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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신라 말기 문학 서예 역사 철학 등에서 매우 뛰어난 인물로 특히 우리나라 서예사(書藝史)에 큰 족적(足跡)을 남긴 거목이다. 최치원에 대한 시 문학과 사 상. 정치. 철학. 종교 등에 대해 많은 연구논문이 계속 나오고 있다. 그는 서예의 대표작으로 <진감선사비(眞鑑禪師碑)>와 『숭 복사비(崇福寺碑)』를 남겼고 시문집으로 『계원필경집(桂苑筆 耕集)』과 『고운집(孤雲集)』등 많은 문헌을 남겼다. 이처럼 그는 인문학적으로 깊고 넓은 학풍과 문학적인 정감을 갖춘 문 장가이며 사상가이며 또한 서예가이다. 본 고에서 논하는 <진감선사비>는 885년에서 887년에 세워 졌다. 본 비문은 학문적 자료 가치가 매우 높으며, 특히 한국의 불교사는 물론 한문학사. 서예사. 사상사에 연구 대상이 되었 다. 더욱 <진감선사비>의 독창적인 전액(篆額)은 수준 높은 경 지를 보여준다. 이는 당(唐)나라에 머물렀던 17년 동안 모든 서 예를 섭렵한 결정체라고 할 것이다. 아울러 <진감선사비> 전 액에서 <설문해자>와 <한간>, <삼체석경>의 조형을 벗어나 오늘날 서예의 한 장르를 창조했다. 이미 1200여년전에 외형적 문자 조형에 깊은 조예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독특한 최 치원 체라고 할 수 있는 혁신적인 서풍을 탄생시킨 것에 큰 의 의를 둔다 그러므로 본 고에서는 서예가로서의 최치원의 <진감선사비> 를 분석하여 서예미를 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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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0.09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3,000원
        3.
        2016.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는 한국과 중국이라는 국경의 한계를 불문하고 양국의 시인들이 각자 마주한 인생의 고뇌를 해결한 양상을 살펴보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다. 이에 중국 唐代와 한국 新羅時代의 문인 王維와 崔致遠의 禪詩를 고찰 대상으로 삼아 그들의 인생과 사상을 앞서 살펴보고, 이 어서 그들이 구현한 창작 세계를 선 수행(習禪)과 시 창작(詩作)의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그 결과 상이한 시공간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두 시인 모두 인간적 방황과 고뇌를 존재의 실 상에 관한 선적 가르침과 대자연을 향한 회귀에서 해결하였음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선 체험적 깨달음(禪悟)이 시 작품에 공통적으로 체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양국 선시에 내재된 선사상의 보편적 특성과 시 창작 활동의 선수행적 가치에 대해 논의를 시도한 본고의 고찰이 차후에 진행될 선시 관련 연구에 일조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5,400원
        4.
        2013.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최치원의 삶과 <진감선사비>의 서예연구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최치원은 12세 어린 나이에 중국으로 유학을 가서 「討黃巢檄」문으 로 文名을 떨쳐 紫錦魚袋를 하사받고 唐書․藝文志에 수록될 정도 로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894년 귀국 후 時務策 10조를 올려 阿湌 까지 올라갔으나 국세가 기울자 898년에 스스로 불우함을 한탄하고 벼슬에 뜻을 두지 않기로 맹세하며 방랑의 길을 떠났다. 이를 통하여 그가 중국에서 닦은 학문과 재주를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속세에 묻힌 그의 비극적 삶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진감선사비>의 전액과 비문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창 적이고 자유분방한 서체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는 <진감선사비> 를 감상하는 시각이다. 종래에는 이것이 누구의 서체에 가깝고 누구 의 서풍과 닮았다고 하는 것이 감상의 주된 초점이었다. 그러나 전액 과 비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무엇과 닮았다는 것은 객관성 확보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그것과는 달리 천편일률적으로 판에 박히지 않고 활달하며 자유로운 필치를 나타내고 있다. <진감선사비>가 누구의 서 체와 흡사하다는 것은 시대적 제약이나 그는 결코 개성까지 말살하지 는 않았다. 만약 거꾸로 <진감선사비>를 당나라 서풍과 비교한다면, 아마 당시 유행하였던 모든 서풍이 여기에 융해되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진감선사비>는 당나라의 모든 서풍을 융해시켜 자신의 성정 을 나타낸 새로운 창작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글의 핵심이고, 앞으로 한국서단이 주체성을 가지고 중국서예를 어떻게 수 용할 것인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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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7.01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aimed to let people recognize lecture halls and to investigate the short history of Go un Choi Chi -won, an object of enshrinement , to examine the location environments, establishment background and meaning of Jacheondae, Oksan Lecture Hall , Munchang Lecture Hall and Yeomui Lecture Hall located in Gunsan area in Jeollabuk-do. The results concerning the facilities of the said historic sites and the arrangement of trees could be summarized as below. 1. Goun was a person from Silla and studied in Tang Dynasty when he was 12 (in 868) and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6 years when he was 18 and became a Jinsa (進士) so that people were very surprised at his smartness. At the age of 20, he became a Yunam Jeoldosa (桂南 節度使: military officer) in China and commander in chief of eastem section and was in charge of documentation duties. At that time, the insurgent Hwangso rebelled against the country and Goun became famous for putting down the rebel as a Dochonggyeonggwan (都統警官) . 2. Among 12 remains related to Goun distributed in Jeollabuk-do , 1 pavilion and 3 lecture halls including Jacheondae, Oksan Lecture Hall , Munchang Lecture Hall and Yeomui Lecture Hall in Gunsan’s Okgu area and Jacheondae and Munchang Le cture Hall have been located in Okgu Hyanggyo and Oksan Lecture Hall has been on the right side of Okgu Hyanggyo flanked by a wall. Amogn them, Jacheondae was the place where Choi Chi-won read books when he followed his father who was appointed in Naecho-do as a military officer of Silla during his childhood. Meanwhile, Munchang Lecture Hall, Oksan Lecture Hall and Yeomui Lecture Hall were f ounded by regional Confucian scholars in the reign of Sukjong in Joseon Dynasty (in the heyday of Confucianism) to follow the thought of loyalty and filial piety and lofty knowledge of Choi Chi -won. There many regional competent scholars have been brought up and they have played a large role in doing religious services for ancient sages and in maintaining the Confucian community order. 3. Jacheondae in Okgu-eup was actually located on a hill at Seonyeon-ri and three lecture halls were situated in the flat village with low mountains and they were surrounded by private houses. In terrns of buildings and main planting species, in Munchang Lecture Hall , inner Samun and shrines were arranged in a row. Meanwhile, inner Samun, outer Samun and space for religious services were arranged in a row and education space and managerial sector were in symmetrical form and the space for religious S8rvices was arranged in a rear(a form of building arrangement of Humyojeonhak ) in Oksan Lecture Hall and Yeomui Lecture Hall. In addition, crape myrtle was unique as a planting species and they were planted in symmetrical form in education space and space for religious servi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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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최치원은 12세에 唐으로 유학을 떠나 6년 만인 18세에 賓貢科에 급제하여 현지에서 관료로 활동하였다. 16년 동안의 당 나라 생활, 그 리고 28세에 귀국한 이후 신라에서의 활동에서 그는 탁월한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여기에 더해서 그 스스로 유학자로 자처하면서, 그의 학문은 곧 ‘詞章學’으로 이해되었고,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받 아들여졌다. 그런데 이 글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의문을 제기한다. 기본적 으로 최치원의 학문이 사장학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면 서도, 그의 학문이 정말 우리가 믿고 있는 만큼 순수하게 사장학적인가 하는 것이 이 글의 문제의식이자 출발점이다. 최치원의 유학사상에 사장학이 아닌 새로운 지향이 함축될 수 있다 는 점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무엇보다 그가 당나라에 들어가기 50여 년 전, 흔히 송명리학의 선구로 알려져 있는 한유나 이고 등에 의해 이미 유학의 질적 전환이 시도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아진다. 이들의 활동이 당시 크게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새로운 방향으로의 첫 걸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 은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당나라 중기 이후 사장학 내부에서 발생한 이와 같은 변화의 흐름을 최치원이 직간접으로 계승하고 있는지 여부 는, 결국 한유와 이고 등의 지향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확인하는 것과 함께, 그와 유사한 지향을 최치원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핵심이 된다. 이 글에서는 최치원에게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 첫째로 사장학 의 한계와 함께 그것을 넘어서는 학적 체계를 인정하는 탈사장학적 특징, 둘째로 직접적으로 성리학과 연결시켜 이해할 수 있는 지향을 구분하여 살펴보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최치원으로부터 우리는 사장학적 한계를 넘어서는 탈사장학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經典의 전통보다는 四書의 전통을 준비하고, 공자와 맹자를 道統의 중심에 세우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성리학을 향한 발걸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충분히 사장학으로부터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사장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그에게서 읽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