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서원제도는 周世朋의 白雲洞書院 설립으로 출현하였지만, 이후 서원을 조선사회에 보급․정착시키고 그 성격을 규정하여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것을 退溪 李滉이다. 그러나 南冥 曺植은 여러 가지 여건에서 강우지역의 서원설립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자료에는 서원 건립이나 보급․ 정착 등에 관여한 사실이 나타나 있지 않다.
南冥 在世時 강우지역에 최초로 건립된 서원은 咸陽의 灆溪書院이다. 남계서원은 남명의 문인인 介庵 姜翼 등의 함양 인근의 사림과 지방관의 협조에 의하여 설립된다. 그런데, 남명 재세시 남명과 남명학파의 핵심적인 인물들은 남계서원의 건립과 운영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고 있다. 남명 사후 강우지역에 최초로 건립된 서원은 德川書院이다. 덕천서원은 남명의 문인인 守愚堂 崔永慶 등의 진주 인근의 사림과 지방관의 협조에 의해 건립된다. 덕천서원 창건 당시는 전 강우지역의 남명학파에게는 서원건립은 이슈가 되지 못한 것 같다. 남계서원과 덕천서원은 丁酉再亂으로 소실되고 그후 중건된다. 중건도 창건과 마찬가지로 인근의 사림과 지방관의 협조로 이루어진다.
강우지역에 있어서 남계서원과 덕천서원은 광해군 대에서 인조반정 이전까지는 북인계열에 속하는 남명학파의 총본산으로서 그들의 향촌사회 내 거점으로 정치․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북인세력이 제거되면서 이를 뒷받침하고 있던 서원도 조락하고 만다. 숙종․영조 연간을 거치면서 남계서원은 친노론계 서원으로, 덕천서원은 친남인계 서원으로 변모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