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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敎會史學會誌 KCI 등재 한국교회사학회지 JCH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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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집 (2014년 5월) 8

아시아 교회사

1.
2014.05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아시아 기독교사에 대한 한국에서의 연구를 총 정리한 것이다. 신학 및 교계 잡지에 발표된 글과 단행본, 그리고 일반 역사학 관련 잡지를 검토하여, 가능한 모든 글을 소개하려고 애썼다. 한중일 3국을 주요 범위로 하였지만, 그 밖의 아시아 전체국가를 대상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동남아나 인도, 서아시아 국가의 기독교사에 관한 국내 연구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본문을 통해서,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 1970년대와 1990년대, 2000년대 등 각 시기별 변화에 따라 연구의 주제와 내용이 민족, 선교, 세계화 등의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I장에서는 한국 기독교사의 기원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경교 연구사, 그리고 한국 천주교의 기원과 국제관계, 중국과 일본, 그 밖의 아시아 천주교 연구를 소개하였다. II장은 만주선교와 기독교 민족운동, 한국 개신교의 유래에 대한 연구가 중국개신교사에 대한 관심을 일으켰고, 개혁개방 이후 중국선교에 대한 관심이 반영된 이후, 점차 중국 기독교사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밝혔다. III장은 식민지 시기 한국에 미친 일본기독교의 영향에 대한 관심이 일본개신교사에 대한 연구를 일으켰고, 오늘날까지도 일본기독교의 국내외 영향관계를 중심으로 연구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IV장을 통해서는, 근동지역과 인도에 대한 연구자들의 관심이 아직 부족하지만, 동남아에 대해서는 1990년대 이후 활발한 선교, 국내 이주민의 급증으로 새로운 관심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남아 기독교사 연구는 선교사들의 자료 수집, 번역서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한국에서의 아시아 기독교사 연구는 그동안 한국 기독교사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났고, 따라서 한국 기독교사 전공 학자들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이후 선교를 위한 관심으로 옮겨갔고, 최근에는 주체적인 또는 통합적인 서술로 발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 각국 기독교사에 대한 개별 연구와 통합적인 조망은, 아시아 기독교사 전체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한국 기독교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작업이기도 하다. 본 논문에서 빠진 것이 보충되고 좀 더 세밀한 분석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2.
2014.05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필리핀에서 기독교는 스페인의 식민지배와 함께 시작되었다. 교황청이 하사한 ‘선교보호권’ 아래 남미를 정복한 스페인은 1565년에 필리핀의 일부 지역에서 통치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였고 어거스틴 수도회를 비롯한 수도회 소속의 선교사들은 일찍이 17세기가 시작될 때까지는 산간 및 남부 지역을 제외한 지역에서 대부분의 필리핀인들을 개종시키기에 이른다. 스페인이 필리핀을 지배한 300년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에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양편이 가지고 있는 목표 즉 기독교선교와 식민통치의 확장을 위하여 서로 유착관계를 추구한 것으로 드러난다. 식민지배 초기에 스페인은 식민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토착민의 자발적 동의’를 추구하였으나, 통치의 현장에서 수행된 수도회 선교사들의 관찰은 스페인 식민세력에 의한 강제적인 통치를 입증할 뿐이었다. 마닐라 종교회의 (1582)는 스페인이 필리핀에서 정치적 권리를 본질적으로 소유하지 않은 한편, 기독교 선교의 환경을 확보하기 위하여 수단적으로 그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보아, 식민통치를 용인하고 ‘교회의 도구로서의 국가’ 개념을 표방하였다. 한편 스페인 식민당국은 수도회 선교사들을 중앙과 지방에서의 식민통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는데 특별히 지방에서 그들의 공무대행은 식민통치에 필수불가결한 것이었으며, ‘국가의 도구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현상이었다. 나아가, 식민당국과 교회는 큰 맥락의 인종-정치적 차별주의로부터 필리핀 토착 사제들에 대하여 차별정책을 시행하였는데 이는 식민통치를 영구화하려는 수단이었다. 결국, 스페인 통치시기 가톨릭 교회, 특히 수도회 선교사들은 부동산 축적, 소작농의 억압, 인종차별 등의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며 사회로부터 신망을 크게 잃게 되었으며, 19세기 후반에 봇물처럼 터진 필리핀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성직자의 식민통치에의 참여를 비판하는 ‘반교권주의’ (Anti-clericalism)는 가장 강력한 투쟁의 목표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게 된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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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아시아에 위치한 버마(1998년 미얀마로 개칭)의 소수종족인 까렌족이 서구 제국과의 만남을 통해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고 주권국가 건설을 시도하는 과정에 주목하였다. 버마는 동남아시아에 위치한 불교 국가로 19세기 후반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1946년 1월 해방된 신생 독립국가(버마연방)이다. 버마 역사 상 정치적 주권을 전제한 민족주의운동은 영국이 버마를 식민지화하는 시기 소수종족 까렌족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 시기에 일어난 까렌 민족주의와 그 실천 과정은 당시 서구 기독교 선교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소수종족 까렌족은 서구 선교사들에 의해 소개된 기독교와 서구문명을 구전된 까렌 신화에 나오는 ‘생명의 책’에 대한 예언(백인 형제가 생명의 책’을 가지고 귀환할 때 까렌족의 번영이 이루어진다)의 성취로 보고, 기독교와 서구문명을 열렬히 받아들였다. 그 결과 (버마족과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민족주의를 형성하고 버마족으로 분리된 까렌 독립국 설립을 추구하였다. 언급한 주제를 연구하기 위해 본 논문은 먼저 식민지 전 구(舊)버마 전통사회의 구조를 개관하고 식민지 이후 변화된 사항들을 고찰한다. 다음으로 영국의 식민지 통치 시기 서구 기독교가 까렌족에게 소개되고 전파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와 서구 문명의 영향으로 까렌 민족주의가 형성되고 현실에서 까렌 독립국 설립을 추구하는 과정을 서술한다. 본 연구결과는 19-20세기 초 기독교 선교사들을 통해 들어간 복음과 서구 문명이 버마의 소수종족 까렌족에 주어진 특수 환경, 즉 식민정부의 종족분할정책, 다수 버마족과의 공존, 낙후된 문명과 정령신앙 등의 영향으로 아시아 여타 지역과 다른 형태의 민족주의를 형성하고 실천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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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국개신교의 중국종교에 대한 이해는 사실 그 제국주의적인 선교관점에서 시작되었다. 서방선교사들은 중국종교를 이교문화로 규정하고 중국인을 개화시켜야할 선교적 대상으로 바라다보았다. 그러나 중국문화의 강렬한 반기독교적 정서를 체감하면서 선교사들은 본질적인 면에서 다시금 중국종교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런 이해는 중국인의 종교정서 등을 발견하게 했고 보다 복음이 중국문화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와 더불어 중국신도는 자신의 고유한 토대문화 위에서 기독교를 수용하려고 노력하면서 좀더 적극적인 중국종교에 대한 이해를 개진시켜 나갔다. 우리는 19세기 중국개신교의 노력을 통해 오늘날 단편적인 자신의 이해를 넘어 복음전도를 위해 폭넓은 자신의 이해의 지평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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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개신교회는 1923년 CMA로부터 시작되었으며, 2012년 현재, 2,697개의 교회와 168,887명의 신도로 성장하였다. 이는 캄보디아 국민의 1.19%에 해당한다. 그러나 90년의 선교역사에도 불구하고 캄보디아 개신교회는 자치, 자립, 자전 그리고 자신학화의 기준으로 볼 때, 온전히 자립된 교회라고 보기 어려우며 또한 교회의 지도력을 스스로 발휘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캄보디아 개신교회의 몇 교단/선교단체별 자립과 지도력 이양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1. CMA/KEC: 1923년부터 약 50년 동안 캄보디아 선교를 주도하였으며, 전도와 교회개척 사역을 주로 하였다. 1948년에는 현지 교단 KEC가 조직되었으며, 현재 선교단체인 CMA와 협력하고 있다. 2. OMF 캄보디아: 1973년에 캄보디아 사역을 시작하였으며, OMF 캄보디아 내 한인 선교사들의 교회 설립과 함께 교회 자립과 지도력 이양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3. 캄보디아 침례교회: 1990년부터 시작된 현지인 사역자 중심의 교회개척운동을 통해 한때 캄보디아에서 가장 큰 개신교단을 형성하였으나, 여러 시행착오와 함께 체계적인 교회 자립과 지도력 이양에는 한계를 드러내었다. 4. 캄보디아 감리교회: 2003년, 네 개의 외국 감리교선교부가 MMC로 통합되면서 캄보디아 감리교회가 시작되었으며, 보다 더 온전한 교회의 자립과 지도력 이양의 시점은 2016년, 정식연회가 조직되고 캄보디아인 감독이 세워지는 때로 보고 있다. 5. 캄보디아 장로교회: 2003년, 7개 한국 장로교단 선교사들이 캄장공을 조직하였으며, 2013년, 독노회를 설립함으로 캄보디아인 목사와 장로가 참여하였다. 보다 더 온전한 교회의 자립과 지도력 이양의 시점은 2020년, 총회를 조직하는 때로 보고 있다. 교회 자립과 지도력 이양을 위해서는 외국인 선교사와 현지 교회 그리고 후원 교회/단체 각자가 맡은 역할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은 외국인 선교사가 갖고 있다. 캄보디아 개신교회의 자립과 지도력 이양을 위한 방안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MK 2021> 참여: 캄보디아 개신교회가 하나 되지 못할 경우, 캄보디아 개신교회의 자립과 지도력 이양은 더욱 멀어질 수 있다. 아울러 아직도 캄보디아 전국에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마을이 80%인데, 2021년까지 모든 마을에 교회를 세우려는 이 운동에 캄보디아 내의 모든 개신교회와 교단/선교단체가 초교파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2. 선교적 교회론의 연구와 적용: 전통적이고 제도적인 교회가 아닌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본질인 선교적 교회론을 연구하며, 그러한 교회가 세워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3. 선교사와 목회자의 바른 역할: 외국인 선교사의 역할은 전도와 훈련 사역으로 현지인 목회자를 돕는 것이며, 현지인 목회자의 역할은 직접 교회를 설립하고 목회하는 것이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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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은 가톨릭 신학과 루터 신학을 분리시키는 중요한 차이점에 속하는 조항이다. 구원의 확신이라는 주제를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교파 간 신학적인 논쟁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자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바른 방향 설정을 위해, 1518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이루어진 루터와 추기경 카예탄의 논쟁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아우크스부르크 심문에서 중요한 두 번째 토론 주제는 구원의 확신이었다. 여기서 루터가 주장한 견해에 따르면, 인간이 구원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은 인간 자신이 의롭게 된다는 확고한 확신을 갖고 믿으며 은혜를 받게 될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해 카예탄은 그러한 신학은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것과 같다고 비판하였다. 루터에 따르면, 하나님의 뜻과 말씀(약속)에 대한 확고한 신뢰로서의 믿음은 개인적인 구원의 확신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구원의 근거이시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학에 따르면,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협력하여 이루고자 한다면, 개인적 구원의 확신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루터와 카예탄 사이의 구원확신에 관한 차이는 두 신학자의 구원개념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또한 예큐메니칼 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에 관한 논쟁에서 기본적인 오해들을 제거하는 것이며 새로운 토론을 위한 길을 모색하고 여는 일이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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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아우구스티누스와 조나단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을 비교 연구하기 위함이다. 초대교부들의 전통적 사상을 이어받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적 개념으로 세 위격에 대한 전통적 교리를 정당화하면서 양태론과 삼신론의 위험성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 간의 상호 사랑의 동등한 본질을 강조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은 그 이전 교부들에게서 나타나는 일체성이나 삼위성에 치우친 강조로 인한 난제들을 사랑의 유비를 통해 동시에 균형 있게 강조함으로 서방교회의 심리학적 삼위일체론과 동방교회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모두 분명하게 제시했다. 에드워즈는 동서방교회의 전통 속에서 17세기 개혁적 스콜라주의자들과 청교도들의 사상을 계승해 관계론적 개념으로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독창적으로 발전시켰다. 에드워즈는 성자의 영원출생과 성령의 이중발현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발전시켜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역동적 실재 개념으로 설명했다. 성부를 최초의 자존하는 신성으로, 성자를 신적 성향의 재귀적 명철의 실현으로, 성령을 신적 성향의 재귀적 사랑의 실현으로 보았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의한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띠’로서의 성령은 비인격적인 의미로 오해될 소지가 있었지만, 에드워즈는 성부와 성자의 ‘적극적인 사랑의 행위자’로 성령을 표현함으로 인격성을 뛰어넘는 신적 위격에 합당한 자리매김을 해 놓았다. 또한 에드워즈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의 독특한 우월성을 통해 세 위격의 동등성을 부각시켰고, 관계적이며 사회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향적 존재론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 가정과 공동체 간의 올바른 관계의 본을 제시해 주었다. 이처럼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토대로 독창적으로 계승한 에드워즈는 개인이기주의를 초월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동적 관계성을 강조함으로 동등성과 상호 사랑에 기초한 공동체성과 실천적 경건의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8.
2014.05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에서는 이용도의 시대인식과 조선적기독교를 연구하였다. 먼저 그의 시대인식을 파악하기 위해 그가 조선교회, 선교사 및 서구교회, 그리고 일본을 어떻게 인식하였는지를 고찰하였다. 또 이런 시대인식이 예수교회의 설립과는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그의 조선적 기독교 운동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고찰하였다. 이용도는 조선교회의 정통주의적 주류 신앙에 만족하지 않았으며, 선교사 및 서구교회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그를 전형적인 반교회적, 반선교사적인 인물로는 평가할 수 없다. 그는 협성신학교를 입학한 후 정치적 민족주의를 포기하였다. 때문에 예수교회의 설립은 일본에 대한 민족주의적 동기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이용도가 예수교회를 설립한 이유는 조선교회의 신앙적 체질을 바꾸고자 한 그의 시도가 장로교회의 견해와 상충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적 기독교 운동의 관점에서 예수교회는 서구교회로부터의 신학적, 경제적 독립보다는 신앙의 본질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발생하였다. 체험적이고 실천적인 신앙을 추구하였던 이용도 지지자들은 기성교회의 권위에 부딪히자 독자적인 교회의 설립으로 나아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