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racteristics and Meaning of the Production of Buncheong Ware Incense Burner in the Early Joseon Period
본 논문은 조선 전기 분청사기 향로가 세종실록 오례 <명기>에 제시된 향로의 조형 및 이를 따르고 있는 백자와 구별되고 있음을 주시하여, 분청사기 향로의 조형 및 제작 특징 을 살펴보고, 건국 초 국가의례용 향로에 대한 인식과 조형의 정립 및 정착 시기 등을 고찰 하였다. 조선 전기 국가의례에서 향을 피우는 분향(焚香) 의식은 오례(五禮) 중 군례(軍禮)를 제 외한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殯禮) 흉례(凶禮)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였던 만큼, 향을 피우는데 사용되는 향로 역시 중요한 기물이었다. 다만, 의례에 있어서 분향을 위한 향로의 설비 여부와 이원화된 설비 방식은 조선이 지향하거나 의례 정립에 참고한 중국 의례에 근간을 두고 새롭게 재편된 것이 아닌, 고려 의례를 따른 습속(習俗)에 해당할 것으 로 여겨진다. 따라서 건국 초에는 유교식 의례에 부합하는 향로의 조형 기준을 제시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더욱이 향로는 여러 의례에서 범용적으로 사용되었던 까닭에 길 례 제기(祭器) 및 가례와 빈례의 준작(尊爵) 품목에 포함될 수 없었으며, 이는 조선 전기 의례서에 향로의 조형 정보와 원칙이 누락 된 이유로 해석된다. 문헌 기록을 참고하면, 조선 전기 거행된 흉례의 분향 의식과 관련한 법과 제도는 1446 년까지 완전하게 갖추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부장용을 위한 명기(明器) 향로의 명칭 은 세종대(1418~1450)까지 ‘향완(香椀)’으로 표기되다가 단종 즉위년(1452)에 이르러서 야 ‘향로(香爐)’로 변경되어 세종실록 오례 (1454)에 적용되었다. 15세기 전반 국가의 례에 있어서 분향 제도의 미비와 향로와 향완의 명칭이 혼용되었다는 사실은 앞서 살펴본 의례용 향로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조형을 비롯한 체계가 완전하게 확립되지 않았음을 대변해 줄 것이다. 나아가 의례서에 제시된 부장용 향로의 조형인 ‘유개정형(有蓋鼎形)’ 또한 15세 기 후반 무렵에서야 정립 정착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조선 전기 유적에서 출토되는 분청사기 향로는 의례서 수록되고 백자에서 확인되는 ‘정형 (鼎形)’과 다르고, 형태상으로 불교 공양구 향로의 조형인 ‘향완(香垸)’에 가깝다는 점에서 ‘향완형 향로’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분청사기 향완형 향로는 굽과 구연부의 형태, 입지름 높이 등의 크기, 명문의 배치와 내용, 문양 소재와 장식 수법 등 세부 요소에 있어서 불교 의례용 청동 향완을 따르지는 않았다. 분청사기 향완형 향로를 제작한 가마터는 관찬 지리지 에 자기소 등재 여부, 출토 유물의 명문 장식 기종 현황 분석을 종합해볼 때, 왕실 및 중 앙 관청과 관련한 진상 공납의 의무가 부여되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즉, 조선 전기 ‘분청 사기 향완형 향로’는 15세기 후반 무렵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백자 유개정형 향로’가 국가의 례용 향로의 재질 및 조형으로 정립되기 이전 및 정착되는 과정에서 왕실 및 국가의례를 위 한 향로의 한 축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This article focuses on the possibility that the form and decoration of Buncheong ware incense burner in the early Joseon Dynasty may be different from the “round ding(鼎) with a perforated lid” of white porcelain made by government kiln and local kiln. The purpose of the study is to analyze the shape, decoration, and manufacturing method of Buncheong ware incense burner, and based on the production of Buncheong ware incense burner, the overall situation of incense burner used in national ceremonies at that time. In the national ceremonies of the early Joseon Dynasty, incense burners were installed in many ceremonies and had an important symbolic meaning. However, information on the material, shape, and decoration of the incense burner was limited. The reason is that although the incense burner installation in the early Joseon Dynasty followed the Goryeo ceremonies, it was not an object that conformed to the Confucian rites that Joseon was aiming for, and because its nature was used in various ceremonies, the form was not important. In addition, in the literature of the first half of the 15th century, the names of incense burners were mixed with Hyangro(香爐) and Hyangwan(香椀). The fact that two names are mixed in incense burner in the first half of the 15th century means that the system of incense burners was not fully established at the time, In addition, it is possible that the shape of the incense burner was different from that of the late 15th century. According to data so far, the overall shape of the incense burner made of Buncheong ware is similar to Hyangwan (香垸), a incense burner dedicated to Buddhism from the Goryeo Dynasty. However, there are differences in detail shape, size, inscription, and decoration. The kiln site where the Buncheong incense burner was excavated produced Buncheong ware dedicated to the royal family or dedicated to the state, and rites vessels used for national rites are excavated. According to the above research, Buncheong ware incense burners in the early Joseon Dynasty have been made in a different form from the “round ding(鼎) with a perforated lid” made of white porcelain since the late 15th century. It is presumed that these Buncheong ware incense burners were produced and consumed for national events and ceremonies before they became established as a formative system of incense burners for national ritu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