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의 삶과 <진감선사비>의 서예연구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최치원은 12세 어린 나이에 중국으로 유학을 가서 「討黃巢檄」문으 로 文名을 떨쳐 紫錦魚袋를 하사받고 唐書․藝文志에 수록될 정도 로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894년 귀국 후 時務策 10조를 올려 阿湌 까지 올라갔으나 국세가 기울자 898년에 스스로 불우함을 한탄하고 벼슬에 뜻을 두지 않기로 맹세하며 방랑의 길을 떠났다. 이를 통하여 그가 중국에서 닦은 학문과 재주를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속세에 묻힌 그의 비극적 삶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진감선사비>의 전액과 비문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창 적이고 자유분방한 서체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는 <진감선사비> 를 감상하는 시각이다. 종래에는 이것이 누구의 서체에 가깝고 누구 의 서풍과 닮았다고 하는 것이 감상의 주된 초점이었다. 그러나 전액 과 비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무엇과 닮았다는 것은 객관성 확보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그것과는 달리 천편일률적으로 판에 박히지 않고 활달하며 자유로운 필치를 나타내고 있다. <진감선사비>가 누구의 서 체와 흡사하다는 것은 시대적 제약이나 그는 결코 개성까지 말살하지 는 않았다. 만약 거꾸로 <진감선사비>를 당나라 서풍과 비교한다면, 아마 당시 유행하였던 모든 서풍이 여기에 융해되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진감선사비>는 당나라의 모든 서풍을 융해시켜 자신의 성정 을 나타낸 새로운 창작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글의 핵심이고, 앞으로 한국서단이 주체성을 가지고 중국서예를 어떻게 수 용할 것인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崔致遠是十二歲到中國去留學, 以 「討黃巢檄」揚文名受到賜紫錦魚 袋, 收錄 唐書․藝文志, 但894年歸國後上時務策十條昇阿湌, 以後 隨着國運下落, 898年嘆息不遇, 退仕去放浪之路. 通過這事情十分了 解悲哀的他的生涯, 卽在中國硏磨學問和才能還未施展之前埋在草野的. <眞鑑禪師碑>的篆額和碑文是很難找到獨特和自由奔放書體的. 提出 了一個重要的問題是鑑賞<眞鑑禪師碑>的觀點. 從前鑑賞的主要觀點是 似雖的書體和書風. 但是從篆額和碑文來看, 似雖的書體和書風不過保 證客觀性, 實際不是刻板千篇一律是體現了靈活自在的書法. <眞鑑禪 師碑>似雖的書體和書風是時代的制約, 而他竝不抹殺個性. 如果反過 來以<眞鑑禪師碑>比較唐代書風話, 也許大家都說這中融合了唐代的一 切書風. 因此, <眞鑑禪師碑>是當爲融合了唐代的一切書風以體現性情 了新的創作. 這就是核心, 而且以後韓國書壇持主體性對於如何受容中 國書法的答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