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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필자는 연계재에 소장된 여러 종류의 사마안, 연계안을 통해 조선 후기 진주 사마소의 건립과 변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조선 전기 유향소를 능가하는 막대한 영향력을 향촌사회에 행사하고 있었던 사마소는 1603년에 혁파되었지만, 이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1620년대에 와서 사마소가 다시 세워지고 있다. 사마소는 고을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 일찍 부터 지속적으로 운영되기도 하고 아주 늦은 시기에 설립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진주에서도 조선 전기에 사마소가 세워졌다가 혁파된 이후 한동안 운영되지 않다가 1736년에 새로 창건되었고, 이에 따른 명안인 ‘사마안’도 만들어졌다. 이후 1812년에는 다시 ‘청금록’이 작성되었는데, 입록의 시기적 범위가 넓혀지 고 문과 급제자도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1841년에 와서는 연방안과 계적안이 별도로 작성되었고 사마소의 명칭도 ‘연계재’로 바뀌었다. 이후에 가서도 새로 운 명안이 여러 차례 만들어진다. 18세기 전반 진주에 사마소가 창건된 것은 우선 진주 지역에서 좀더 많은 과 거 합격자가 배출되기를 열망하는 교육적 목적 때문이었다. 사마소가 건립된 또 하나의 배경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진주 내에서 열세이던 노론세력들 이 그들의 입지를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던 점이다. 그런데 후대로 오면서 사마소의 성격은 변화양상을 보인다. 참여가문이 증가 하고 사마시 합격자뿐만 아니라 문과 급제자도 포함되면서 점차 연계안 체제로 변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연계안에 입록된 인물의 수도 점차 증가한다. 많은 가문들이 연계안에 관심을 가지고 조상을 입록시키기 위해 경쟁하면서 과거합 격 여부가 분명치 않은 인물들도 수록되기 시작하고, 가문간에 여러 가지 분쟁 도 발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