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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반기 경복궁의 관리와 운영 연구 - 고종 대 중건 이전을 중심으로 - KCI 등재

Operations and Maintenance of the Gyeongbokgung Palace in the Second Half of the Joseon Dynasty : Focusing on Cases before the Reconstruction during the Reign of King Gojong

  • 언어K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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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역사연구 (Journal of Architectural History)
한국건축역사학회 (Korean Association of Architectural History)
초록

경복궁은 조선 건국과 함께 창건된 궁궐로 태종, 세 종, 세조를 거치면서 법궁(法宮)으로 위상을 갖췄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이후 선조를 시작으로 여러 국왕은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결국 270 년간 중건하지 못하였다. 경복궁의 공지(空地)에는 내농포(內農圃)가 들어섰으 며, 때에 따라 군사훈련을 하거나 왕실의 말을 키우는 목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소실 이후 경복궁에는 전각터를 비롯하여 궁성(宮城) 과 궁성문(宮城門), 수계(水系)와 천문 관련 시설 등이 남아 있었는데, 그중 궁성은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한 시설로 유지 관리되었다. 궁성문에는 돌을 쌓아 출입을 막았으나, 광화문 동협문에는 경복궁의 관리를 위해 별 도의 문을 두어 출입하도록 했다. 경복궁의 수계시설은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祈雨)를 위해 정비되었으며, 영조 대에 들어 물이 잘 흐를 수 있 도록 준천(濬川)되었다. 이외에도 간의대(簡儀臺), 소간 의대(小簡儀臺) 등의 천문 관련 시설이 남아 있었으며,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이 발견 되어 관상감(觀象監)으로 옮겨 보관하였다. 광화문 밖에 남아 있던 세조 대 제작된 동종(銅鐘)은 종각을 세워 보 호하였다. 경복궁의 수비와 관리를 위하여 공궐위장(空闕衛將) 과 수궁내관(守宮內官)이 경복궁 내에 위치한 위장소와 수궁에 상주하였으며, 매일 포도청과 삼군문이 경복궁 외부를 순라(巡邏)하였다. 이러한 인력을 통한 관리와 함께 난입과 벌목, 내맥(來脈)의 굴토(掘土)를 금지하는 금령(禁令)이 마련되었으며, 이를 어기는 경우 처벌하였 다. 이러한 경복궁의 관리와 함께 근정전, 사정전, 강녕 전, 경회루 등의 전각터에서는 선대왕의 고사를 바탕으 로 왕실행사가 계속되었다. 현종 대 강녕전 터에서는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종묘 부묘(祔廟)를 위한 제주(題柱)가 행해졌으며, 숙종은 경 복궁 신무문 밖에서 행해지는 회맹제(會盟祭)를 위해 경복궁에 친림하였는데, 이러한 회맹제 때 국왕이 경복 궁을 찾는 것은 이후 경종과 영조 대까지 이어졌다. 숙 종은 회맹제 외에도 세조 대 경회루에서 행해진 양로연 (養老宴)의 고사를 따라 노인연(老人宴)을 열었다. 영조는 회맹제를 시작으로 숙빈 최씨 사당의 전배(展 拜)와 관련하여 경복궁에 친림하였다. 이와 함께 경복궁 에서 과거시험을 열었으며, 친잠례(親蠶禮), 진작(進爵), 조참(朝參) 등을 행하였다. 영조 대 친잠단과 문소전 터에 세워진 어필비는 영조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관리되었으며, 문소전구기비의 경 우 이후 국왕들이 지속적으로 전배하였다. 또 경복궁은 춘당대(春塘臺)와 함께 정시(庭試) 과장(科場)으로 정해 졌기 때문에 철종 때까지 정시가 계속 열렸다. 경복궁 신무문 밖 공지에서도 회맹제(會盟祭)와 군사 의례가 행해졌다. 영조 대 육상궁(毓祥宮)과 연호궁(延祜宮) 등의 사묘(祠廟)가 건립되고, 인원황후의 탄생지 인 양정재(養正齋)가 어필 봉안처가 됨에 따라 소란스 럽게 행해진 신조기휘제(新造旗麾祭), 호궤(胡跪) 등의 군사의례는 한양 내 다른 곳으로 옮겨져 행해졌다. 경복궁 중건을 위한 기초자료로써 문헌에 기록된 소 실 이전의 경복궁 전각배치와 중건 초기 경복궁 내의 수계와 내맥 등이 반영된 다양한 <경복궁도>가 제작되 었다. 고종 대 경복궁 중건은 경복궁 내부 청소를 시작으로 수계와 내맥이 정비되었다. 우선 경회루지와 후원지를 준척(濬滌)하였으며, 준척에서 나온 흙으로 내맥을 보토 하였다. 이와 함께 경회루지의 제방(堤防)과 첨계(檐階), 섬 등은 개축(改築)되었다. 수로 역시 정비되었는데 기 존에 관리되던 수문은 시설의 변화 없이 단순히 준천만 하였지만 관리되지 못한 수로와 수문은 새롭게 고쳐 쌓 았다. 경복궁 공지를 차지하고 있던 내농포와 궁성 밑 민가 들은 한양 곳곳으로 옮겨졌으며, 어필비각과 위장소와 수궁 역시 훼철되었다. 간의대와 소간의대를 훼철한 후 나온 석재는 경회루 첨계, 건춘문 지대석, 근정전 품계 석 등에 재사용되었으며, 광화문 밖 동종 역시 녹여 향 로와 토수(吐首) 등을 제작하였다. 신무문 북쪽 지역은 중건과 함께 경복궁 후원으로 포 함된다. 이에 따라 육상궁 동쪽에 담장을 쌓으면서 후원 안에 위치하게 된 연호궁은 창의궁(彰義宮)으로 이봉 (移奉)되었으며, 양정재는 영조와 정조의 어필 봉안처로 서 경복궁 후원에 남게 되었다. 경복궁 중건과 함께 궁성과 궁성문, 주요 전각터 등 은 훼철 후 다시 지어졌지만, 그 규모와 배치는 크게 바 뀌지 않았다. 다만 강녕전과 사정전 사이에 행각이 건설 되어 강녕전 전면 좌우 건물의 위치와 명칭에 변화가 있었다. 광화문과 강녕전에는 다른 궁궐과 같이 월대를 새롭게 쌓았으며, 경회루와 근정전, 광화문 월대에는 난 간이 새롭게 세워졌다. 이와 같이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270년간 중건되지 못하였지만, 경복궁의 관리를 위해 조직과 법 령이 마련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경복궁은 유지관리 되 었다. 이러한 관리를 바탕으로 유지된 경복궁에서는 왕 실행사가 행해졌으며, 이로써 법궁으로서의 상징성이 유지되었다. 문헌과 중건 초기상황이 반영된 <경복궁도>는 고종 대 경복궁 중건의 기초자료로 쓰였다. 경복궁 중건에서 내부를 점유하고 있던 시설들은 훼철되거나 자재로 재 사용되었다. 경복궁 내 남아 있던 전각터를 바탕으로 전 각이 중건되었으며, 경복궁 궁역이 신무문 밖까지 확대 되었다. 중건 경복궁에는 270년간 궁궐 건축 변화가 적 용되었으며, 월대의 난간과 같은 새로운 형식이 나타나 기도 하였다.

저자
  • 홍현도(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 박사) | Hong, Hyeon-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