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B. 예이츠, 프랭크 페이, 무대연출 기술
이 논문은 프랭크 페이(1870-1931)와 윌리 페이(1872-1947) 형제가 예이츠의 드라마 발전에 끼친 영향을 탐구한다. 1890년대 프랭크 레이와 윌리 페이의 다양한 아마추어 극단은 아일랜드 국립극단(Irish National Theatre Society, 1902)을 탄생시켰고, 그들 중 하나가 최초의 애비극단으로 발전했다. 애비극장의 설립에 형제가 한 역할은 논쟁의 여지가 없지만, 그들의 명성은 때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주제의식을 개진한 문학 및 연극 역사의 서사에 달려 있다. 예이츠는 1923년 스웨덴 아카데미 연설에서 ‘우리의 최고의 남자 배우 두 명이 있는데, 한 명은 무대에서 변호사의 사무원이었고, 또 한 명은 흑인이 관리하는 극단에서 아일랜드를 여행했던 노동자였다’(CW3 413). 이러한 깔보는 듯한 언급은 페이 형제에 대한 이후의 평가에 잘못된 영향을 미쳤다. 이 논문은 애비극장의 기록 보관소와 프랭크 페이 기록 보관소 및 미발표 강의를 참고하여 더블린의 문학적 환경 내에서 페이 형제이 갖는 위상을 재고하려 한다.
This paper will explore the influence of the brothers Frank Fay (1870-1931) and Willie Fay (1872-1947) on the development of Yeats’s drama. Frank and Willie Fay’s various amateur theater companies of the 1890s gave rise to the Irish National Theatre Society (1902), out of which grew the first Abbey Company. While the brothers’ role in founding the Abbey Theatre is uncontested, their reputation has depended on the narratives of literary and theatrical history written by others, often with their own agendas. Foremost among these is W.B. Yeats, who wrote in his speech to the Swedish Academy in 1923 of ‘our two best men actors … one a stage-struck solicitor’s clerk and the other a working man who had toured Ireland in a theatrical company managed by a Negro.’ (CW3 413). These patronizing words have had a disproportionate influence on subsequent critical evaluations of the Fays. This paper therefore hopes to reinstate the Fays within the literary milieu in Dublin, through scrutiny of the Abbey Theatre archive and Frank Fay’s own archive of letters and unpublished lectur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