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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결과 3

        1.
        201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眉叟 許穆이 지은 德山碑 즉 南冥先生神道碑는 1585년에 세워졌는데, 1926년에 南冥 曺植의 후손인 德山 曺氏 門中에 의해 훼손되어 없어지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晉州 鄕校와 德山 曺氏 門中 사이에 법적 소송이 벌어졌다. 진주 향교는, 미수 허목의 글을 없앴다는 이유와 조상의 신도비를 훼손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므로, 비석을 원상복귀하고 도내 유림에게 사죄하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덕산 조씨 문중은, 미수 허목이 지은 비문의 내용에 자기들의 조상이자 만인이 추앙하는 남명 선생을 비하하는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에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실상 문법적으로 본다면, 비문의 내용을 굳이 악의적으로 보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문의 내용이 악의적인 의도에서 지어진 것이라고 덕산 조씨 문중에서 단정하는 이유는 바로 『記言』에 실린 「答學者」에서 미수가 남명을 폄하하고 있다는 뜻을 드러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본고는 남명선생신도비를 둘러싸고 벌어진 사건에 대해 덕산 조씨 문중이 어떤 시각으로 임하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밝히려는 목적으로 작성된 글이다.
        2.
        201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南冥 曺植(1501-1572)의 4종 神道碑文 중 尤庵 宋時烈(1607-1689)의 「南冥曺先生神道碑銘」을 총체적으로 연구한 결과물이다. 한 명의 인물을 대상으로 당대 최고 문사들이 각각 신도비문을 남기고 그 작품들이 모두 현전하는 경우는 남명신도비문이 유일하다. 송시열이 찬술한 남명신도비문은 남명 조식 사후 100여 년 만에 찬술된 것으로 이전 정인홍ᆞ조경ᆞ허목 보다 학문적 연원이나 사승 관계가 멀다 할 수 있고, 오히려 사후 정치적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조식과 송시열은 가장 대치적 관계에서 지어진 작품이다. 그러나 송시열은 정치적ᆞ학문적 입장을 뒤로하고 조식의 不朽한 功業과 序其爲人의 독특한 찬술자세로 남명신도비문을 찬술하였다. 송시열의 남명신도비문은 가장 비지문 창작이 왕성했던 60세 전후에 찬술된 작품이며 영남유림과 조식의 자손들 부탁으로 찬술되었음을 확인하였다. 특히 10년 전에 지어진 초고본을 다시 찾아 주변 지인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퇴고를 거듭 하며 남명신도비문에 많은 공력을 기울였다. 송시열은 조식의 공로에 대해 세 가지(①貴義賤利, ②可尙恬退’, ③可羞貪冒)로 요약했고 그의 성품에 대해서는 일화를 통해 간략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도록 기술하였다. 조식의 출처관에 대해서는 이황의 말을 인용하며 미화로 여겨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나아가 조식을 성리학자로 최고의 위상이라 할 수 있는 육군자의 반열과 병렬시킨 것은 송시열 이외에 어떤 사람도 하지 못한 일이며 당시 노론 영수로 후대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송시열에게 이루어졌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였다. 송시열은 이황을 포함한 육군자는 조식의 위상과 차이가 없다 생각하였고 바로 이점으로 자신이 조식을 백세의 스승, 영원한 스승으로 삼았던 것이다. 당시까지 조식을 당파적 영수로 여겨왔다면, 송시열은 당파적, 정치적 외형에서 탈피하여 한 시대의 영원한 師表로 승화시켰다. 바로 이점이 기존 3종의 남명신도비문과의 변별점이며 송시열의 남명신도비문이 지닌 위상이라 할 수 있다.
        3.
        201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神道碑銘은 일종의 墓道文字이다. 묘도문자는 한 인물의 學問, 言行, 德性, 業績, 家系 등을 기록하여 돌에 새겨 神道에 세우는 것인데, 남명의 경우처럼 우여곡절을 겪으며 5종이나 남아 전하는 경우는 사례가 없다. 이 5종의 묘도문자의 撰者는 모두 자신의 입장에 충실한 修辭를 보였다. 대곡 성운은 평생의 벗을 여읜 슬픔과 그리움을 담아 곡진한 修辭로 표현하려는 입장이었고, 내암 정인홍은 무한한 존경심으로 스승을 높이려는 의도였으며, 미수 허목은 퇴계의 남명 비판 이후 견지되어온 남인학파의 견해와 자신의 평소 견해에 입각하여 남명을 高士로 기리는 입장이었고, 우암 송시열은 상대 당파이기에 오히려 자유로운 존숭을 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용주 조경은 미수와 동일한 입장과 견해에서 학자라기보다는 高士로 남명을 기리고 있으며, 사실의 기록과 闡揚의 수사 사이에서 사실의 기록에 치중하는 입장이었다. 龍洲는 南冥을 氣節이 높았던 高士로 평가했고, 그것을 修辭로써 잘 드러내기 위해 다양한 방식을 구사하였다. 이러한 修辭는 直敍와 尊崇의 사이에서 긴장하며 행간에 드러나고 있었다. 또 용주는 남명의 출처에 대해서 때를 만나지 못한 不遇와 高潔自守의 경우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修辭의 방식이 남명을 존숭하고 그 행적의 사실을 드러낸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대곡이나 내암 혹은 우암이 찬한 신도비명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直敍와 簡略함에 더 치중했음을 보았다. 따라서 용주의 修辭는 尊崇 내지 闡揚의 修辭와 事實의 直敍 사이를 오가는 긴장 속에 만들어진 것이며, 용주의 修辭는 오히려 史論의 褒貶에 가깝고 묘도문자의 목적인 揚善隱惡에는 다소 부족한 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