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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필리핀에서 기독교는 스페인의 식민지배와 함께 시작되었다. 교황청이 하사한 ‘선교보호권’ 아래 남미를 정복한 스페인은 1565년에 필리핀의 일부 지역에서 통치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였고 어거스틴 수도회를 비롯한 수도회 소속의 선교사들은 일찍이 17세기가 시작될 때까지는 산간 및 남부 지역을 제외한 지역에서 대부분의 필리핀인들을 개종시키기에 이른다. 스페인이 필리핀을 지배한 300년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에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양편이 가지고 있는 목표 즉 기독교선교와 식민통치의 확장을 위하여 서로 유착관계를 추구한 것으로 드러난다. 식민지배 초기에 스페인은 식민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토착민의 자발적 동의’를 추구하였으나, 통치의 현장에서 수행된 수도회 선교사들의 관찰은 스페인 식민세력에 의한 강제적인 통치를 입증할 뿐이었다. 마닐라 종교회의 (1582)는 스페인이 필리핀에서 정치적 권리를 본질적으로 소유하지 않은 한편, 기독교 선교의 환경을 확보하기 위하여 수단적으로 그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보아, 식민통치를 용인하고 ‘교회의 도구로서의 국가’ 개념을 표방하였다. 한편 스페인 식민당국은 수도회 선교사들을 중앙과 지방에서의 식민통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는데 특별히 지방에서 그들의 공무대행은 식민통치에 필수불가결한 것이었으며, ‘국가의 도구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현상이었다. 나아가, 식민당국과 교회는 큰 맥락의 인종-정치적 차별주의로부터 필리핀 토착 사제들에 대하여 차별정책을 시행하였는데 이는 식민통치를 영구화하려는 수단이었다. 결국, 스페인 통치시기 가톨릭 교회, 특히 수도회 선교사들은 부동산 축적, 소작농의 억압, 인종차별 등의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며 사회로부터 신망을 크게 잃게 되었으며, 19세기 후반에 봇물처럼 터진 필리핀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성직자의 식민통치에의 참여를 비판하는 ‘반교권주의’ (Anti-clericalism)는 가장 강력한 투쟁의 목표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