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坡遺稿(춘파유고)』는 조선 말기의 학자이며 문인인 진주(晉州) 강인회(姜寅會)의 문집이다. 이 책의 저자인 춘파공(春坡公)는 어려서부터 용모와 재질이 뛰어났으며 타고난 성품이 효우(孝友)가 돈독하였다. 5세에 모친을 여의고 슬퍼하기를 어른처럼 하였으며, 7세 때 마을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일찍부터 시를 짓는 재주가 드러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6세 때 학문에 열중하여 세미(細微)해진 가문을 일으키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싸들고 산사(山寺)에 들어갔다. 2년 동안 공부하다가 18세 때 깨달은바가 있어 당시 성리학(性理學)으로 이름이 높은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 나아가 집지(執贄)하였다. 그 뒤 부친이 돌아가자 복상(服喪)한 뒤 가족을 이끌고 노사 선생이 사는 곳(長城)으로 이사하여 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57년 동안을 받들고 섬기며 학문에 정진하여 그의 고제(高弟)가 되었다. 당시 노사선생의 문하에는 이희석(李僖錫)·박만채 (朴萬彩)·정면규(鄭冕奎)·문동황(文東璜) ·기문헌(奇文鉉)·안중섭(安重燮)·유성렬(庾成烈)·김유(金유)·이돈형(李敦亨)·조성가(趙性家) 등 쟁쟁한 유생들이 있었으므로 항상 그들과 도의로 교유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다. 공은 나이가 들수록 학문이 심오하고 인품이 높아갔으므로, 노사 선생이 연로하시자 공의 문하에 와서 학업을 계속하는 자가 많았다. 박용태(朴容泰)·기용연(奇容衍)·기홍연(奇弘衍)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공은 이와 같이 학문에 전념하며 산수에 묻혀 안빈낙도하며 시문과 술로 여생을 보내다가 74세 때 세상을 떠났다. 공의 문집은 후손들이 수집하여 간직해오던 시문을 현손(玄孫) 복원(福遠)이 1974년에 간행하였다. 그리고 5대손 성창(聲昌)이 후손들에게 읽히기 위하여 그의 족형(族兄) 성섭씨(聲燮氏)에게 청하여 국역한 것을 정리하여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