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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0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1. 孔夫子의 美學思想 收容 동아시아 문예미학은 공부자(BC551-479)가 그 기반을 구축했다.『論語』에는 미학에 준하는 단편적인 기록들이 산재한다. 공부자는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泰伯”이라고 했다. “詩”는『시경』이고 “禮”는『예기』이며 “樂”은「악기[악경]」를 지칭한다. 이를 기준하여 유추하건데 공부자 문예미학의 근원은 “興”이다. 조선조 士人들이 중시했던 詩學의 한 범주로서 “因物起興”을 외쳤던 까닭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論語』집주에 “興”은 ‘起’라 했고, 性情에 “正”과 “邪”가 있는 바,『시경』은 성정의 정을 감발시키는 것을 본분으로 삼는다고 했다. 공부자가『시경』300여 편을 일러 “思無邪”라고 한 것은 이를 부연 설명한 것이다. “立於禮”는『예기』를 통해 善을 확립시킨다는 의미이고, 예의 근본은 恭敬心과 謙遜의 마음을 갖추는 것으로 보았다. “成於樂”은 『악경』을 통하여 사특한 마음과 심성의 나쁜 잔재를 씻어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부자의 “詩學 ․ 禮學 ․ 樂學”에 바탕한 미학의 본령은 모두 “思無邪”에 목적을 두었다. 공부자는『六經 가운데『시경』을 가장 중시했는데,『詩 書 禮 樂』에서『詩』가 첫머리에 나오는 것도 이를 뜻한다. 2. 社會美學의 成立 중원을 에워싼 동서남북 소위 四夷 국가들 가운데 우리 한국이 통시적으로 공부자의 미학사상을 가장 비중있게 수용했다. 우리 선인들은 공부자의 미학사상을 “社會美學”적으로 연역하여 수용했다. 공부자는 시를 “言志”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상의 전반을 교정시키는 “以詩正世”적 역할을 수정해야 한다고 했으며, 우리 선인들도 이 같은 문예의식을 긍정하고 시문을 통하여 사회를 교화해야 한다 고 인식했으며 이를 일러 “詩教”라고 칭했다. 공부자는「陽貨」편을 통하여 “그대들은 왜 詩(詩經)를 공부하지 않느냐, 시는 사람을 감흥 시키고, 사물을 올바르게 관찰하게 하며,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화락하게 하며, 사회상을 비판할 수도 있으며, 가깝게는 부모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새나 짐승풀 나무 등의 이름도 배우게 된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살필 수 있고, 사람들과 어울리는데도 도움이 되며, 현실의 부조리를 비판하며, 어버이를 섬기고 지도자에게 충성하는 올바른 길을 알 수가 있고, 자연 속에 존재하는 동식물들의 무수한 이름도 터득하게 된다는 주장에서, 공부자의 광범한 주제영역을 융합한 社會美學的 美意識을 접할 수 있다. 6세기 무렵 중원에서 발간된 鍾嶸(?-518)의『詩品』과 劉勰(464-535)의『文心雕龍』 및 9세기경 司空圖(837-908)의『二十四詩品』등이 고려조 문단에 유입되었다. 12, 13세기경 李仁老(1152-1220)의『破閑集』과崔滋(1186-1260)의『補閑集』속에『시품』과『문심조룡』등은 물론 이고, 사공도의『24시품』도 애독했음이 확인된다. 고려조 문단은 “托物寓意 換骨奪胎” 등의 일반론을 벗어나 “俊壯, 精妙, 含蓄, 飄逸, 淸遠, 豪放, 淸雅, 勁峻, 平淡”등 품격론에 입각하여 시문을 짓고 비평하는 풍조가 편만해 있었다. 사공도의 『二十四詩品』에 나타난 “品格論”은 사회미학 영역 중 刺詩보다 美詩에 치중된 美意識이다. 조선조 성리학자들의 눈에는 고려조 시인들의 이 같은 시의식과 시작태도를 강건한 주제의식을 약화시켜 文弱으로 흐르게 한 요인으로 생각했으며 이를 “雕蟲篆刻之徒”로 격하했다. 3. 文藝美學과 國家의 興替 시문을 사회상과 결부시키는 것은 시문도 정치의 興替와 직결된다는 문학관에 의한 것이며, 樂舞가 정치와 접맥하고 있다는 예악인식과도 결부된다. 문학과 樂을 정치와 연결시키는 것은 동아시아의 오래된 사유이며, 이 같은 사유와 맞물려 사회미학은 더욱 그 含意를 확충시켰다. 조선조 일부 人들은 고려조의 멸망을 퇴폐적 악무와 문약에 흐른 문단도 일인을 담당했다고 한 것은 문학을 정치와 결부시킨 사례이다. 사실 조선조는 개국과 더불어 문학과 악무를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龍飛御天歌, 文德曲, 新都歌” 등도 개국을 합리화하고 예찬하는 사회미학적 악무관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고려조의 사회상을 일정한 선에서 대변한「翰林別曲」을 위시한 歌曲들을 退溪가 “矜豪放蕩 褻慢戱狎”하다고 비평한 것 역시 시가를 사회상과 연결시킨 예이다. 4. 性情美學의 確立 16세기 사림파들은 사회미학의 범박한 주제영역에 불만을 느껴 지양한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에 부합되는 새로운 문예미학을 찾기 시작했다. 사림파가 성리학을 저변으로 한 미학사상을 창출하기 위해 우선 그들이 비판했던 吟風詠月的 시풍과 雕蟲篆刻的 수사기교와 절제되지 않은 서정과 男女相悅的 주제의식 및 時事의 부정적 인식 등은 응당 배척되어야 했다. 16세기 사림파들은 위에 열거한 주제영역을 배제하고 “吟詠性情”만을 오로지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이를 실천했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그들이 어렵게 창출한 새로운 미학이 바로 “性情美學”이다. 16세기에 들어와서 조선조 士人들은 모두 성리학자였고, 따라서 “理氣說”과 “人心道心說”에 수반된 “性情論”은 그 深淺의 차이는 있었지만 상식이었다. 七情이 비뚤게 발출되면 人欲이 되는 바, 이 인욕은 문학의 주제가 되어서 않된다는 미의식은 조선조 오백년 동안의 주류가 되었다. 일상생활 중 직발된 칠정의 향유는 쉽지가 않고, 오히려 횡발된 칠정을 경험하는 일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성정지정”과 더불어 “性情之邪”도 함께하는 삶의 와중에, 자칫 성정미학적 주제에서 벗어난 부분을 시문으로 형상할 소지가 보다 많았기 때문에, 조선조 士人들이 현실문제와 거리를 둔 채 “山水詩”에 탐닉했던 것일까. 山水의 詩的 形象도 제한되어 산수의 미를 형상하는 것을 저급하다고 인식하여, 돌 한 덩어리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天理”와 “道心”에 연결시켜야 한다고 주장 했다. “山水詩 ”는 竹林七賢 유의 시인 군이 나타날 소지가 많다. 조선조는 고려조와 달리 “悅目娛耳”적 美的 山水詩가 풍부하지 않은 까닭 역시 성정미학과 관계가 있다. 5. 天機美學과 性靈美學의 擡頭 시인의 자연스런 서정을 방해하는 “성정론” 대신 “天機論”을 수용하여 17세 무렵 시는 “天機”를 형상해야 한다는 시풍이 일어났다. “天機流動”은 “吟詠性情”과 대응되는 용어이다. “성정”과 “천기”의 含意는 다르다. 인간의 심성을 성리학적 性情論으로부터 해방시켜 현실의 부정적인 사실과, 외물과 접촉하여 억제되지 않고 발로된 자연스런 정감도, 시의 주제로 편입되어야 한다는 인식의 전환과 연결된다. “天機”는『莊子 -大宗師』편에 나오는데, 인간이 타고난 천품과 본성을 의미한다. “성정” 대신 “천기”를 사용한 것은 시창작에 있어서 자연스런 정감의 발로를 더 이상 막지 말아야 한다는 선언이다. 장자도 인간의 본능적 욕망을 심하게 노출시키는 자를 일컬어 천기가 천박하다(其嗜欲深者 其天機淺. -大宗師).라고 했고, 기욕이 심한 자는 정욕이 많은 자를 뜻한다고 해석했다. 16세기 전 후 일반화 된 “음영성정” 대신 “천기유동”이라 일컬은 이유는 무엇일까. “天機”는 “天意” 나 “靈機”라는 견해도 있다. “천기”를 시문창작에 적용시킨 것은 “성정미학”을 준거로 한 획일화된 意境에 대한 불만과 관련이 있다. “천기미학”은 宋代 말엽 풍미하던 主理的 관념시에 대한 비판의식이 내재된 嚴羽의 “興趣”설과도 관련이 있다. “흥취”를 중시할 경우 음영성정적 묘사와는 거리가 생기고, 신비적 “妙悟”설이 부각된다. 따라서 宋詩의 관념성을 부정한 엄우는 또 하나의 새로운 관념론을 제시했다는 비판도 있다. 17세기 조선조에 제기된 “천기미학”은 “性情論”과 “興趣論” 및 王夫之(1619-1692)의 “客觀論”등이 혼융하는 과정에서 생긴 미학이다. 6. 東亞細亞 文藝美學의 推移와 韓國文壇 『朱子大全』이후 성리학에 관련된 서적의 유입이 주춤해진 것과 달리, 문예미학에 수반된 책들은 한층 증가했다. 이 같은 문헌들의 유입에 힘입어 고려를 지나 조선조에 걸친 문단에 수준 높은 미학사상이 전개된 것이다. 이를 대체적으로 요약하면 “社會美學”을 필두로 “性情美學”, “天機美學”, “性靈美學” 등의 미학사상이 보급되어 창작과 비평의 척도가 되었다. 이들 미학사상 이외에 여러 각종 미학견해들도 존재했을 것이지만, 가장 영향력을 발휘한 것이 상기 四大 “美學思想”이었다.한국의 역대 시인 묵객들은 시 창작 못지않게 시론과 시 비평에도 관심을 경주했다. 중원에서 새로운 미학사상이 대두되면 동아시아 어떤 나라보다 앞서 이를 신속하게 받아들여 시작과 시 비평에 활용했다. “韓國漢文學”에 具顯된 通時的 美學思想은 中原의 文壇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부침을 거듭했지만, 각종 美學思想 중 “性情美學” 만은 항상 일정한 지분을 가진 체 저변에 흐르고 있었으며, 현재까지도 그 영향력이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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