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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의해 660년 7 월 18일 멸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일본서기』에는 663 년 9월 7일 주유성(州柔城)이 함락되어 백제의 이름이 끊어졌 고 두 번 다시 선조들의 무덤에도 갈 수 없게 되었다는 한탄이 기록되어 있다.1)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그‘부여(扶餘)’땅에, 일본제국주의 식민정책의 영구화를 위한 내선일체의 영지를 표 방하는 ‘부여신궁’이 조영되었는데, 이 계획이 어떻게 시작되었 으며 어떠한 과정을 거쳐 계획되고, 공사 진척을 위해 전국적 으로 동원된 인원들과 그들의 봉사일정 등을 언론에 발표된 내 용을 중심으로 시간대별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사 라졌던 부여신궁 본전 설계도를 입수하여 살펴보고, 현재 입구 가 거의 막힌 채 남아 있는 지하 터널의 용도와 설계도에서의 위치를 추정하여 본다. 기억하기 싫은 뼈아픈 치욕의 역사도 정확히 기억하고, 이를 극복하는 노력이 없으면 되풀이하는 실수를 범할 수가 있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서라도 그때 당시를 적확히 찾아 기록하여 후대의 거울로 삼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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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9.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歷史는 勝者의 論理’라고 흔히들 말한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의해 660년 7월 18일 멸망하면서, 百濟의 마지막 수도였던 ‘扶餘’는 불타고 한반도 역사의 전면에서 완전히 사라져 統一新羅時代와 高麗·朝鮮時 代에 걸쳐 ‘작은고을’로 겨우 命脈을 유지해 왔다. 1300여년이 지나 또 다른 침략세력인 ‘日本’에 의해 한반도가 植民支 配를 받는 기간에 아이러니하게도 ‘부여’가 일본 아스카 문화의 뿌리라는 것과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구축하려는 숨은 의도에 의하여 역사의 전면으로 재부상하게 된다. 1914년 전국 郡·面統合을 주도한 오하라신조(小原新三,1873.-1953.)는 조선에 오기 전 일본 나라현(奈良県)의 사무관으로 재직하면서 아스카·나라시대의 문화와 백제문화가 깊은 관계가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던 사람 으로, 작은마을이었던 부여군(10개면)을 주변의 3개군(석성군·임천군·홍산 군)을 흡수하여 부여군(16개면)으로 통폐합하여 부여군의 위상을 제고(提 高)하였다. 이어 1915년 충남도장관으로 재직하면서 경복궁에서 열린 공진회에서 ‘부여팔경 디오라마’를 제작하여 116만 여명의 관람객에게 부여를 홍보하는 기회를 갖기도 하였다. 한편, 1915년 ‘공주’와‘논산’에서‘부여’간, 정기 교통편이 개통되는 등 타 도시와 교류 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졌다. 1927년에 조선팔경 선정시 작은고을이었던 ‘부여’를 선정하는 등 다방면에서 ‘부여’의 位相提高노력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예부터 이름이 있던 곳들을 대상으로 부여의 23곳 관련 그림엽서들이 발행되었고, 그 중에서 발행 주체가 명기된 4곳은 부여고적 보존회(1915-1929), 재단법인 부여고적보존회 (1929.2.20.-1939.5.30.), 산구팔경당(山口八景堂), 다까바다게상점(高畠商店) 등이고, 발행 주체 표기가 되어 있지 않은 것들도 다수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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