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꼭두각시놀음 무형문화재 조 사보고서에 수록된 대본을 기준으로 주요 등장 인물, 꼭두각시, 박첨지, 홍동지, 평안감사, 동방삭의 성격과 역할을 분석한 것 으로, 조선 후기 다양한 사당패들에 의해 공연된 각기 서로 다 른 인형극이 옴니버스 형태로 융합되면서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1964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 꼭두각시놀음은 조선 후기 꼭두각시, 박첨지, 홍동지, 평안감사를 중심인물로 공연된 인형극이 통합된 형태로 볼 수 있다. 둘째, 꼭두각시는 현모양처의 여성상을 대변하는 인물로 자 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결정하는 인물로 순종적이면서도 진취적 인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셋째, 박첨지는 가부장적 남성 중심 사회에서 허세와 권위 의식에 사로잡힌 인물로, 권위주의적이고 남성중심적인 마초 (Macho) 문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넷째, 홍동지는 순박하고 어눌하지만 재리에 밝으며, 자신의 힘을 타인을 위해 사용하는 이타적인 인물로 민초들의 능동적 인 삶을 대변하고 있다. 다섯째, 평안감사는 부정부패의 무지몽매(無知蒙昧)한 권력층 을 상징하는 인물로, 효성이 지극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여섯째, 동방삭은 종교 지도자처럼 고난과 어려움을 위로하 는 역할을 하며, 껌벅이와 묵대사로 분화되면서 그의 매력적인 인물 특성은 사라진다. 본 연구 결과는 꼭두각시놀음의 주요 등장 인물들의 성격을 규명하고, 전통 인형극의 복원과 2차 창작을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창원시는 질 좋은 철(鐵)을 생산하여 넉넉한 삶과 찬란한 철 기문화를 꽃 피운 전통을 지니며, 우리나라 기계공업의 중심도 시다. 창원시는 “삼한 시대부터 좋은 철이 많이 생산되어 중국 과 일본에까지 수출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기반하여 기계공 업을 꽃피운 도시의 의미를 시민 화합의 구심력으로 삼고자 야 철축제(冶鐵祝祭)를 개발하였다. 야철축제에서 가장 상징성 있는 행사가 성산패총(城山貝塚) 에서 시작하는 야철제의(冶鐵祭儀)인데, 이 제례의식에서 추는 5가지 춤(고청무, 강신무, 기원무, 대동무, 천도무)을 통칭해서 기원무라고 한다. 이 명칭은 전래한 것이 아니라, 발굴 후, 체 계를 잡는 과정에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본고는 창원야철제 기원무가 창원시의 정체성을 담은 민속문 화유산으로 전승하는데 기초자료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이 춤의 기원, 전승, 의상, 무구, 춤사위, 장단, 상징 등에 관하여 무용학적 측면에서 고찰한 것이다. 본고의 연구범위 영상은 창원야철제기원무 여현주 보존회장 이 제공한 영상과 자료를 기반으로 했고, 면접과 대담을 통해 보충하였다.
연화문의 모습은 자연 상태와 가깝고 닮은 경우와 닮지 않은 먼 모습 즉 모습이 특이한 경우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우리 겨레는 이 논문에 소개하는 모습이 특이한 연화문들도 여느 연화문과 더불어 삼국시대 초(기원후 1세기경)부터 약 2 천여 년간 보편적으로 다양하게 줄곧 표현하였다. 이 연화문들은 불교 전래와 함께 유입된 외래 표현이 아니 다. 원(原) 중국 역사문화강역(현재 중국 섬서성·하남성 일대)으 로부터 영향받은 표현도 아니다. 우리 겨레의 원(原) 역사문화 강역 안 신석기시대 또는 고조선(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된 고유 의 표현들을 계승 발전시킨 모습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들을 분명하게 연화문으로 인식하며 표현하 였다. 이는 이 문양들이 모습이 다른 연화문들과 대부분 함께 사용되거나 서로 연결되어 있음에서, 모습이 다른 연화문을 대 신하거나 대치한 경우가 많음 등에서 내린 결론이다. 현재의 학계에서는 이 모습이 특이한 연화문들을 연화문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 추상적 문양·기하학적 문양이라 단정하거나 심지어 전혀 상관없는 잘못된 이름들을 부여하였다. 모습이 특이한 연화문들은 첫째 기와 생장(화생 포함)을 담 고 표현하는 과정에서, 둘째 삼국시대 이전의 여러 문양을 계 승, 수용하면서 다양하게 도안되며 더욱 확산되었다. 이 논문을 계기로 우리 겨레의 대표 표현인 다양한 연화문이 명확하게 인식, 이해되고 널리 전달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 다. 오래전부터 중국에도 전파되어 큰 영향을 끼쳤다는 위대한 역사적 사실도 함께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인터넷의 급속한 발전과 함께 디지털 멀티미 디어 잡지는 점차 사람들의 관심의 초점이 되었습니다.디지털 멀티미디어 매거진은 멀티미디어 기술을 사용하여 비디오, 오디 오, gif 모션 그래픽, Flash 애니메이션, Html5 페이지 및 3D 특 수 효과를 통합하고 어디에서나 우수한 상호 작용 특성과 멀티 미디어 특성을 구현하여 놀라운 발전 추세를 보여줍니다. 이 글은 'Design 360 매거진'을 예로 들어 멀티미디어 디지 털 매거진의 개념, 개발 과정 및 개발 전략에 대한 예비 논의 를 진행하고 주로 디자인 미학, 커뮤니케이션, 상호 작용 경험 및 기타 관련 이론을 사용하여 매거진의 디지털 전환에 대한 몇 가지 제안을 제시합니다.디지털 잡지의 특성과 종이 잡지와 의 비교, 사람들의 독서 습관 변화 등의 관점에서 전통적인 종 이 매체를 제안하는 것은 현재 시급한 변혁의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그리고 'Design 360 매거진'의 관점에서 잡지 자체의 특성과 결합하여 초기 변환 전략, 디지털 전파 경로 및 시각적 디자인 아이디어를 제안합니다.이 기사의 연구를 통해 잡지의 보급 효과를 효과적으로 향상시키다.
사대부가 창작의 주체인 문인화는 필묵을 숭상하며 채색이 맑고 담백하다. 민화나 궁정 회화에 비해 정신적 의미의 표현 과 화면의 상징적 의미를 더욱 중요시하고 문인의 사고방식으 로 물상을 정신적 차원으로 끌어올려 화가 개인의 정서와 관념 을 투영한다. 이로써 작품은 정신세계의 물질화 형식으로 존재 한다. 그리하여 문인화는 ‘자기 위안’과 ‘유사성을 추구하지 않 고 운율 생성을 추구하는’ 회화 이념을 형성하였다. 문인화는 어떤 기법의 대명사가 아니라 일종의 관념이자 의 식이다. 필묵과 색채의 계승 면에서 채색-흑백-간결한 필묵-필 묵+색채의 발전과정을 거쳤다. 이는 오채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당(唐)대에 기원하여 송대에 발전하였다. 당시 궁정 회화가 주 류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문인화가는 자신만의 회화의 길을 묵묵히 고수하며 탐색하였다. 북송부터 오대 시기까지 색 채를 벗겨냄으로써 차별화된 흑백산수화가 형성되었다. 원대에 는 복잡한 필치의 준찰(皴擦)을 버리고 깨끗하고 간결하게 화 면을 구성하였다. 대부분 수묵 위주이지만 화가는 ‘묵분오색’, ‘여백’ 등의 형식을 통해 문인화의 독특한 필묵의 언어 및 색채 관계를 형성하였다. 명·청시대에는 고대의 기법을 바탕으로 필 (筆)을 뼈대로, 묵(墨)은 살로 삼고 색으로 정신(神)을 입힘으로 써 필묵과 색채가 서로 돋보이도록 하였다. 본고는 회화 주체의 역할 변화 및 시대적 배경의 관점에서 문인화의 ‘기승전결’을 탐구하고, 문인의 내면 정신과 사고방식 을 결합하여 필묵과 색채 표현 간의 부침을 분석한다. 필묵과 채색으로 화면의 색채를 운용하는 관계에서 출발하여 문인화의 비판적인 색채 계승 및 재창조를 해석하고 문인화의 필묵과 색 채 간 긴밀한 연관성을 정리한다. 그러면 문인화를 더 잘 이해 하고 시대정신에 맞는 새로운 작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청말 사상가들은 시대성을 강조하게 되면 민족 전통성이 소 홀하게 되고, 민족성을 강조하면 시대적인 진보사조(進步思潮) 에 뒤떨어지게 되는 곤감성(困感性)을 고민하였다. 여기서 시대 성이란 바로 서학(西學) 수용의 자세에 수반되는 문제이며, 민 족성이란 중국 전통성을 고수하는 데 따르는 문제일 것이다. 강유위(康有爲: 1858-1927)는 청나라 말기 아편전쟁(鴉片戰 爭)과 남경조약(南京條約)·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亂)을 거치 며 중국 역사상 가장 큰 국가적 위기에 태어난 인물이다. 이때 는 서양문명과 중국의 전통적인 사상이 교차하는 시기이다. 이 러한 시기에 여러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에 따라 중국의 주권이 크게 제약되고 영토까지 분할되는 가운데 지식인들이 새로운 개혁사상을 일으켰다. 본 논문은 기존의 강유위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그가 남긴 자취에 대한 문예 미학 사상을 포괄적으로 연구하고자 노력하 였다. 이를 서술하는 데 있어서 바탕이 되는 것은 그가 세계를 인식하는 세계관인 변법(變法)적 사유의 형이상학적 틀이다. 첫 째는 원기론(元氣論), 둘째는 변법(變法), 셋째는 비학존중(碑學 尊重)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특히 서예 예술이 크게 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조하였다. 특히 강유위의 미학 사상은 서예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금 석학 중심의 비학 미학 사상과 존비경첩(尊碑輕帖)의 서예 미 학 사상을 전개하였다. 그는 첩학(帖學)의 음유미(陰柔美)에 대 비해 비(碑)의 양강미(陽剛美)를 강조한다. 강유위가 양강미를 선도한 이유는 생명미가 깃든 약동적이며 역동적인 아름다움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강유위는 기존 서예풍조의 하나인 첩학(帖學) 위주의 서예는 온화하고 세련되어 있지만 연미하여 힘이 없는 것이 마치 정치 적으로 대국의 힘이 없는 것과 암암리에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에 강유위는 정치적으로 변해야 된다는 이론을 문예 미 학 사상에 적용하여 양강미를 담은 비학(碑學)을 추숭하였다. 이러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서예의 발전은 고대부터 현재까 지 언제나 근본적으로 사회적 변화에 기초함을 알 수 있었다.
조선 후기 연행사는 청나라 문인들과 필담을 하거나 간찰을 보냈으며, 서예 비첩을 감장(鑒藏)하거나 금석학 교류활동을 활 발히 전개하였다. 본 연구는 이계 홍양호 『이계집』과 관암 홍경모 『관암전서』·『운석외사』에 기록된 서신, 제발, 서문 등을 확인하여 청대 문인 대구형, 기윤, 섭지섭과의 서예 교류 를 주요 연구 범위로 설정하였다. 위 문집과 『동문신교척독 책』과 『두남신교첩』자료를 활용하여 저서, 비첩, 서찰 교류 측면에서 고찰하였다. 또한 홍양호와 홍경모의 학서 소양, 금석 고증 능력, 비첩 감장 원칙을 논술 및 분석하여 교류 의의를 도출하였다. 홍씨 가문은 양국 문인의 가족적인 서예 교류의 대표적 사례이자 견고한 학문적 토대 위에서 진행된 교류를 의 미한다. 양국의 문인들은 필담을 통해 고금의 서예, 금석 학술 에 대해 전면적이고 심도 있는 토론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다 층적인 문화교류는 한·중 서예문화의 발전을 촉진하였다는 점 에서 그 의의가 있다.
본고의 연구대상은 서예의 이론적 개념이지만 연구방법은 창작과정의 경험을 바탕으로 노봉(露鋒), 장봉(藏鋒), 과봉(裹 鋒)의 운필(運筆)에 대한 분석을 집중적으로 했다. 노봉은 이왕(二王) 위주의 전통적인 ‘첩파(帖派)’에서 주로 사 용했는데, 이는 위진(魏晋)시기에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장봉과 과봉은 모두 장봉에 속하지만 두 가지 측면에서 차이 가 있다. 첫째, 여기에 말하는 장봉은 필봉을 드러내지 않고 붓 을 대어 쓰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안진경으로 대표되는 전 주(篆籀) 필의가 이러한 용례이다. 그러나 과봉은 글씨를 쓰기 전에 필봉을 거꾸로 감싸서 글씨를 쓸 때 필봉의 마찰력을 증 가시키기 위한 방법이다. 따라서 장봉과 과봉은 붓을 다루는 동작과 목적에서 모두 큰 차이를 보인다. 둘째, 시간적으로도 차이가 있다. 장봉은 주로 장욱과 안진경 이후에 유행했으며, 중국서예사에서 여전히 ‘첩파’의 서풍에 속한다. 그러나 과봉은 청나라 ‘비파(碑派)’에서 주로 유행했으며, 과봉은 ‘비파’의 주요 한 용필법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선행연구에서 비파와 첩파의 심미기준이 대립되어 양쪽이 경쟁한다고 생각하지만 필자는 비파의 심미기준과 품평 언어는 이전의 첩파 심미안을 토대로 보완하여 확장했다고 주 장한다. 서예의 발전은 기존에 형성된 최고의 기준을 계속해서 변형하고 재성장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고쟁은 중국 고전 미학의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가야 금은 한민족의 섬세한 음악적 자질을 보여준다. 본 연구는 21 현 고쟁과 25현 가야금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두 악기의 역사 적 발전 문헌을 연구하고 조율 및 악기 구조에 대한 정보를 분 석하며 두 악기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설명한다. 고쟁과 가야금 의 연주법을 연구하여 각 악기의 연주 특성을 찾고, 두 악기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유사한 연주 기법 3가지를 연구함으로써 고쟁과 가야금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고 상호 학습을 촉진하고 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