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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예술연구 KCI 등재 문화와예술연구 (문화예술연구) The Study of Culture &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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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 (2013년 8월)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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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해석이 난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명칭과 위치 및 성격 등을 둘러싸고 여러 이설이 존재하고 있다. 민간에서는 척주동해비를 재앙을 막는 부적(符籍)처럼 간주하기도 하고 혹자는 축문(祝文)으로 보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본고에서는 비문(碑文)에 기술된 여러 해외의 이국 풍속에 대해 하 나하나 고증을 하면서 아울러 동해송의 문체를 분석해서 그 내용을 검증하고 이를 토대로 척주동해비의 성격을 규명하였다. 결론적으로 허목은 동해바다를 신비화하거나 주술적인 기원을 하려 고 한 것이 아니다. 그는 ‘동해송’(東海頌)이란 제목에서 보는 바와 같 이 동해바다의 아름다움과 덕을 찬탄하고자 한 시문을 써서 비석으로 세운 것이 동해척주비이다. 이 동해송은 조선시대 학자들 사이에서 존 경감을 가지고 읽혀지고 연구되었던 명문장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에 더해 그의 독특한 서체(書體)와 이국적인 내용으로 인해서 척주동해비 가 재앙을 막아주는 신비한 힘을 가진 글로 신비화되었다고 본다. 허목(許穆, 1595∼1682)이 지은 척주동해비는 예로부터 난해하기로 유명해서 그 내용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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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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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의 삶과 <진감선사비>의 서예연구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최치원은 12세 어린 나이에 중국으로 유학을 가서 「討黃巢檄」문으 로 文名을 떨쳐 紫錦魚袋를 하사받고 唐書․藝文志에 수록될 정도 로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894년 귀국 후 時務策 10조를 올려 阿湌 까지 올라갔으나 국세가 기울자 898년에 스스로 불우함을 한탄하고 벼슬에 뜻을 두지 않기로 맹세하며 방랑의 길을 떠났다. 이를 통하여 그가 중국에서 닦은 학문과 재주를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속세에 묻힌 그의 비극적 삶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진감선사비>의 전액과 비문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창 적이고 자유분방한 서체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는 <진감선사비> 를 감상하는 시각이다. 종래에는 이것이 누구의 서체에 가깝고 누구 의 서풍과 닮았다고 하는 것이 감상의 주된 초점이었다. 그러나 전액 과 비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무엇과 닮았다는 것은 객관성 확보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그것과는 달리 천편일률적으로 판에 박히지 않고 활달하며 자유로운 필치를 나타내고 있다. <진감선사비>가 누구의 서 체와 흡사하다는 것은 시대적 제약이나 그는 결코 개성까지 말살하지 는 않았다. 만약 거꾸로 <진감선사비>를 당나라 서풍과 비교한다면, 아마 당시 유행하였던 모든 서풍이 여기에 융해되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진감선사비>는 당나라의 모든 서풍을 융해시켜 자신의 성정 을 나타낸 새로운 창작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글의 핵심이고, 앞으로 한국서단이 주체성을 가지고 중국서예를 어떻게 수 용할 것인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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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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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역사에 있어서 詩와 書의 관계는 매우 깊고 유구하다. 시는 그 사람이 가지는 當時의 가장 주요한 생각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 이고, 書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장치였 다. 어떤 일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보다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詩와 그것을 보다 아름다운 글씨로 표현하려는 書藝와의 관계는 漢字가 생긴 이래로 오래도록 이루어져 왔던 일상의 일이었다. 본고 에서는 이러한 논서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現傳하는 문헌 중 서예를 주제나 소재로 한 韻文인 詩 가운데 어 는 것을 논서시의 濫觴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그 고려대상 으로 삼은 것은, 武王(?~B․C 1043)의 「筆名」․「書硯」과 崔瑗 (77~142)의 「草書勢」와 曹植(192 ~232)의 「長歌行」 네 작품이다. 금번의 고찰은 여기에서 소개하는 하나하나의 시들이 가지는 의미 나 작가들이 가지고 있던 미학사상을 밝히기 보다는, 詩와 書와의 관 계가 그 작자 자신들의 詩속에 언제 어떻게 반영되고 있었는가를 살 피는 작업이었다. 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周 武王의 「筆名」과 「書硯」은 고인들의 서사 용구에 관한 관심을 잘 반영해 주고 있는 작품이다. 그것들은 내용상으로 후대의 논서시 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붓과 벼루를 읊은 최초의 시라는 점에 의의 가 있고, 특히 御定佩文齋詠物詩에는 「硯類」, 「筆類」라는 書畫에 관련된 편 속에 실려 있어서, 적어도 淸나라 康熙帝 때의 문인들은 이 시들을 문방사우를 소재로 한 시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 유의 해야 한다. 때문에 당연히 이 시들을 논서시 목록에 넣어 후대 논서 시들이 전개되는 단초로 삼아야 할 것이다. 崔瑗의 「草書勢」는 살펴본 바와 같이 押韻法이나 구성법 상 완벽한 漢賦에 해당된다. 운문의 한 갈래인 賦는 漢代의 주요한 문학적 표현 수단이었으므로, 이 또한 당연히 논서시 목록에 넣어야 할 것이 다. 東漢이후 5言과 7言詩가 많이 쓰이는 때와는 상황이 다르며, 더 군다나 후대에 지어진 산문에 가까운 文賦들과는 다른 문제인 것이 다. 이 작품은 내용 면에 있어서도 문자의 발생과 초서로의 변천 및 초서의 필법과 필세를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서 단의 상황과 작가의 미학사상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때문에 논서시 의 범위를 후대에 많이 지어진 5言과 7言의 시로 한정하지 않은 이상 당연히 논서시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 논서시 연구자들은 曹植의 「長歌行」을 본격적인 논서시의 출 발로 삼고 있다. 후대의 대부분의 논서시들의 형식인 5언과 7언과 같 은 형식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논서시의 범위를 여기까지 만으로 한 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東漢과 魏晉南北朝時代에 지어진 여러 賦들 도 운문이기 때문에 논서시 범위에 넣어 연구를 더욱 심화할 필요성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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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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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은 一氣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一氣는 생성․변화․발전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氣化는 생명의 세계이다. 이 생명의 세계는 모 두 一氣 속에서 流動한다. 특히, 書畵속의 一氣의 生動美는 생명정신 의 추구이자, 음악적 리듬으로 충만한 氣化의 세계이다. 서예가는 一 氣一筆로써 大千世界를 삼키기도 하고, 또한 토해내기도 한다. 서예작품 속에 나타난 墨氣는 生動美가 순환․왕복한 것으로, 점․ 획들은 서로 연계되어 있다. 특히, 서예는 氣脈을 중시하는데, 그 氣 脈은 예술의 魂이며, 활기찬 한 줄기 생명의 흐름이다. 서예가는 여 백 속에 숨어 있는 생명을 筆勢로서 形迹化한다. 이러한 氣化이론은 서예의 생명이론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서예는 이 영향을 받아서 단지 하나의 기술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生命化 과정을 표현 하는 것이다. 무한한 우주속의 一氣는 一筆書, 一筆畵로서 서예작품 속에 그대 로 표현하면서, 획과 획을 이어주는 生動性을 가진다. 서예의 生命은 一氣가 작품 속에 그대로 반영되면서, 그 표현방법은 一筆이고, 드러 난 자취는 바로 一線이 된다. 이처럼 書藝家가 표현한 筆線은 시각적 아름다움만이 아닌, 무한한 생명을 잉태한 ‘眞美’이다. 본 논문은 서예의 ‘一筆揮之’를 통하여, 氣의 세계가 生命化 과 정을 거치면서, 生動美로 轉化된다는 것을 고찰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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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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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明代 융경년간隆慶年間(1567~1572년)에 활동한 칠장인 황성黃 成(安徽 新安 平沙人)에 의해 저술된 휴식록은 휴식의 법칙과 이론 이 집대성된 칠예 이론서이다. 명 천계天啓 5년(1625년) 동항이었던 양명楊明(1621~1627 浙江 嘉興人)에 의해 주석되었으나 중국에서는 실전 되었다. 현재 우리에게 유전된 것은 일본 동경국립박물관 소장 본인 ‘겸가당본蒹葭堂本 휴식록(1736~1802) 필사본’으로 중국과 일 본에서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지속적으로 해설과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우리는 현재 칠예의 학문화가 절실한 시점인데도 불구하고 그 연구가 활발하지 못하다. 이 글은 이러한 휴식록에 대한 미진한 연구의 첫걸음으로 휴식 록의 연구 현황, 구성과 특징, 황성의 휴식관髹飾觀을 통해 칠예사 적인 의의와 중국공예미술사에서의 가치를 살펴보았다. 휴식록은 총 2집, 18장, 186조로 구성되어 이를 건집乾集과 곤집 坤集으로 나누어 건집은 설비․재료․공구 및 장인의 자세를 담고 있 고, 곤집은 칠기 분류와 제작기법 및 감식․보수․복제에 관하여 설명 하고 있다. 황성은 이를 통하여 휴식이론과 본인의 심미관을 제시하 고 휴식관을 정립하였다. 휴식록은 전문적인 칠예저작이라는 점과 실용미술의 중요한 요소 인 재료와 완성도에 대한 기준을 정하여, 칠예의 예술적 특징을 형성 하는데 적극적인 공헌을 하였다는 점에 칠예사적인 의의를 둘 수가 있다. 그리고 중국공예미술사에서 기술을 최고 가치를 둔 명대 실용 미술 부분에 ‘수공예의 이론화’라는 새로운 장을 여는 실마리라는 점 에서 중요한 이론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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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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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그 민족 고유의 정체성과 외래문화의 융․복합과정에서 새 로운 형태를 창출할 수 있다고 본다. 서예문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로 삼국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여러 서체와 서풍 을 받아들이며, 변화 발전하여 시대적으로 유행서풍이 각각 달랐다. 특히 근대라고 부를 수 있는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는 격변하는 시기 로, 정치․사상․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외부 세력의 강력한 개방 압력과 더불어 청(淸)․일(日)에 대한 감정이 대치 되는 상황에서 전통문화에 대한 기반의 위축을 초래하는 상황에서도 외래문화의 흡수와 수용은 또 다른 패러다임의 문화를 창출함과 동시 에 그 영역을 확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변화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당시 시대적 상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개화파들과 사신․역관․상인들이였으나 더 직접적인 통로 는 선진문화의 학습을 위해 유학을 떠났던 일부 의식 있는 서화가들 이였다. 이들은 중국과 일본으로 미술계의 견학 및 시찰, 그리고 전 문적인 서화교육을 위한 유학의 형태로 선진문화를 받아 들였으며, 그들이 체득한 서화계의 현장은 이들의 예술세계를 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라 귀국 후의 활동으로 인하여 국내의 서화 계에도 큰 영향을 미 쳤다. 따라서 본고는 이 시기의 해외유학서파의 현황과 현대서단에 미친 영향관계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중국에서의 유학 기간이 짧게는 3년, 길게는 18년을 보낸 유학서파 들은 청대의 고증학과 금석학, 그리고 전각의 인풍을 학습하여 귀국 한 후 이를 기반으로 작품 활동을 함과 동시에 체계적인 연구를 하며 현대서단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서예 학의 기초체계를 세우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으로의 망명과 유학을 통해서는 활발한 일본서단에 서 직접 익힌 서화 풍과 더불어 전각 풍을 수용하였고, 이를 통해 국내 서단의 기틀을 형성하였다. 이렇게 해외유학서파들에 의해 형성된 근대의 서풍(書風)과 화풍(畫風), 인풍(印風)은 현대 한국서단에서도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글씨에서는 민영익․김규진․유희강․현중화 등 에 의해 유입된 북위서와 오창석(吳昌碩) 전서, 하소기(何紹基)․유용 (劉墉) 등의 행서가 현대까지 유행하였으며, 그림에서는 김규진과 서 병오 등에 의해 오창석의 화풍, 중국 난초 그림의 유행이 있었고, 전 각에 있어서는 오세창․김태석․고봉주 등에 의해 청대 전각가인 오창 석․제백석(齊白石)․등석여(鄧石如)․오양지(吳讓之)․서삼경(徐三庚) 등의 인풍과 일본인풍이 주류를 이루며 한국전각계의 틀을 이루는 원 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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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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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선행연구의 연구 성과들을 토대로 본기물의 銘文에 대한 여 러 이견을 정리함과 동시에 새로운 각도에서 글자를 隷定하고 현대어 역과 역주를 진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새로운 의견을 도 출해 내었다. 먼저, 기물의 명칭은 그동안 < 比鼎>․<鬲攸从鼎>․<鬲攸比鼎> ․ <鍋攸从鼎>․ < 攸从鼎>․ < 攸从鼎>․< 攸從鼎>․ < 傱鼎>․ < 从鼎>․< 攸比鼎>․< 攸比鼎>․<攸比鼎> 등과 같이 다양하 게 불러졌는데, 본고에서는 자형분석을 통해 < 攸比鼎>으로 비정하 였다. 둘째, 기물의 연대에 대해 선행연구에서는 대체로 厲王․宣王․西周후 기로 분류하고 있는데, 기물의 기형과 문양, 명문의 내용과 서풍을 토 대로 < 攸比鼎>을 西周후기 厲王 32년에 제작된 기물로 추정하였다. 셋째, ‘ ’자의 해석에도 ‘鬲’․‘鍋’․‘ ’․‘ ’․‘ ’․‘ ’ 등으로 다양한 이견이 존재하였는데, 자형을 근거로 ‘ ’자로 예정하고, 商周시기 기 물과의 비교를 통해 이 글자가 ‘盉’의 初文임을 새롭게 증명해 내었다. 넷째, 比는 攸衛牧과의 소송에서 승소하고 이미 ‘攸’땅을 돌려받 았기 때문에 ‘ 攸比’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돌아 가신 할아버지 丁公과 아버지 惠公을 위한 존귀한 鼎을 만들게 되었 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섯째, 皇祖는 商代의 유풍과 같이 干支를 사용하여 ‘丁公’이라 하고, 皇考는 周代의 풍습을 따라 ‘惠公’이라고 호칭하였다. 어쩌면 比의 조상은 상나라 계통으로 서주 초․중기에는 殷遺民으로 상의 풍습을 계승해 오다가 아버지 때에 와서 주나라 방식으로 시호를 바 꾸어 완전히 서주에 동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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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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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性敎育에 대한 德目과 內容 體制는 시대의 요구와 가치 미래비 전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인성교육에 대한 요구와 내용을 현시점 과 미래 지향의 방향에서 재점검하고 시대에 적합한 방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교육체계도 8차 교육과정에서는 創意的 人性敎育이라는 융 합된 형태로 인성교육의 내용이 바뀌어 추진된다. 하지만 오늘의 인성 교육이 主知主義적 관점에서 실천적인 관점으로 기본취지가 변경되고, 실천 중심의 창의적 인성교육은 체계적으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이에 창의적 인성교육의 실천에 대한 고민이 광의적인 검토되고 확 장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창의적 인성교육의 프로그램 개발과 실천을 위한 제반 노력들도 요구되고 있다. 예술교육은 창의적 사고력을 기를 수 있는 장점과 인성을 함양할 수 있는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런 점에서 많은 예술관련 과목 들이 개설되었다. 하지만 書藝의 경우는 미술과목 자체속의 일부분인 현실이다. 서예가 교육현장에서 저 평가받고 있는 현실은 書藝 자체 와 서예를 둘러싸고 있는 제반 관계들에서 기인한다. 그간의 서예는 시대를 달리하면서 발전하고 변화하는 제반의 조건들과 무관하게 과 거의 시점들에 갇혀 지내온 것이 사실이다. 외연과 내용의 변화에도 둔감하게 반응하며, 修養論적 측면에서 인 성의 涵養이라는 구시대적 프레임으로 일관해온 측면이 강하다. 이러 한 상황에서 서예를 통한 창조성이나 인성의 함양을 제기 할 수 없 다. 따라서 독창성이나 유창성, 공동체성, 그리고 도덕적 판단력 등의 창의적 인성을 함양할 수 있는 지표들을 높일 수 있는 서예의 대안적 프로그램들의 개발은 더욱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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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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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은 경 사상을 근본으로 하여 居敬을 몸소 실천하려고 노력한 유학자였다. 그는 젊어서 유학을 공부하면서 처음으로 心經附註라 는 책을 구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책을 읽으면서 “너무 늦게 깨달아 이루기 어렵다.”고 한탄하기도 하였지만, 처음 학문하고 수양하는 일 에 感發하고 興起한 것은 이 책의 힘이었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송종 관 또한 이 책을 읽고 나서 서예가 마음의 그림이라는 의미를 확실히 깨닫게 되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서예가 마음의 그림이라고 하는 설은 일찍이 한나라 양웅이 제시하 였다. 이 설은 나아가 ‘마음이 발라야 글씨가 바르다.’․‘마음 법이 곧 서법이다.’․‘사람이 발라야 글씨가 바르다.’ 등으로 전개되어 서품이 곧 인품이라는 ‘書與其人’ 설로 발전하였다. 서여기인의 근본은 도덕성이다. 도덕성은 敬의 사상에서 비롯한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경은 공경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경의 이 의미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살펴보면 더욱 오묘한 이치가 담겨있다. 경은 곧 道의 이론적 근본이 되면서 도를 실천 하는 방법이기도 하 다. 이때의 경은 엄숙․경건․공경․경외․깨어있음․마음의 수렴 등 다 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 다양한 의미 가운데 程頤와 朱熹가 특별히 주목한 것은 ‘主一無適’의 의미였다. 주일무적은 글자 그대로 하나에 집중하여 흐트러짐이 없다는 뜻으로 일종의 정신집중을 의미 한다. 하지만 더 깊은 뜻은 인욕의 유혹에서 벗어나 천 리의 실천에 집중한다는 뜻이다. 서예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 서예공부는 서예의 이론적 근본을 바탕으로 기능적 실천이 따라야 하 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자는 서예의 근본정신을 경의 사상으로 보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자는 “내가 글씨를 쓸 때 매우 경한 마음으로 쓴다. 이것은 글자를 잘 쓰고자 해서가 아니라 다만 이것이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 정자의 ‘寫字時甚敬’은 곧 유가 도덕 서예의 근본사상 이 되었다. 이황 역시 이 의미를 모를 리 없었던 것이다. 이황은 이 ‘敬字之意’를 서예에서도 실천에 옮겨보려고 노력한 학자였다. 그래서 그의 서예를 ‘경의 서예’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8,4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