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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 구독 인증기관·개인회원 무료
        若论对韩国文学产生影响的中国文学,当属唐宋时代的文学为大。其中,唐宋八大家无论对中国还是韩国,他们在后世古典散文教育方面占有的地位,无疑是举足轻重的。因此,只要谈到唐宋散文文学,通常都以唐宋八大家为代表。可是,到了十七世纪以后,却有另外一个人物跃然登场,他就是朱子。当 时,将朱子纳入唐宋散文文學, 尤其是唐宋古文代表性作家行列的,是中国清朝时期形成的古文派 -- 桐城派。他们以唐宋八大家的文章为典范,追求简洁的、不加修饰的、高品位的散文文体。 为了确立这种思想,他们提出的主张如下: 第一。文学家既当是文人、又当是圣人。 第二。文学,当以『春秋之義』与『唐宋八大家』之法为宗,严格遵 循義法之旨。第三。文学的最高规范是六經、『論語』与『孟子』,其次为『左傳』和 『史記』。第四。古文当与詩等純粹文學严格区别开来。桐城派的人物们,建立并完成了这般文章论,并通过不懈努力,在已有的唐宋八大家上又增加了一位朱子,进而编撰完成了『唐宋九大家』这一选集。自此以后,唐宋九大家便成为向往纯粹汉文散文的教育家们模仿的一种典范,也一度被融义理、考证和词章为一体的曾国藩大为提倡过。再论韩国的状况,与中国有所不同,尚未发现从唐宋八大家扩展到朱子的那种文章论。而且,朱子的文学造诣和成就虽不亚于歐陽脩和蘇東坡,但在韩国仍未将其视为文学家。究其原因,可归纳为两方面。一是因朱子的文学为載道之文,道學者只是注重道學内容,并无心品味纯粹文学内涵;二是文学家们虽想从道学作品中追索文学之美,却都以失败告终。所以,在韩国,朱子仅仅被视为思想家,他的文学成果未能得到人们注意。但是,十七世纪以后,在韩国也曾有过几位关注朱子文学性的人物。他们既继承了唐宋八大家的风格,又对朱子的作品从道学意味转为文学意味来斟酌、来品味。他们大多属于醉心朱子学的人物,但对于朱子,却能从思想领域扩展到文学领域来予理解。虽然,他们未能象『韓歐正脈』那样将之升华至文学理论层次,也未提出『唐宋九大家』这类具体的解释,但无疑持具着与中国桐城派相似的见解,从而对唐宋文学有所关注,还进一步对朱子文学也予以了很大关注。特别值得一提的是,在韩国,朱子文学的地位,早已在传统教育方式之书院讲学中获得了稳固的强化,而且通过这种讲学方式,朱子的文学理论也不断得到更为广泛的传播。这种书院讲学,打破了以首尔为中心的教育体制,成为在全国范围内传播文化的重要手段,上升为中世纪教育的重要基础。由此,朱子的文学也通过这种散在于全国的书院,得以大范围的传布。纵观中国的桐城派,其十分注意唐宋古文和宋明理學之关系,且曾受到当时盛行的考證學和經世致用學風的不少影响;那么在韩国,朱子文学所以产生广泛影响,其扎根的学术环境和背景究竟又是如何的呢?我想,这将是日后需要进一步研究和思索的课题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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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南冥 曺植(1501-1572)의 4종 神道碑文 중 尤庵 宋時烈(1607-1689)의 「南冥曺先生神道碑銘」을 총체적으로 연구한 결과물이다. 한 명의 인물을 대상으로 당대 최고 문사들이 각각 신도비문을 남기고 그 작품들이 모두 현전하는 경우는 남명신도비문이 유일하다. 송시열이 찬술한 남명신도비문은 남명 조식 사후 100여 년 만에 찬술된 것으로 이전 정인홍ᆞ조경ᆞ허목 보다 학문적 연원이나 사승 관계가 멀다 할 수 있고, 오히려 사후 정치적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조식과 송시열은 가장 대치적 관계에서 지어진 작품이다. 그러나 송시열은 정치적ᆞ학문적 입장을 뒤로하고 조식의 不朽한 功業과 序其爲人의 독특한 찬술자세로 남명신도비문을 찬술하였다. 송시열의 남명신도비문은 가장 비지문 창작이 왕성했던 60세 전후에 찬술된 작품이며 영남유림과 조식의 자손들 부탁으로 찬술되었음을 확인하였다. 특히 10년 전에 지어진 초고본을 다시 찾아 주변 지인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퇴고를 거듭 하며 남명신도비문에 많은 공력을 기울였다. 송시열은 조식의 공로에 대해 세 가지(①貴義賤利, ②可尙恬退’, ③可羞貪冒)로 요약했고 그의 성품에 대해서는 일화를 통해 간략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도록 기술하였다. 조식의 출처관에 대해서는 이황의 말을 인용하며 미화로 여겨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나아가 조식을 성리학자로 최고의 위상이라 할 수 있는 육군자의 반열과 병렬시킨 것은 송시열 이외에 어떤 사람도 하지 못한 일이며 당시 노론 영수로 후대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송시열에게 이루어졌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였다. 송시열은 이황을 포함한 육군자는 조식의 위상과 차이가 없다 생각하였고 바로 이점으로 자신이 조식을 백세의 스승, 영원한 스승으로 삼았던 것이다. 당시까지 조식을 당파적 영수로 여겨왔다면, 송시열은 당파적, 정치적 외형에서 탈피하여 한 시대의 영원한 師表로 승화시켰다. 바로 이점이 기존 3종의 남명신도비문과의 변별점이며 송시열의 남명신도비문이 지닌 위상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