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唐代) 신라인(新羅人) 김일성(金日晟)의 묘지(墓志)는 최근 중국 서안(西安) 응탑구(雁塔區) 삼교촌(三爻村)에서 출토되어 2010년에 대 당서시박물관(大唐西市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묘지 내용을 보면, 김 일성은 신라왕의 종형(從兄)으로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귀의하여 벼슬이 종삼품 광록경(光祿卿)에 이르고 대력(大歷) 9년(774)에 장안(長安)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그의 생애가 전설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신라인의 묘지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이 묘지는 당과 신라의 관 계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본고에서는 김일성 묘지와 관련된 제반 문제를 고찰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첫째, 전래문헌과 출토자료의 기록에서 신라왕실 자제 중에 ‘김일○ (金日○)’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당대 제왕이 하사한 이름이 자주 발견되는데, 여러 변방의 수장으로 당나라에 귀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김일성(金日晟)’은 ‘김일제(金日磾)’와 비슷하기 때문에 김일성은 당나라에 귀의한 후 개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묘지에 기록된 김일성의 생존연대를 추정해 보면, 김일성은 효 성왕(孝成王) 혹은 경덕왕(景德王)의 종형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혜공 왕(惠恭王)의 종형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배제할 수 없다. 신라 왕실의 자 제 중에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 학습하는 연령을 근거하면 김일성 은 성덕왕(聖德王)이 당나라로 조공을 보내어 숙위로 머물게 되었다. 개원(開元) 8년(730)에 성덕왕의 조카인 김지만(金志滿)이 당나라에 들어 와 숙위가 되어 오랫동안 당나라 조정에 있었는데, 그 행적이 김일성과 여러 방면에서 중복된다.
셋째, 김일성은 당나라에 들어와 은청광록대부(銀青光祿大夫)와 광록 경(光祿卿)을 제수 받았다. 현재 전래문헌의 기록에 당나라에 들어가 숙 위가 된 신라 왕실 자제에게 하사한 벼슬의 현황을 보면, 김일성이 제수 받은 광록시경(光祿寺卿)의 직책밖에 보이지 않는다. 구시(九寺)의 여러 경(卿)은 예악제향(禮樂祭享)과 민족외교(民族外交) 등의 업무를 담당하 였는데, 신라 왕실 자제들이 숙위관례(宿衛觀禮)에서 배운 것과 일치한다.
넷째, 김일성이 당나라에 들어간 후에 벼슬이 광록시경(光祿寺卿)에 이르렀고 장씨(張氏)와 혼인하였다. 오랫동안 장안(長安)에 거주하는 사 이에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발생하였는데, 그가 오랫동안 장안에 체류하 고 높은 관직에까지 승진한 것은 이 난과 깊은 관련이 있다. 김일성의 묘 지는 문장이 간략하고 크기도 비교적 작아 그 직책의 등급과 부합되지 않는데, 이는 장씨의 무덤을 이장하고 부부 합장묘지를 다시 썼기 때문이다.
다섯째, 김일성은 장안 영수(永壽)의 필원(畢原)에 장사 지냈는데, 영 수향(永壽鄉)의 처음 설치는 수대(隋代) 대흥현(大興縣)까지 거슬러 올 라갈 수 있다. 당나라에 들어와 영수향은 장안현에 관할되어 범위가 북 쪽으로 장안성 교외까지 이르고 동쪽은 천문가(天門街)를 경계로 하고 남쪽은 위곡(韋曲)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강촌(姜村) 일대까지 관할에 들어갔다.
사람의 필적(handwriting)은 필자의 내면 심리상태를 의식적으로 나 무의식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랜 시간 경험론적 방법으로 확인되고 있는 사실이다. 특히 서양에서는 르네상 스를 거치면서 심리학, 정신분석학 등 타 학문과의 연관을 통해 필적학 (graphology)이란 학문이 확립되어 왔다. 필적학은 필적을 통해 필자의 심리상태, 성격, 생활이나 인간관계에 대한 사전 정보획득 등을 통 해 직원채용이나 적절한 업무 배정, 범죄사건에서 심리정보 획득 등 다 양한 일상적 영역에 적용되어 활용되어 오고 있다.
본 논문은 영어를 중심으로 활용되고 있는 필적학의 개념을 차용하 여 한글에 도입함으로써 한글에서의 필적학 전개의 틀을 마련해 보고자 했다. 영어와 한글이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는 근거는 백지 용지에 좌에서 우로, 그리고 오른손에 의해 필기가 되었다면 한글 필적 도 영어 필적과 보편타당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 결과 한글 필적에서도 영어 필적 분석의 특징과 같이 여백의 특 징, 기준선의 개념 특징, 공간의 특징, 기울기의 특징, 글자 사이즈의 특 징 등이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필기 속도와 필압 특징도 나타나 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자음이 있는 한글은 특징에 따라 영 문 필적과는 다른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ㄱ”, “ㅜ”, “ㅣ” 이 특이하게 아래로 길게 내리는 필적이 관찰되기도 한다.
결국 한글 필적은 영문 필적의 특징 분류법과 비교할 때 다수의 동일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자음이 있는 한글의 특성에 따라 한글만의 상이한 특징도 가지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한글 필 적도 보편적 연역법, 심리학, 정신의학 등을 적용하고 실험적 방법을 통해 개인의 심리를 분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이런 분석적, 실험적 방법의 적용 등을 통해 필적학이란 학문의 틀을 확립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圓相은 동양문화에서 널리 사용되는 상징기호이다. 특히 불교의 禪宗 에서는 원상을 사용해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거나 제자를 지도하였다. 선에서 원상이 사용된 것은 인도문화의 영향과 도교의 영향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도교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되는데, 선사상 자체가 도교 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선에서 원상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중국 唐代의 南陽慧忠(?~775)인데, 특히 潙仰宗에서 많이 사용하 였다. 위앙종에서 원상을 사용하게 된 것은 自宗의 독자성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선에서 원상이 유행하게 되는 것은 宋代 이후인데, 송대 이후에 五家가 확립되어 자종의 독자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 때 臨濟宗의 三玄三要, 雲門宗의 三句 등과 더불어 위앙종에서는 원상을 사용하게 되었다. 특히 明代이후가 되면 선종에는 모두 96종 이상의 원상이 있었다고 한다.
원상은 여러 의미를 가지는데, 첫째 ‘세계 내지 우주 그 자체’를 상징 한다(全體性, 無限性). 둘째 ‘唯一者 내지 모든 만물의 시초’를 상징한다 (唯一性). 셋째 ‘가장 뛰어난 것’을 상징한다(最上性). 넷째 ‘궁극적 경지’ 를 상징한다(解脫, 깨달음). 선이나 書畵藝術에 나타난 원상의 의미는 이 네 가지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때로는 하나의 원상이 2, 3가 지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기도 한다. 하지만 圓敎는 ‘다른 가르침보다 뛰어난 최고의 가르침’이라는 의미로서 배타성을 지니므로, ‘원융성’이 라는 원상의 일반적 의미와는 반대된다. 이와 같이 선이나 서화예술에 나타난 개별적인 원상은 상황에 따라 달리 사용되므로, 그 의미도 상황 에 따라 구체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碑學 서예 이론의 출현과 碑派 서예 창작의 성행은 清代 서예 전향의 중요 상징이다. 阮元의 비학 이론을 선도로 清代 서예 창작 발전의 방향 을 제시하게 되었다.
새로운 이론 관념은 창작에서 충분히 증명되어 졌고, 창작 실기에서 특히 중요하다고 여겨졌기에 역사가 邓石如를 선택한 것은 우연한 기회 가 아닌 필연적 선택이었다.
본 논문은 "碑学"의 각도로 등석여 자신의 서예적 성취와 역사적 지위를 이해하고, 邓石如와 碑学 명가들의 교류가 碑派 서예 창작에 영향을 미쳤는지 등의 방면을 논술하고, 邓石如의 碑学 이론 해석이 가져온 의 의를 증명하며, 碑学 이론 해석의 각도에서 清代 邓石如의 서예사적 위 치를 제시하였다.
올가닉이라 하면 자연속의 생물들 즉, 덩쿨이나 나뭇잎 등 인공과 무 관한 식물들을 생각하게 된다. 올가닉은 생명이 있다는 것이 첫번째의 조건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무기재료로 만들어진 것까지도 포함하며 그 범위는 매우 넓어졌다. 곡선형의 디자인을 올가닉디자인의 형태로 말할 정도로 최근의 제품들은 올가닉의 이미지를 적용하여 부드럽고 사용성 도 높은 디자인으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을 볼 때 올가 닉의 영역은 매우 넓어졌고 수용자들은 거부감 없이 선호하게 되었다. 올가닉 디자인의 정의와 실제 적용되어 있는 사례들을 찾아보고 이들을 비교 연구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올가닉 형의 근원은 인체라는 것과 생 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 또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곡선적 이미 지가 적용된 디자인은 올가닉 조형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동차나 산업제품은 물론 시각디자인분야에서도 올가닉의 형 체가 적용된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생명력과 곡선, 그리고 유선형 의 디자인 결과물은 올가닉 형체임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이 자연으로의 회귀와 자연속에서 살아가려고 하는 마음들도 근본적으로 올가닉 형체 로 태어났고 또 자연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행태가 올가닉의 범위 안에 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본 연구를 통하여 올가닉에 대한 기본 개념과 그 이념을 디자인의 모든 분야에 적용하여 가장 친밀한 디자인의 결과물 들이 많이 생산되어 편안하고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계기가 되 기를 희망한다.
최근 농촌 인구의 감소 및 고령화현상, 도농소득격차의 심화로 농촌의 부정적 상황이 지속되고 있으며 농업부가가치 및 농가 소득이 정체되는 것을 타파하기 위해 농업 6차 산업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게 되었다. 농업 6차산업의 기대효과는 농업의 고부가가치화, 농가소득 증대, 농촌경 제 활성화를 위한 6차 산업화와 농촌산업화 전략이다. 이를 위해 체계적 인 방안을 모색하여 농산물 생산뿐만 아니라 가공, 제조, 체험, 관광, 숙박, 농가레스토랑, 판매 등 모든 분야가 융 ․ 복합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연구를 지속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고객의 요구가 다양해지고 시장이 세분화 되고 있는 상황에서 농산물도 품질, 기능, 가격 등의 차별화만으로는 더 이상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고, 다른 상품과 달리 소비자가 쉽게 구매결정을 하는 저관여 제품이므로, 더욱 더 포장 디자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상품판매를 위한 포장디자인은 농산물 소비량 증대와 농촌경제를 성장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전략 방안이 필요하다. 현재 농산물 포장디자인은 거의 유 사한 형태와 디자인으로 판매되고 있으며 이는 글로벌 경쟁 제품과 비교 했을때 경쟁력이 약하다고 할 수 있다. 국내 농산물 포장디자인과 해외 사례를 비교 분석함으로써 농촌산업의 활성화를 위한 농산물 포장디자 인의 전략을 제안하고자 한다.
서예는 함축적인 언어를 간결한 선으로 표현하는 매우 추상적인 시각 예술이다. 또한 知性과 感性을 겸비하고 미적인 ‘情’과 지적인 ‘理’가 상호 융합하여 표현된 心像의 예술로서 그 글씨를 보고 그 사람의 人性과 品格은 물론 도덕성까지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南田 元仲植 선생은 劍如 柳熙綱 선생의 高弟로 생전에 서예와 전각 작품을 비교적 많이 남겼다. 남전선생의 작품에 대해, 靑冥 任昌淳 선생은 “준마가 거침없이 들판을 내닫는 듯하다.”라 하였고, 如初 金膺顯 선 생은 “천성이 진중하여 溫故知新의 新을 창출해 내었다.”라 하였고, 嘉 軒 崔完秀 선생은 “韓中 서예를 관통하여 자기화하고 채색을 이용해 문자조형의 미를 예술로 승화시켰다.”라고 하였다.
현재 남전 선생의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 있어 그의 생애와 서법예술 을 구체적으로 논하는데 상당한 제약이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주요 전시작품을 토대로 남전 선생의 학서과정과 작품성향을 살펴보고, 그 작품 연대를 체계적으로 구분해 보았다.
남전 선생의 예술세계를 인생에 일대 전환이 되는 사건과 거주지 이전 을 주요시점으로 2기 5단계로 구분하였다. 먼저 1990년 5월 서예에 전 념하기 위해 직장을 사직하고 강원도 인제 미산에 은거하는 시점을 중심 으로 크게 전후 2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전기(學書期: 1941-1989)는 학창시절과 직장생활을 하던 시기로, 1971년에 제20회 국전 낙선전을 기준으로 修鍊期와 硏鑽期 2단계로 나 눌 수 있다. (1) 修鍊期(1941-1971)는 검여 선생에게 입문하여 서예를 도제식으로 사사받으며 안진경의 서풍을 충실히 임서하는 한편 검여선 생이 주로 공부하던 청대 서예가들과 추사의 글씨를 집중적으로 공부하 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硏鑽期(1972-1989)는 스승의 필법을 계 승하여 강인한 필치의 행서와 예서를 구사하는 한편 漢簡과 같이 새로 발견된 자료에 천착하여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려는 의지도 확인할 수 있다.
후기(成熟期: 1990-2013)는 산수가 수려한 강원도에 기거하며 서예에 전념하던 시기로, 속초와 고성 죽정리로 이주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隱匿 期, 完熟期, 超逸期 3단계로 세분할 수 있다. (1) 隱匿期(1990-1998)는 인제 미산에 거주하던 시기이다. 1995년을 전후로 그 서풍에 변화가 있 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1995년부터 매년 개최한 ‘시계서회전’과 몇 번의 중국답사와 연관이 있을 듯하다. 특히 이 시기에는 중국에서 새로 발견된 자료에 대해 끊임없는 연찬을 하여 자신의 작품에 활용하고 있음 을 확인할 수 있다. (2) 完熟期(1999-2004)는 속초에 거주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의 작품에서는 흰 화선지나 검은 먹보다는 각양각색의 다양한 색지와 석채를 활용하여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 다. (3) 超逸記(2005-2013)는 고성 죽정리에 거주하던 시기이다. 이 시 기에는 임서보다 창작품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말년에 항암치료를 받으 면서 구도자와 같은 심정으로 작품에 몰입하였던 그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남전 선생은 역대 한중서예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연마하 여 5체를 두루 섭렵하였다. 이 중에서 특히 族徽가 있는 금문과 漢簡을 이용한 작품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해서는 顔眞卿의 해서에 기초하여 寫經을 깊이 공부하였고, 행초는 왕희지 계통을 근간으로 米芾의 것을 소화하여 자신의 서풍을 선보이고 있다.
스승의 인품과 예술혼을 흠모하고 이를 후학들에게 전해주고자 무던히 애쓰던 남전선생의 人品高와 藝術香은 다시 후학들에게 이식되어 새 로운 형태로 면면히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동양화와 서양화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매우 큰 테마이 다. 그러나 화면상에서 간단하게 알 수 있는 차이점은 그림에 있는 글씨 와 도장이다. 동양화는 形과 色 이외에 이러한 글씨와 도장 그 자체도 예 술적 조형요소가 되며 또한 도장은 신용의 상징으로 문서에 찍혀져 진품 임을 증명하는 역할을 한다. 서예가나 화가가 자기 작품에 서명이나 시 문을 적어 넣고 도장을 찍는 것을 題款이라고 한다.
제관은 그림이 그려지게 된 내력이 적혀있거나 친구나 뒷사람들의 감상 소감이 적혀 있다. 그러므로 제관의 내용을 이해해야 그림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이 제관을 풀이할 수 있다면 작품 감상에 역시 도움이 되며 대개 저명한 文人들이 많이 쓰므로 그 筆體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동양화는 이러한 제관과 그림이 어우러져 완전한 한 폭의 그림이 되는데 최종적으로는 모든 것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가 문제가 된다. 그림 ․ 서예 ․ 도장의 결합은 동양화의 예술 특유의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동양화의 구도에서는 어떻게 제관을 할 것인가 하는 특수한 문제 가 발생한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제관의 조형적 특징을 6가지 나누어 분 석하였다. 1. 전체 화면의 범위를 확정한다. 2. 색채를 조절하는 작용을 한다. 3. 감상을 풍부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 4. 화면에 변화가 부족한 것 을 보충한다. 5. 경물을 충당하는 작용을 한다. 6. 호응작용을 통하여 정 신과 눈길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