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이 연구에서 루더로 태어난 루터는 개명을 통하여 신학적으로 자기이해를 표현하였다고 주장한다. 루터의 자기이해에 있어 결정적인 순간은 1517년 10월 31일 마인츠의 대주교 알브레히트에게 보낸 편지와 관련된다. “거룩한 신학박사로 부름 받은 아우구스티누스회 마틴 루터”라는 서명에는 루터의 신학박사로서의 자유의식과 교직전권 및 그리스도로부터 특별하게 임무가 주어졌다는 자의식이 표현되어 있다. 또한 루터는 1517년 11월 11일 랑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eleutherius’라는 새로운 이름을 스스로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스콜라 신학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음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종교개혁적인 자유사상을 통해 다른 사람을 자유케 하거나 적어도 그들이 자유케 되는 것을 돕는 자라는 의미를 표현한 것이다.
루터의 이름이 표현하는 사실은, 랑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타나 있는 것처럼 루터 자신이 스콜라 신학의 굴레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에 의해 선사된 자유에 대한 의식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스콜라 신학과 면죄부 제도에 나타난 인간의 지혜에 대항하여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가운데 자신의 임무를 행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루터의 개명은 신학적으로 철저히 의도된 것으로 자유한 자, 그리고 동시에 자유케 하는 자의 사명을 표현하는 자기이해인 것이다.
본 논문은 17세기 후반 잉글랜드의 성직자로서 런던에서 설교자로 활동했고, 말년에 이르러 1691년부터 1694년까지 캔터베리 대주교(Archbishop of Canterbury)를 지냈던 존 틸럿슨 (John Tillotson, 1630-1694)의 교회론을 살펴본다. 17세기 후반 잉글랜드 국교회가 처했던 복잡한 상황으로 인해, 당시 국교회 성직자들에게 교회론은 중요한 문제였다. 그들은 개신교 비국교도(Protestant Dissenters)와 로마 가톨릭교도가 국교회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국교회의 특별한 지위 – 잉글랜드 내에서의 유일한 합법적 교회 - 를 옹호해야 했다. 일반적으로, 국교회 성직자들이 사용한 교회론적 논리는 개신교, 에라스투스주의(Erastianism), 주교제주의(Episcopalianism)에 기초한 것이었다. 틸럿슨은 개신교와 에라투스주의의 논리를 사용한 반면, 주교제주의는 옹호하지 않았다. 하지만 틸럿슨의 교회론에는 위에서 언급한 일반적인 논리들을 뛰어넘는 면이 있었다.
틸럿슨은 자비(charity)의 덕목을 교회론의 중심에 놓았다. 그는 잉글랜드 국교회를 로마 가톨릭교회와 비국교도의 회합, 양자로부터 구분짓는 특징이 국교회가 가진 자비의 덕목에 있다고 보았다. 틸럿슨에 의하면, 교리적 오류가 로마 가톨릭교회의 문제이긴 했지만 가톨릭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들이 이단으로 생각하는 비(非)가톨릭 기독교도를 이단으로 간주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또한 틸럿슨은 국교회 편입을 거부하는 개신교 비국교도의 태도에 대해서 자비가 결핍된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틸럿슨의 교회론적 목표는 자비에 기초를 둔 국가적 기독교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는 진정으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라면 서로 사랑하고 하나를 이루라는 예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근거로 틸럿슨은 잉글랜드의 모든 기독교도가 국교회로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학자들은 틸럿슨을 잉글랜드 국교회의 광교파 성직자들(Latitudinarians)의 대표적인 인물로 간주해 왔다. 기존 연구에서 광교파의 주요한 특성으로 여겨지는 것은 이들이 신앙에서 이성의 역할을 매우 중시했다는 점이다. 본 논문은 광교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틸럿슨이 발전시킨, 자비를 중심에 둔 교회론을 새롭게 제시하고자 한다. 틸럿슨의 광교파 동료들은 교회에 대한 그의 의견에 동의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 역시 편협한 태도와 폭력은 비기독교적이라고 생각했고, 기독교의 핵심 가치로서 관용과 자비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자비를 기독교 신앙과 교회론의 중심에 둔 틸럿슨의 태도로부터, 우리는 많은 분열을 경험한 한국 교회의 영적 갱신을 위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강명석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던 것은 2차례 해외 유학이었다. 첫번째 전환점은 1920년대 중반 그는 일본 칸사이학원 신학부에서 공부하였다. 자유로운 신학 분위기 속에서 그는 기독교 사회사상을 접하였다. 일본 유학시절 그는 비참한 민족 현실을 이해하였고, 한센병자들의 고통을 체험하며 목회의 길을 준비하였다.
일본 유학이후, 강명석은 반기독교운동에 대해 대응하는 한편, 현실과 거리를 두고 있는 교회와 교인들을 비판하였다. 그는 교회가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 사회 현실의 이해와 사회사상의 수용이 필요하다고 인식하였다. 그는 사회사상의 역사적 변천과 성경 속에서 담긴 의미 등을 검토하여 한국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였다.
두 번째 전환점은 1930년대 초 미국 밴더빌트 대학교의 유학이었다. 미국 유학과정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환원사상을 접하였다. 환원사 상은 교회의 일치를 표방하며, ‘성서로 돌아가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는 핵심 내용이었다. 그는 환원사상을 한국교회의 내분과 갈등, 충돌을 넘어서 이 땅 위에 참된 교회를 세우는 개혁사상으로 이해하였다. 이를 통한 교회의 일치는 한국교회의 개혁 방향이란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강명석은 졸업직후 감리교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다. 그는 귀국 이후 <그리스도의 교회>를 본격 소개하며 환원운동의 선구자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한국 땅에 세우기 위해 열정적인 활동을 하였다. 비록 환원사상이 보수적 신학으로 평가받음에도 불구하고, 강명석은 한국교회의 내분과 갈등, 충돌을 넘어서 교회의 일치를 지향하며 이 땅 위에 참된 교회를 세우는 개혁사상으로 변용하여 받아들였던 것이다.
일제 식민통치하에 한국은 1920년까지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한국 기독교회는 민족운동의 유일한 공간이요 은신처였다. 그래서 수많은 민족 지도자들이 교회에 들어와 기독교 신앙을 통한 국권의 회복과 나라의 독립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른바 ‘기독교 민족주의’ 운동이 한국의 민족운동사에 전개되었다.
본 논문은 1919년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3.1운동과 임시정부 탄생에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어떻게 활동하였고, 얼마나 기여했는지, 그 내용을 ‘기독교 민족주의’ 시각에서 밝히고자 한다. 따라서 이 논문의 범위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정과 그 후 임시정부 통합과정에서 활동한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의 역할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시기적으로는 1919년 3.1운동 직전부터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고 1920년 12월 5일 이승만이 상해에 도착하여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할 때까지 이다. 그리고 본 논문은 기독교 민족주의자들 가운데서도 중국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과정 가운데 가장 대표성을 띠는 기독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다루었다.
이승만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본격적으로 임시정부 승인외교를 펼쳤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미국 기독교인이 그를 도왔고, 그 중에 주목할 만한 사람이 바로 임시정부와 미국의 언론인들을 잘 알고 있는 여자 선교사 제랄딘 피치(Geraldine T. Fitch)였다. 이승만과 제랄딘 피치는 미국이 한국을 승인하고, 무기를 대여해주어 한국의 독립을 돕는 것이 태평양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제랄딘 피치는 다음 몇 가지 점에서 이승만과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첫째, 제랄딘 피치는 자신의 중국과 미국의 인맥을 통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특별히 그는 장제스의 부인 쑹에이링을 통하여 임정 승인운동을 도왔다. 둘째, 제랄딘은 이승만의 주요 조직인 한미협회와 기독교 인친한회에 다같이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뿐만이 아니라 이승만과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단합된 독립운동을 이루려고 노력하였다. 셋째, 제랄딘은 한국의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승인운동을 미국언론에 널리 알리고, 자신이 직접 TIMES을 비롯한 유수한 언론에 직접 기고함으로서 이승만과 독립운동을 도왔다. 넷째, 제랄딘은 이승만을 지지하여 미국의 독립운동이 이승만을 중심으로 단합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김구와도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승만이 한국의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며, 앞으로도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이끌고 나 갈 사람이라고 보았다. 접
본 연구의 목적은 초기 내한 선교사들이 한국 무속신앙을 어떻게 이해 했는지를 보다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몇몇 연구자들이 선교사들의 한국 무속 이해를 간략하게 언급하였고, 선교사들의 한국 종교 이해를 다룬 연구도 있었다. 그러나 무속신앙에 초점을 맞추어 보다 체계적으로 분석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본 연구는 초기 선교사들이 무속신앙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하나의 창을 제공한다.
본 연구는 선교사들이 인식한 한국 종교 체계 속에서 무속신앙의 위치를 다룬다. 한국인들이 무속신앙을 어떻게 느꼈다고 선교사들이 인식했는지도 다룬다. 한국인들의 무속신앙 인식에 따른 다양한 행동들도 분석한다. 한국인들의 무속신앙 속에서 선교사들이 기복주의를 발견했음도 살펴본다. 악귀와 관련된 다양한 무속신앙의 치유방법들이 선교사들에게 목격되었음도 살펴본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무속신앙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며 대결의 대상으로 삼았음도 확인한다.
본 연구의 방법론은 문헌연구이다. 선교사들은 한국 선교 경험을 토대로 책을 저술하였고, 편지, 잡지, 일기를 통해 그들의 무속신앙에 대한 견해를 드러냈다. 이러한 자료들을 분석하여 선교사들의 이해를 분석하여 정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