 메신저는 단순히 문자들 주고 받거나 사진을 주고 받는 수단에 불과했다면 최근에는 캐릭터를 이용한 이모티콘 사용으로 의사소통을 좀 더 편하고 빨리 접근하도록 하고 있다. 이렇게 이모티콘이 많은 인기를 끔에 따라 지자체에서도 메신저를 활용한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이모티콘을 활용한 마케팅을 활발하게 추진중에 있다. 또한, 지역캐릭터를 활용한 이모티콘을 무료 배포함에 따라 시민들에게 다양한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무분별한 이모티콘 개발은 지자체 예산만 소진할 뿐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일시적인 흥미만 유발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본 연구는 지역 관광산업의 활성화를 위하여 이모티콘 활용방 안을 제시하기 위하여 이모티콘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표현유형을 분석하고 성공적인 이모티콘 캐릭터 사례를 조사하여 이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 결과,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캐릭터를 개발할 시 부터 디지털 환경을 고려하여 디자인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 형태와 색이 단순화된 캐릭터가 그 효율성이 더 높을 것이다. 또한 지역예산은 낭비하면서 까지 유사한 유형의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 아닌 성공한 이모티콘과 콜라보레이션하여 지역 관광산업의 바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비즈니스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캐릭터의 중립성과 형태 및 색채의 단순성, 자유로움 움직임 반영하여 디자인 되어야 한다. 본 연구에서 제시된 결론 및 제언을 통해 내 외국인의 관광객의 증대와 연계되어 관광산업 활성화와 지역사회에 조금이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본 연구에서는 지난 2015년부터 동두천 원도심 활성화를 위해 진행되었던, 그라피티 조성사업 사례를 중심으로 문화예술을 매개로 한 도시재생사업 사례를 다루었다. 동두천의 그라피티 조성사업은 2015년부터 2018년까지 4년간 진행되었으며, 진행 단계에 따라 변화 양상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정책에 대해 실행단계에서 시도해볼 수 있는 다양한 접근방법의 차이로 볼 수 있는데, 마치 그라피티라고 하는 하나의 예술 경향이 낙서, 거리미술, 공공미술, 환경미술 등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는 것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도시재생을 위한 그라피티의 매개성 실험에서, 방법의 차이는 어떠한 결과의 차이를 만들 어내는가를 알아볼 수 있는 사례라고 판단이 된다. 환경적 측면에서는 동두천시가 보산동 외국인관광특구를 중심으로 펼치고 있는 ‘K-Rock 빌리지 조성사업’, ‘디자인아트 빌리지 조성사업’ 등 문화예술을 매개로 하는 다양한 전략사업을 종합적으로 살펴보았다. 이 사업들은 ‘캠프보산 (CAMP BOSAN)’이라는 통합브랜드 아래 문화예술을 매개로, 기존의 ‘외국인관광특구’를 ‘동두천문화특구’로 변화시키려고 시도하는 사업들로 최근에 개념이 정립되었다. 따라서 도시재생의 매개적 측면에서 문화예술의 접근방법을 분석해보고, 활성화 방안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조사 분석 결과에 대해서 첫째, 그라피티를 참여적 행위가 중시되는 도시재생의 공공미술 차원에서 다뤄야 한다는 점과 둘째, 도시재생에서 문화예술의 매개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사업의 지속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제언하였다.
본 연구는 투사적 그림분석을 통해 이중섭 미술작품의 의미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중섭은 한국의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일제강점기, 해방혼란기, 그리고 한국전쟁 등 비극적인 현대사에서 정치적 격동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외적 고통과 심리적 갈등을 겪으면서도 일관되게 따뜻한 가족애와 소망을 담고 있는 소, 어린이, 물고기, 게 등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친근한 소재를 그렸다. 이중섭 작품의 특징은 갈등적 상황을 회피하려는 특성인 방어나 저항이 나타나지 않고 자신의 무의식적 소망, 욕구의 심리를 잘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중섭 미술작품의 의미 해석을 위한 연구방법은 투사적 그림분석을 사용하였고, 작가의 심리적 역동이 잘 반영된 인물화를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작품의 선정은 유일하게 그려진 자화상과 많은 작품이 남겨진 아동화 중 공통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을 선별하여 분석하였다. 연구를 통해 이중섭 미술작품에 나타난 의미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보상적 애착욕구. 둘째, 퇴행. 셋째, 승화이다. 미술감상은 미적체험, 의미발견, 전이 및 자기이해 등 치료적 요인을 갖고 있으며 심리치료에 폭넓게 적용되고 있다. 이중섭 작품의 의미를 이해하고 심리치료의 관점에서 미술감상이나 미술심리치료 프로그램에 폭넓게 활용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서예와 캘리그라피는 동서양에서 20세기까지 문자를 대상으로 아름답게 꾸미고 이를 예술로 발전시킨 분야이지만, 현 시대에는 전통적인 캘리그래피 조차도 서양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이것은 전위주의나 후기 계급주의의 풍조가 문자예술을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변화된 문자예술 분야의 장르를 구분하자면 문자 예술분야에 대한 용어는 전통서예, 현대서예, 디자인서예로, 영문은 클래시컬 캘리그라피(서예), 모던서예(캘리그라피), 디자인서예(디자인 캘리그라피)로 구분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다양하게 확장될 수 있는 서예 분야를 새로운 시각을 갖는다면, 영화, 드라마, 무용, 공연, 회화등의 예술분야와 강연등의 인문학분야, 마케팅의 광고분야에서 이 시대의 트랜드를 반영하여 신선한 서예의 문화콘텐츠를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급변하는 문화전반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신진 작가들로 하여금 신문화조류와 함께 한국적 예술원형을 찾고 시대 정신을 발휘하여 창작활동을 펼쳐갈 수 있도록 전문가 양성을 위한 교육전반에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서예는 문자를 매개로 하여 자신의 성정을 나타내는 특수한 예술이다. 논서시는 내용 전달에서 서예를 주제로 삼아 시의 형식을 빌려 서예를 논한 것을 일컫는다. 이는 서예의 명칭․원류․도리․서예가․서예작 품․서예사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또한 운문 형식의 시로 표현 하였기 때문에 산문형식의 서예이론에 비해 상징적․추상적․은유적 성격이 강하면서도 완곡한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한국의 논서시는 신라 최치원이 효시를 이룬 뒤 고려 문인들이 한국과 중국의 서예와 관련된 내용들을 다각도로 작시(作詩)하였다. 조선시대의 서예개황은 고려말기 만권당을 통해 송설체가 유입된 이후 조선 초기 송설체의 대가 이용이 나왔고, 중기에 들어와 김구의 인수체(仁壽體)와 성수침의 청송체(聽松體)로 이어졌다가, 마침내 한호의 석봉체(石峯體)가 완성되었다. 조선시대의 논서시에서 초기를 대표하는 이용은 필법․자태․근골․정신이 뛰어났다. 그러나 송설체는 말류의 폐단을 나타내자, 성리학자들은 논서시를 통해 이를 걱정하며, 서예의 근본을 추구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중기에서 자주의식을 갖추고 조선 미감을 대표하는 한호에 대해 송설체를 벗어나, 왕희지를 추구하는 논서시들이 나타났다. 후기의 이광사는 논서시를 통해 왕희지체를 전범으로 삼은 바탕에서, 조선 서예의 토착화를 모색하였다. 말기를 대표하는 김정희의 공허한 성리학보다는, 실사구시의 금석고증학을 기반으로 한 북학을 학문과 예술로 승화시켰다. 이러한 조선시대 논서시의 특징은, 조선 서예사의 반영, 조선인의 예술적 정감을 표현, 시대마다의 서예 비평 등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서예를 논한 운문의 논서시는, 논리의 체계를 갖추고 의미를 전달한다는 면에서, 비록 형식의 서사시로 쓴 서론 보다는 미흡하지만, 표상적이며 최상인 문인서예에 더욱 걸맞은 것이라 하겠다. 연구를 폭 넓게 확대하여 논 서시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면, 문인서예발전에 이바지 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서예 창작에 많은 도움을 주어 서예에 건실한 표석이 될 것이다.
본고는 당나라 서예가 겸 서예이론가인 손과정이 직접 짓고 쓴 『서보 (書譜)』에 나타난 심미관을 살펴 그의 서예미학사상을 고찰하는데 있다. 손과정은 동진(東晉)시대 왕희지와 왕헌지의 필법을 얻은 서예가로 특 히 초서에 가장 뛰어났다. 더욱 그의 진적인 『서보』는 뛰어난 초서작 품인 동시에 내용에서도 박식하고 고상한 문장으로 서예이론뿐만 아니라 당시의 미학저작에서도 불후 걸작이라 칭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서예로 서의 예술 가치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론으로서도 매우 가치 있 는 명작이다. 『서보』는 서예의 원류를 비롯하여 각 서체에 대한 기능과 특징, 그 리고 서예를 배우는 태도와 수양을 논술하고 있다. 특히 글씨 쓰는 기본 기법과 서예의 창작 경험들을 총괄하고 있다. 그는 서예의 골기(骨氣)에 있어 ‘양강(陽剛)의 아름다움’과 ‘음유(陰柔)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의 (意)와 세(勢)의 통일을 말한다. 그리고 충화미(沖和美) 등으로 예술심미 를 논술하고 이들을 ‘도(道)’의 차원에 이입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손과정의 미학사상은 강하고 부드러움의 조화로 유가와 도가 의 서로 보완된 철리(哲理)가 내재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유가의 “강건 유위 자강불식(剛健有爲, 自强不息)”과 도가의 “청정무위(淸靜無爲)”가 그 의 사상 저변에 깔려 있다. 그래서 손과정의 사상은 그의 서예에 나타난 ‘강하고 부드러움(剛柔)’을 함께하는 심미이상과 부합함을 알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