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조선시대 대일사행기록에 나타난 울릉도와 독도 관련 기록을 살펴본 논문이다. 울릉도 독도 관련 기록은 1617년 회답겸쇄환사 종사관 이경직의『扶桑錄』과 1719년 통신사 필담창화집『桑韓星槎餘響』, 그리고 계미통신사행을 통해 저술된 성대중의『日本錄』과 원중거의『和國志』, 마지막으로 1882년 수신사행을 기록한 박영효의『使和記略』에서 확인된다. 비록 소략하지만, 울릉도 독도에 대한 대일사행의 인식과 대일사행이 오간 시대의 양국의 인식을 동시에 살필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다. 먼저 이경직의『부상록』에 보이는 기록은 임진왜란 이후 대마도의 이중적 행태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전후 공식적으로는 두 나라의 국교재개를 위해 가교역할을 하면서도, 선초부터 드러낸바 있는 울릉도를 점거하려는 욕망을 숨기지 않고 있는 대마도를 분명히 인식케하는 기록이다. 둘째로 필담창화집『상한성사여향』에 보이는 조선지도는 울릉도 우산도를 명칭과 함께 분명하게 표기해둔 기록이다. 이는 당시에도시대 막부와 긴밀히 관계 맺고 있는 이들이 간행한 책이라는 점에서 당시 일본의 영토인식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다음, 계미통신사 사행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성대중과 원중 거의 기록에 나오는 울릉도ㆍ독도 기록은 안용복, 대마도 관련 내용과 얽혀 전한다. 사행을 통해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대마도의 농간을 고발하는 과정에서 과거 안용복의 울릉도 도해 사건이 다시 호명된 것인데, 곧 두 사람은 조선이 앞으로 일본과 대마도를 구별해서 봐야 하며 특히 대마도를 경계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대마도가 울릉도를 점거하려는 야욕을 안용복이 꺾었기 때문에 특별히 기록하였다. 마지막으로 박영효의『사화기략』에 전하는 기록은 에도막부의 울릉도 도해금지령이 메이지유신이후 해이해져 울릉도ㆍ독도로 도해하는 일본인이 빈번히 발생하는 상황과 맞물려 있다. 이 시기는 메이지 정권이 울릉도ㆍ독도에 관해 에도막부의 정책을 계승하고 있는 시기임을 반영하지만, 머지않아 독도 점거를 감행하는 메이지정권의 조치를 예견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오늘날 독도와 관련하여 한⋅일간의 갈등이 지속되는 시점에서 근원적 해법을 모색하는데 의미 있는 지혜를 제공하는 자료로서의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