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읍치는 전국 군⋅현 지역의 행정중심지인 동시에 교통의 결절지로서 소위 전통도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근대 이전 공유되어 온 전통적 공간인식체계이자 지리로서 풍수가 투영되어 있는 대표적 장소이기도 하다. 본 고에서는 조선후기 부평도호부를 사례로 읍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지리지, 고지도 등 관련 문헌과 현장답사를 병행하여 읍치의 풍수적 공간구성을 확인 하고 현재적 입장에서 특징적인 풍수 관련 경관의 복원 의미 및 방향성을 제시해보고자 하였다. 먼저 풍수 상 읍치 국면을 군⋅현 최고 명당으로 구성하는 근간이자 출발 로서 진산, 주산에 주목하였다. 읍치 복원과 관련해 진산, 주산이 지니는 의미는 단순히 읍치를 구성하는 주변 자연환경 중 하나가 아닌 읍치의 역사적 장소성 구성이나 경관배치를 위한 일종의 지표경관이 될 수 있다. 다음으로 진산, 주산과 읍치 내 중심 경관인 동헌, 객사 간 형성되는 공간 관계 즉 ‘공간구성을 위한 중심축’을 설정할 수 있다. 풍수적 공간구성에서 진산, 주산으로부터 동헌으로 이어지는 중심축은 읍치 경관 복원과 관련해 제반 요소 간의 중요도나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또한 그것의 입지나 방위를 비정하 는데 있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지막으로 지역 생태환경에 대한 통합적 인식과 장기적인 접근의 필요성 과 관련해 풍수 비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풍수 비보는 산과 물로 대변되는 생태환경을 하나의 생명체로 전제하고 인간과 교감, 공존하는 동기간(同氣間) 관계로 접근하는 생태중심적 환경관의 전통적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직업 선택에서 직업 적성을 우선 순위로 고려하는 기존의 방법에서 확장하여 직업가치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본 논문은 Holland 직업가치와 명리 직업가치를 비교 분석하고 융합하여 한국적 직업가치를 정립하고 활용성을 제시하는 데 목적이 있다. 연구 결과 Holland 직업가치와 명리 직업가치에 대한 두 이론의 기준은 다르지만, 직업가치의 상호 상관성을 찾을 수 있었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실재형 가치는 비견격과 겁재격의 특성과 상관성이 높았고 탐구형 가치는 식신격과 편인격의 특성과 상관성이 높았다. 예술형 가치는 상관격과 식신격의 특성과 상관성이 높았고 사회형 가치는 식신격과 정인격 그리고 편인격의 특성과 상관성이 높았다. 기업형 가치는 편재격과 편관격의 특성과 상관성이 높았고 관습형 가치는 정재격과 정관격 그리고 정인격의 특성과 상관성이 높았다. 이러한 연구 결과로서 명리 직업가치는 서양의 자기 보고식 검사의 한계점을 상호 보완하고 융합한 도구로서 한국적 직업가치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결 과를 얻었다. 본 연구의 결과가 후속 연구의 초석이 되고 급변하는 변화 속에서 불확실한 미래를 살아가는 개인의 직업가치 상담에 유용한 정보로써 활용되기를 바란다.
본 연구는 인상학의 여러 관점사 중 부(富)에 대한 연구로서 한국의 재벌기업 창업자 13인과 게임기업 창업자 21인을 대상으로 동양의 전통적 상학인 인상학의 이론을 적용하여 두 집단의 인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삼정(三停), 이마, 귀, 눈썹, 눈, 코, 입 등 7개 부위를 얼굴의 길이와 상대비율로 측정하여 통계분석 하였다. 분석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두 집단 간의 공통점은 귀의 길이와 코의 길이가 한국의 표준형에 비해 길다는 점이다. 이는 인상학의 고전 이론과 부합하는 점이라 할 수 있다. 둘째, 두 집단 간의 차이점은 귀길이, 귓불길이, 코의 세로길이는 재벌창업주가 더 길었고, 눈썹과 눈사이를 의미하는 전택궁 역시 재벌창업주가 더 길고 넓다는 점이다. 이는 재벌창업주의 인상이 고전 상법과 더욱 일치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게임기업 창업주는 코의 가로길이가 더 길었는데 이는 코가 넓고 두툼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면 고전 상법에서는 귀끝이 눈썹 끝보다 높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는데 사례자 전원은 반대였다. 이는 고전 인상학의 기준이 현대에는 적용되지 못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인상 부위 중 두 집단의 공통점은 코와 귀로 나타났다. 이에따라 귀길이, 귀 불길이, 전택궁길이, 코세로길이, 코가로길이의 5개 변수를 대상으로 판별분석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판별적중율은 82.4%로 높은 판별율을 나타내어, 두 집단 간의 인상의 차이점이 특징적으로 존재함이 나타났다. 전체적으로 재벌창업주의 인상은 고전 인상학의 이론과 부합되었지만, 게임기업 창업주의 경우 불일치 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따라서 인상학이 현대의 학문영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실증과 검증이 필요함과 동시에 현대에 맞는 이론으로 전화되어야 한다는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본 논문은 朝鮮王朝實錄을 기초 자료로 삼아 15세기 명나라 사신의 서화 교류의 구체적인 발생 양상을 분류하여 정리하였고, 題畫詩및 題 跋⋅記文등 문헌 자료에 근거하여 서화 교류가 문학 교류⋅우호 외교⋅ 문화 수출 분야에 담당하였던 역할을 밝혔으며, ‘朝中文化交流史’ 및 ‘東 亞藝術史’의 각도에서 15세기 명나라 사신의 서화 교류의 특징과 의미를 고찰하였다. 우선, 15세기 朝鮮使行중 서화 교류의 구체적인 발생 양상은 주로 作 畫留書⋅禮物贈受⋅請書請畫세 가지로 분류된다. 일부 書畫에 능한 명나라 사신은 朝鮮을 방문하는 동안에 서화의 재능을 펼쳐 적극적으로 서화 교류에 나서는 동시에 조선 문인과 詩文唱酬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서화 교류의 결과물, 즉 그림과 글씨는 詩文唱酬의 대상이 되었고 한시는 당시 서화 교류의 형태를 기록하였다. 15세기 명나라 사신은 양국의 우호 관계를 증진하고 문화적인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는 데 목적을 두고 서화를 선물하곤 하였다. 명나라 사신은 귀한 선물을 사양하면서 조선왕실에서 증여한 書簇⋅畫簇⋅法帖⋅書帖등 서화 선물을 흔연히 받 아드렸다는 기록도 서화 교류의 융통성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또한, 명나라에서는 조선 서화에 대한 생기면서 명나라 사신은 조선왕실에서 적 극적으로 조선 서화를 청탁하기 시작하였다. 15세기 명나라와 조선 간의 서화 교류는 보편성과 편의성을 가지고 있다. 詩文唱酬를 진행하는 데 참여 인원이 높은 문학적인 수준을 갖춰야 한다는 상황과 달리 서화 교류는 쉽게 접할 수 있는 교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따라 많이 배우지 못한 명나라 內史⋅少監도 禮物贈受⋅請 書請畫의 방식을 통해 서화 교류에 많이 참여하였다. 한편, 서화 자체의 특성(휴대성, 적당한 가격, 예민한 문자가 없음 등)은 선천적인 편의성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명나라 사신은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친한 조선 관원에게 서화를 선물로 하여 우호 관계를 추진하면서 서로 부담이나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朝⋅中문화 교류사’ 및 ‘동아시아 예술사’의 시각으로 볼 때 15세기 朝鮮使行중 발생한 서화 교류는 새로운 ‘畫題’⋅畫法을 도입 하여 15세기 조선 畫壇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고, 16~17세기 朝⋅明간 활발한 서화 교류의 성황을 위해 토대를 마련하였다.
본 연구는 안원(顔元)의 『사존편(四存編)』을 통해 그 교육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여기서 사존(四存)이란 존성(存性), 존학(存學), 존치(存治), 존인 (存人)을 말한다. 존성은 인성을, 존학은 치학을, 존치는 정치를, 존인은 종교 등에 관한 것으로 안원은 「존성편(存性篇)」, 「존학편(存學篇)」, 「존치편(存治篇)」, 「존인편(存人篇)」을 각각 써서 자신의 학설을 수립했다. 그는 『사존편』을 통해 역학치지(力學致知), 습사견리(習事見理)를 강조하고, 정주리학(程朱理 學)을 비판하며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실학을 주장하였다. 안원은 이중「존학편」을 통해 배움에 있어 습행(習行)을 강조하고 실천의 중요성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존성편」을 통해 인간 본래의 선성(善性)을 확보하고, 이러한 선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후천적으로 교육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본 연구는 안원의 사존 중「존학편」, 「존성편」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교육적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이 논문의 목적은 가정 이곡(1298-1351)의 이중적 정체성을 살펴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몽골이 수립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하에서 세계인과 고려인의 이중적 정체성을 가지고 방황한 이곡의 정신적 여정을 검토하려 는 것이다. 이곡은 한산의 호장 출신이다. 그는 1320년 고려의 과거에 합격했으나, 가문이 한미하여 현달하지 못했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1333년 원(元) 의 과거시험인 제과에 응시해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 결과 고려인 합 격자로서는 처음으로 원 중앙 정부의 관리로 임명되었다. 이곡은 1348년 영구 귀국할 때까지, 15년간 원과 고려를 오가며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이곡은 몽골제국의 개방성과 보편주의를 신뢰했다. 그에 따라 국가를 초월한 평천하의 정치적 이상을 꿈꾸었다. 다른 한편 그는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원 관리로 있으면서도, 고려 정부의 불공정한 인사 정책을 비판했다. 또한 고려 정부를 대변해, 원의 공녀정책의 부당성을 역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 조정에서 고관에 오르지 못한 이곡은 평천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었다. 몽골과 고려의 정치세계에 어디에도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그는 경계인에 머물렀다. ‘원유자(遠遊子)’ 또는 ‘동서남북인(東西南北人)’이란 이곡 스스로의 자칭은 경계인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어머니와 황제는 그의 삶의 두 축이었다. 그는 황제의 도시 연경에 머물렀지만, 다른 한편 언제나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이곡은 몽골제국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이 만들어낸 세계인 이자 동시에 고려인이었다. 그의 좌절은 어떤 의미에서 몽골제국의 보편성의 한계였다. 또한 몽골제국 아래 고려가 경험한 세계화의 외연적 경계였다.
본 연구는 최근 전 세계적인 K-콘텐츠 열풍으로 국가의 미래 성장동력산업으로 주목받고 있는 문화콘텐츠산업의 성공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기 위한 정책적 방안 제시에 목표를 두고 있다. 이와 같은 연구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먼저 문화콘텐츠산업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있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화 산업론에 대해 살펴본 후, 문화콘텐츠산업의 개념과 산업적 특성에 대해 살펴 보았다. 그리고 그동안 지속적으로 발전되어온 우리 정부의 문화콘텐츠산업 정책을 개괄적으로 살펴본 후 새로운 경제 여건 속에서도 현재의 성과를 지 속적으로 담보해낼 수 있는 정책적 보완 방안 역시 끝으로 제시해 보았다. 아도르노(Adorno)와 호르크하이머(Horkheimer)의 문화산업론은 문화산업을 매우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문화를 산업적 측면에서 접 근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다음으로 역대 정부의 문화콘 텐츠산업 정책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김영삼 정부는 정책적 단초를 제공하였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김대중 정부는 우리나라 문화콘텐츠산업이 실질적인 성장을 시작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하였다는 측면에서 각각 정책적 의미 를 부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의 성과를 이룰 수 있는 정책적 방안들은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에서 실질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에서 제안한 문화콘텐츠산업의 발전방안은 다음과 같다. 먼저 문화콘텐츠산업 종사자들의 전문성 강화와 인력수급을 위해 산·학·관의 협력을 통한 상시적인 교육과 인력수급 체계가 구축되어야 한다. 특히 ‘문화콘 텐츠 개발 코디네이터’ 양성에 중점을 둘 필요가 있다. 둘째, 세계 최초 5G상 용화 기술 개발을 바탕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주도권 확보를 위한 정책방안들 을 구상해야 한다. 셋째, 수출지원과 관련하여 중앙과 지역 지원기관들의 지원과 연계방식의 중복을 피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문 화콘텐츠 발굴 및 개발과 관련된 자원 접근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관련 법과 제도들 중 완화가 가능한 부분은 긍정적으로 검토하여야 한다.
풍자개 (豊子愷, Fengzikai, 1898-1975)는 중국 문인서정만화(文人抒情漫畫)의 창시자이자 중국 만화의 아버지라 불리운다. 중⋅일 전쟁과 신중국 탄생 등 근현대 중국의 격변하는 시대를 몸소 겪은 그는 ‘만화’라는 예술형식을 통하여 인생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표출해 내었고 당대(當代)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풍자하였다. 풍자개의 만화 속에는 문인적 정취가 흐르는데, 이것은 전통을 통한 그의 높은 문학적 수양(修養)과 숙련된 필묵(筆墨)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중국 전통 문인화의 시정(詩情)과 화의(畵意)가 담겨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만화가 문학과 회화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종합적인 예술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형상미와 문학미의 이중적 의미를 지닌 작품을 창조해 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의 만화 속에는 고도의 예술성을 지닌 시의(詩意)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데, 이것은 그의 만화가 다른 만화와 차별화되는 독특 한 매력으로서 보는 이로 하여금 끊임없이 사고하고 상상하도록 만든다. 그가 작품 속에서 담고자 했던 시의란 우리가 살아가는 보편적인 생활 풍경으로 우리 삶 속의 인지상정(人之常情)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통하게 하는 인정(人 情)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만화는 진실한 감정으로 다가와 폭 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일종의 ‘시(詩)’와 같은 풍자개 만화의 독창적인 예술 풍격은 일종의 창신 (倉新)을 이룬 것으로, 만화사와 예술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후대의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본고는 핫토리 우노키치 경성제대 초대 총장의 인맥이 경성제국대학 ‘支那 哲文學’ 강좌의 교수진과 운영에 작동하였으며, 그러한 과정을 통해 경성제대 의 지나학 강좌의 특징을 만들어 낸 것을 밝히는 데에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핫토리가 가진 전통 한학과 근대 철학을 횡단하는 학맥과 일본과 조선의 다양한 인맥이 가진 특징을 조명하였으며, 이것이 경성제대를 어떻게 움직였는지 알아보았다. 일본 제국에서 「지나학」이라는 학문은, 한학으로부터 태어난 것이다. 한학은 동아시아의 전통 학문으로 동아시아性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학문을 바탕으로 핫토리는 도쿄 제대의 동문과 동료, 사문회 동지들을 규합하여 경성제대에 지나학 강좌를 개설하였다. 그 이유는 세계적 권위를 갖춘 아시아 연구기관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결론적으로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 대신 일본 내에 동방문화학원을 개설해 10년간 이사장으로 근무하며 일본의 동아시아 연구에 세계적 권위를 부여하는 데 주력했다. 경성제대의 교수진 상당수가 동방문화학원에서 핫토리 동료로 근무했다. 핫토리가 동아시아에 관한 연구를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었던 힘은 그의 지식의 권위에서 설명할 수 있다. 그의 지식의 권위는 사승 관계, 인격, 학문의 성과 등을 원천으로 하였다. 지식의 권력화는 이렇게 학맥과 학맥에 의해 공고화된다. 핫토리의 경성제대 지나철문학 강좌 교수진 구성은 도쿄제대의 지나철문학과 강좌라는 학맥과 학벌의 지원을 받으며 이뤄졌다. 더불어 일본 황실로부터 찬조를 받았던 사문회와 조선의 총독부, 경학원 등의 협력자, 그리고 그 인맥의 뒷받침과 조력이 있었던 것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