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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攸比鼎>의 특징과 명문의 새로운 해석 KCI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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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예술연구 (문화와예술연구 (문화예술연구))
초록

본고는 선행연구의 연구 성과들을 토대로 본기물의 銘文에 대한 여 러 이견을 정리함과 동시에 새로운 각도에서 글자를 隷定하고 현대어 역과 역주를 진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새로운 의견을 도 출해 내었다. 먼저, 기물의 명칭은 그동안 < 比鼎>․<鬲攸从鼎>․<鬲攸比鼎> ․ <鍋攸从鼎>․ < 攸从鼎>․ < 攸从鼎>․< 攸從鼎>․ < 傱鼎>․ < 从鼎>․< 攸比鼎>․< 攸比鼎>․<攸比鼎> 등과 같이 다양하 게 불러졌는데, 본고에서는 자형분석을 통해 < 攸比鼎>으로 비정하 였다. 둘째, 기물의 연대에 대해 선행연구에서는 대체로 厲王․宣王․西周후 기로 분류하고 있는데, 기물의 기형과 문양, 명문의 내용과 서풍을 토 대로 < 攸比鼎>을 西周후기 厲王 32년에 제작된 기물로 추정하였다. 셋째, ‘ ’자의 해석에도 ‘鬲’․‘鍋’․‘ ’․‘ ’․‘ ’․‘ ’ 등으로 다양한 이견이 존재하였는데, 자형을 근거로 ‘ ’자로 예정하고, 商周시기 기 물과의 비교를 통해 이 글자가 ‘盉’의 初文임을 새롭게 증명해 내었다. 넷째, 比는 攸衛牧과의 소송에서 승소하고 이미 ‘攸’땅을 돌려받 았기 때문에 ‘ 攸比’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돌아 가신 할아버지 丁公과 아버지 惠公을 위한 존귀한 鼎을 만들게 되었 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섯째, 皇祖는 商代의 유풍과 같이 干支를 사용하여 ‘丁公’이라 하고, 皇考는 周代의 풍습을 따라 ‘惠公’이라고 호칭하였다. 어쩌면 比의 조상은 상나라 계통으로 서주 초․중기에는 殷遺民으로 상의 풍습을 계승해 오다가 아버지 때에 와서 주나라 방식으로 시호를 바 꾸어 완전히 서주에 동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虽然不知道< 攸比鼎>的发现时间和地点,但可推测最迟到淸晚期 已经被发现,并被陆心源、端方等金石收藏家为收藏。此后在许多著 录上收录拓本和相关内容,铭文的具体考证是从杨树达先生最早开始 进行的。 有关本器物的名称是有< 比鼎>、<鬲攸从鼎>、<鬲攸比鼎>、 <鍋攸从鼎>、< 攸从鼎>、< 攸从鼎>、< 攸從鼎>、< 傱 鼎>、< 从鼎>、< 攸比鼎>、< 攸比鼎>、<攸比鼎>等。目前 学界对该器物的名称也还有不同的意见,所以本文通过对字形的具体分 析可确定为< 攸比鼎>。 有关本器物的年代,先辈学者将其大体归属于西周晚期的厉王、宣王 时期。本文将其器物的器形、纹饰和铭文的内容、书风来分析,< 攸 比鼎>的年代可推定为西周晚期厉王三十二年。 ‘ ’为作器者的族氏,而其也有‘鬲’、‘鍋’、‘ ’、‘ ’、‘ ’、‘ ’等多 样的解释。本文中对先辈学者们的论点一一进行了考证,以字形的结构 来分析,可以隶定为‘ ’,并且通过比较目前所出土的商周时期器物的 器形,可以证明其字形是‘盉’字的初文。两字用法略有不同,即‘ ’为象 形字,主要用于氏族的名称;‘盉’为形声字,主要用于器物的名称。 < 攸比鼎>的铭文皆为10行98字,其中‘虢旅’没有重文符号,只有 ‘子孙’两字中有重文符号,因此本铭文实际是10行100字。本文在前辈 学者们的研究成果的基础上,与有关‘ ’的< 比盨>(25年)和< 比簋盖>(32年)的铭文对比,将每一个字重新地隶定,再用韩文翻译,将其 中较难理解的字加了注释。铭文的主要内容是‘ 比’和‘攸卫牧’之间关于 攸地诉讼的事情。比向厉王告发攸卫牧,厉王让史南和虢叔旅来负责 这件事。比最终胜诉,收复‘攸’地,因而称为‘ 攸比’。不仅为了纪念 这一件事情,还为了祭奠皇祖丁公、皇考惠公,铸造了这一件尊鼎。 本铭文记录了西周晚期诸侯之间关于土地诉讼的情况,为研究西周时 期的法制、土地提供了参考资料。特别值得注意的是,皇祖以干支定为 ‘丁公’,用为商代遗风的谥法;皇考用周代的谥法来定名惠公。这些可 推测也许比的祖先是商系统,到西周时期变为殷遗民,皇祖时仍然继 承商遗俗,到皇考时才吸收周的风俗,那时才真正同化为周人了。

목차
Ⅰ. 머리말
Ⅱ. 기물의 특징과 에 대한 재인식
Ⅲ. 攸比鼎의 명문 해석과 역주
Ⅳ. 맺음말
저자
  • 박재복(경동대학교 교수) | 朴载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