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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몽골리카 하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이중적 정체성 —‘고려인-세계인’ 사이를 방황한 경계인— KCI 등재

The dual identity of Yi Gok(李穀) under the Pax Mongolica: a marginal man wandering between Koryŏ dynasty and Mongol Empire

  • 언어KOR
  • URLhttps://db.koreascholar.com/Article/Detail/411511
  • DOIhttps://doi.org/10.35203/EACT.2021.1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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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문화와 사상 (East Asian Culture and Thought)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동양학연구소 (Institute of Oriental Studies)
초록

이 논문의 목적은 가정 이곡(1298-1351)의 이중적 정체성을 살펴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몽골이 수립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하에서 세계인과 고려인의 이중적 정체성을 가지고 방황한 이곡의 정신적 여정을 검토하려 는 것이다. 이곡은 한산의 호장 출신이다. 그는 1320년 고려의 과거에 합격했으나, 가문이 한미하여 현달하지 못했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1333년 원(元) 의 과거시험인 제과에 응시해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 결과 고려인 합 격자로서는 처음으로 원 중앙 정부의 관리로 임명되었다. 이곡은 1348년 영구 귀국할 때까지, 15년간 원과 고려를 오가며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이곡은 몽골제국의 개방성과 보편주의를 신뢰했다. 그에 따라 국가를 초월한 평천하의 정치적 이상을 꿈꾸었다. 다른 한편 그는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원 관리로 있으면서도, 고려 정부의 불공정한 인사 정책을 비판했다. 또한 고려 정부를 대변해, 원의 공녀정책의 부당성을 역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 조정에서 고관에 오르지 못한 이곡은 평천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었다. 몽골과 고려의 정치세계에 어디에도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그는 경계인에 머물렀다. ‘원유자(遠遊子)’ 또는 ‘동서남북인(東西南北人)’이란 이곡 스스로의 자칭은 경계인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어머니와 황제는 그의 삶의 두 축이었다. 그는 황제의 도시 연경에 머물렀지만, 다른 한편 언제나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이곡은 몽골제국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이 만들어낸 세계인 이자 동시에 고려인이었다. 그의 좌절은 어떤 의미에서 몽골제국의 보편성의 한계였다. 또한 몽골제국 아래 고려가 경험한 세계화의 외연적 경계였다.

This paper intends to examine the dual identity of Yi Gok (1258-1351). Specifically,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understand his unique spiritual journey of the dual identity wandering between Korean and cosmopolitan under Pax Mongolica(1271-1388). The family of Yi Gok was from low-ranking clerk (戶長) of Hansan province. He passed the bureaucrat examination in 1320. But, he failed to get a government office, because his family was low-ranking. In order to overcome the social discrimination, he took the bureaucrat examination of Mogol Empire in 1333 and passed it with excellent grade. He was appointed as an official of the Mongol Empire’s central government. Until he returned to Korea permanently in 1348, he continued his official life between the Mongol Empire and Koryŏ dynasty for 15 years. He believed in the openness and universalism of the Mongol Empire. And as a statesman, he dreamed of the ideal to make peace in the Mongol Empire. On the other hand, he did not give up his national identity as a people of Koryŏ dynasty. Sometimes, he criticized the personnel policy of the Koryŏ government. At the same time, he pointed out the injustice of Koryŏ women hostage by the Mongol Empire. Yi Gok was not appointed as high-ranking office under the Mongol Empire and remained as a stranger. Unsuccessful in realizing his political ideal, he returned to Korea permanently in 1348. Yi Gok referred to himself as 'a person who wanders far away(遠遊子)' or 'a person of East, West, South and North(東西南北人)'. The two pillars of his life were his Korean mother and the Mongolian emperor. Yi Gok always missed his mother while he stayed in Beijing(大都), the capital of Yuan dynasty, to pursue his political ideals. He was a new Korean and a cosmopolitan created by the the Mongol Empire’s cosmopolitanism. His failure was the limit of the Mongol Empire’s tolerance and the apparent boundary of the globalization that Koryŏ dynasty experienced

목차
논문 초록
Ⅰ. 서론
Ⅱ. 세계인으로서의 정체성: 몽골제국에의 진출
Ⅲ.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 고려 인사정책과 원공녀제도 비판
Ⅳ. 원 조정에서의 이곡의 정치적 여정
V. 결론: 북당(北堂)과 황도(皇都) 사이를 떠돈 동서남북인
<참고문헌>
Abstract
저자
  • 김영수(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 Kim Young Soo (Yeungnam Univers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