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udy on the Efforts to Enhance the Status of Buyeo by Japanese in Japanese Colonial Period - Focused on postcards issued by Japanese Colonial Period -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한 부여위상의 제고노력에 대한 고찰 - 일제강점기 발행된 우편엽서를 중심으로-
‘歷史는 勝者의 論理’라고 흔히들 말한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의해 660년 7월 18일 멸망하면서, 百濟의 마지막 수도였던 ‘扶餘’는 불타고 한반도 역사의 전면에서 완전히 사라져 統一新羅時代와 高麗·朝鮮時 代에 걸쳐 ‘작은고을’로 겨우 命脈을 유지해 왔다. 1300여년이 지나 또 다른 침략세력인 ‘日本’에 의해 한반도가 植民支 配를 받는 기간에 아이러니하게도 ‘부여’가 일본 아스카 문화의 뿌리라는 것과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구축하려는 숨은 의도에 의하여 역사의 전면으로 재부상하게 된다. 1914년 전국 郡·面統合을 주도한 오하라신조(小原新三,1873.-1953.)는 조선에 오기 전 일본 나라현(奈良県)의 사무관으로 재직하면서 아스카·나라시대의 문화와 백제문화가 깊은 관계가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던 사람 으로, 작은마을이었던 부여군(10개면)을 주변의 3개군(석성군·임천군·홍산 군)을 흡수하여 부여군(16개면)으로 통폐합하여 부여군의 위상을 제고(提 高)하였다. 이어 1915년 충남도장관으로 재직하면서 경복궁에서 열린 공진회에서 ‘부여팔경 디오라마’를 제작하여 116만 여명의 관람객에게 부여를 홍보하는 기회를 갖기도 하였다. 한편, 1915년 ‘공주’와‘논산’에서‘부여’간, 정기 교통편이 개통되는 등 타 도시와 교류 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졌다. 1927년에 조선팔경 선정시 작은고을이었던 ‘부여’를 선정하는 등 다방면에서 ‘부여’의 位相提高노력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예부터 이름이 있던 곳들을 대상으로 부여의 23곳 관련 그림엽서들이 발행되었고, 그 중에서 발행 주체가 명기된 4곳은 부여고적 보존회(1915-1929), 재단법인 부여고적보존회 (1929.2.20.-1939.5.30.), 산구팔경당(山口八景堂), 다까바다게상점(高畠商店) 등이고, 발행 주체 표기가 되어 있지 않은 것들도 다수 살펴보았다.
‘History is a winner 's logic. Baekje dynasty was destroyed on July 18, 660 A.D. by the invasion of the Allied forces, and Baekje's last capital, Buyeo, completely disappeared from the front of the Korean peninsula history, has been maintaining the barely. Thirteen hundred years later, in the period when the Korean peninsula is being colonized by another invading force, Japan, it is ironic that the "Buyeo" is the root of Japanese Asuka culture and the hidden intention to establish the legitimacy of the colonial ship. And then re-emerges to the front of the Korean peninsula’s history. In 1914, the Ohara Shinjo (1873-1953), who served as secretary of Nara prefecture before coming to Korea, Buyeogun(10 myeon), which was a small village, was absorbed by the surrounding three guns (Seokseong, Imcheon, and Hongsan) and integrated into the Buyeogun (16 myeon ). In 1915, he served as Chungcheongnam-do Minister, and at the Gyeongbokgung Palace, he created 'Buyeo Palkyeong Diorama' and had the opportunity to promote Buyeo to 1,160,000 visitors. On the other hand, in 1915, a transfortation foundation was established for exchanges with other cities such as 'Kongju', 'Nonsan' and 'Buyeo', as a regular transportation bus routes. In 1927, when selecting a ‘Cho Seon-Palkyeong’, Buyeo was selected as a "Palkyeong", many efforts were made to improve the status of Buyeo. In the meantime, 23 postcards of Buyeo were published for the places where the name was well known from the past. Among them, 4 publisher’s name was known as ‘Buyeo historic spot preservation society’ (1915 - 1929), ‘Foundation Buyeo historic spot preservation society’(1929.2.20 - 1939.5.30.), ‘Yamaguchi Hakkeido’, TAKAWAEGAE shop (Takahata shop), etc., and a lot of things which do not know the publisher of publication issue were examin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