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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敎會史學會誌 KCI 등재 한국교회사학회지 JCH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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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제59집 (2021년 9월) 9

1.
2021.09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의 목적은 13세기 시리아 문헌인 『랍반 사우마와 마르 야흐발라하 3세의 역사』에 나타난 몽골제국 시대 칸발리크를 중심으로 몽골 기독교를 살펴보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지만, 13-14세기 유럽의 프란치스코 선교사들(Franciscan missionaries)이나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당시 칸발리크와 중국에서 만났던 바로 그 ‘네스토리안(Nestorians)’ 혹은 ‘네스토리오스 기독교(Nestorian Christianity)’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본인은 13세기 시리아어로 기록된 『랍반 사우마와 마르 야흐발라하 3세의 역사』를 주요 문헌으로 사용하여 1) 동방에 있었던 기독교인들의 명칭을 살펴보고, 2) 랍반 사우마의 입을 통해서 드러난 몽골 기독교의 신앙기원 (사도 도마-앗다이-마르 마리 전통)과 교리를 분석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분석을 바탕으로 본 글은 『랍반 사우마와 마르 야흐발라하 3세의 역사』에 나타난 몽골 기독교는 자신들을 사도 전통을 이어 받은 동방 교회의 일원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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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 가장 큰 논쟁은 성만찬 논쟁이다. 이러한 논쟁을 통하여 종교개혁이전에 일반적이었던 신인양성의 “속성간의 교환(Alloeosis)” 이 마르틴 루터에 의하여 반박되어지고, 그에 의하여 “속성간의 교류 (communicatio idiomatum)”로 주장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속성간의 교류에 상응하는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이 몰트만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신학에서 삼위의 “순환”(“사귐”)으로 전해지면서 신학용어의 오용이 일어났다. 그리스도신앙이해를 위하여 신성의 주도하에 인성을 취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인양성이 상호내재, 침투하여 연합 하는 신학이해가 사회적인 삼위일체론을 위하여 원 의도를 약화시켰다. 교부들이 즐겨 삼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했던 사귐(communio κοιν ωνία), 참여(participatio), 사회적인 관계를 위하여 ‘함께 나누다’(socio), ‘관계’(societas 교제, 사회)를 사회적 삼위일체신학을 위해 사용했으면 훨씬 나을 뻔했다. 그리스도신앙이해를 위하여 신인양성의 속성간의 교류와 삼위일체신앙 이해를 위하여 삼위 하나님의 속성간의 교류를 위하여 ἀντίδοσις ἰδιωμάτων, περιχώρησις가 사용되었으나 이 용어는 그리스도론적으로 신성의 주도하에 인성과의 연합을 표현하는 연합의 상태를 표현하는 말로서 그 의미는 속성 간의 교류, 상호내재, 상호침투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이러한 신 학은 보나벤투라에게서 찾을 수 있으나 인간의 영혼과 인식, 이성에 관련하여 말하고 있어서 루터의 그리스도의 수난이 인성에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가르치는 내용과 차이를 보인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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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는 자신과 종교개혁 신학의 차이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부적절한 이해에 반대해 존 뉴턴에게 자신의 신학은 “칼빈과 머리카락 하나 차이” 밖에 없음을 밝힌 바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웨슬리는 설교 “값 없이 주시는 은총”(1739)에서 “구원의 원천이 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특성을 “받는 모든 사람에게 값없고(free in all), 모든 사람을 위해 값없다”(free for all)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설명했다. 그중 “free for all”은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나 믿는 자에게 그 은혜가 적용된다는 보편 속 죄론 주장으로, 웨슬리가 칼빈주의 TULIP 교리에 반대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free in all”은,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을 받는 모든 사람에게 값없 이” 주어질 뿐 “사람의 능력이나 공로 … 선행이나 의로움 … 이룩한 것이나 됨됨이 … 에 달려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주장에서 웨슬리는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을 온전히 계승한다. 웨슬리가 “free for all”의 주장에서 종교개혁 신학과 다름을 지나치게 강조해 “free in all”에서의 동질성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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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인물인 존 녹스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제도화시킨 종교개혁자다. 녹스는 다수의 설교, 편지, 중요한 저작들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많은 반대를 일으킨 문제작이 1558년에 출판한 『여인들의 괴상한 통치에 반대하는 첫 번째 나팔 소리』이다. 이 글은 잉글랜드 여왕 메리 튜더의 통치를 무력화시킬 목적으로 작성되었지만 여성 혐오와 여성 통치 반대를 일반화시킨 글 전개로 녹스에게 여성혐오주의자라는 악명을 남겼다. 이에 본 논문은 녹스가 『첫 번째 나팔 소리』를 쓰게 된 시대적 배경을 기술하고 그 구체적인 내용을 소개함으로써 이 책의 핵심이 ‘여성 혐오’가 아니라 우상숭배적인 여성 ‘통치자’ 반대라는 것을 밝히려고 한다. 또한 『첫 번째 나팔 소리』 밖의 녹스가 여성 통치자들과 주변 여성들에게 쓴 편지를 살펴보면서 여성 통치자를 인정하고 여성을 존중했던 역사적 녹스를 소개하고자 한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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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은 1888부터 1927년까지 40년을 조선에서 사역했다. 게일은 선교사, 목사, 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한국학 학자이자 교육가였다. 게일이 만난 조선은 콜레라 전염병이 창궐한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세상이었지만, 게일은 ‘하나님의 백성’ 으로서의 신앙적 헌신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자 노력했다. 게일은, 조선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이를 세계에 소개했던 독보적이고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이 글의 목적은, 부산과 서울 곤당골(현재의 중구 남대문로1가와 을지로1가 인근)에서 행한 “착목쟈” 제임스 게일의 초기 사역과 경험이, 이후 조선에서의 40년 동안의 그의 복음전도와 사회활동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게일의 초기 사역에 깊은 영향을 준, 헨리 데이비스(1856~1890), 존 헤론 (1856~1890), 해리엇 헤론(1860~1908)에 대한 연구와 함께, 부산과 서울 곤당 골에서의 사역을 정동(貞洞)과 비교하여 연구한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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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강두송 목사의 글 “婦人問題”을 중심으로 1920년대 초 그의 여성인권 신장에 관한 관점을 고찰하고 현재적 함의와 교훈을 살펴보려는데 목적을 둔다. 그는 고린도전서 11장 2절부터 16절까지를 본문 말씀으로 설정하여 이 글을 작성했으며 1922년 일본강점기에 출판된 『宗敎界諸名 士講演集』에 게재되어 있다. 강두송의 글 “婦人問題”에 나타난 여성인권에 대한 성경적 관점들과 그 현재적 함의에 부각된 주요 논지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린도전서 11장 2절부터 16절 말씀에 대한 그의 사적인 분석을 다루었다. 그는 이 본문에 기초하여 남녀의 인권과 인격의 동등성, 사도 바울의 고린도 여성 성도들을 향한 엄격한 훈계, 시대적 관례 순응과 온건한 개혁추진 등을 제시하고 있다. 둘째, 가정에서의 남편과 아내의 차별대우, 가혹한 오이코스(οἶκος)의 울 타리 철폐, 동등한 교육기회의 부여, 퇴폐문화 퇴치 등에 관한 담론을 살펴 보았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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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이후 급증한 성매매여성을 돕기 위해 세워진 애란원의 설립자 반애란 선교사는 기독교적 여성 인식을 바탕으로 ‘한번 성매매에 빠진 여성은 회복이 불가하다’는 한국 사회의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며 이들에 대한 복지의 필요성을 촉구하였다. 또한 국내 최초의 미혼모 보호시설의 설립을 통하여 태아의 생명 보호 및 모성보호에 가장 먼저 앞장섰다. 이러한 활동은 요보호여성 복지사업에 있어서 다양한 기관들의 관심과 연합을 이끌어내었다. 반애란 선교사의 설립 정신이자 애란원이 추구하는 태아의 생명존중, 모성 보호, 가정보존 등의 가치는 한국 기독교가 지향하는 사회 윤리와도 그 맥을 같이 한다. 결국 애란원의 설립과 성장은 기독교의 가치가 한국 사회 전반에 공유 될 뿐 아니라 정부 정책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유교 전통의 영향력을 대체하는 여성 인식의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 잡은 사례라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점으로 인해 한국 교회사에서도 역사적인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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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구원과 복음 전도적 선교에 집중하던 대한기독교회는 한국민족말 살정책으로 교회와 신앙을 지켜야 할 위기가 닥쳐오자 결연한 저항 운동을 전개했으며 순교를 각오하고 항거했다. 대한기독교회의 저항은 다른 형태의 저항과는 차이가 있었으나 진리 수호를 위해 실질적이며 구체적(역동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저항 역사의 유산은 객관적인 근거가 부족하여 규명되지 않았고 올바른 이해와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침례교는 대한기독교회의 신앙 정체성과 궤를 같이하는 저항 정신을 역사적 유산임을 확인하고 선진들의 용기, 헌신, 희생을 계승하고 물려주어야 할 책무를 위해 대한기독교회에 대한 역사 인식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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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토착인 최초의 목사안수자 가운데 한 명인 김기범(金箕範)의 생애와 그 목회적 성격을 살펴보는데 그 주요한 목적이 있다. 19세기 말, 기독교 복음을 수용한 김기범은 미감리회의 전도인 직첩을 받고 오늘날의 인천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초기 한국 개신교의 토착지도자였다. 복음전도를 향한 열정과 성실, 그리고 그 능력은 일찍이 선교사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정도였다. 그 결과 1901년 5월, 그는 동료 김창식과 함께 한국 개신교 역사에 있어 첫 번째 목사가 되는 명예를 얻는다. 그러나 병약했던 탓에 그는 지속해서 목회하기가 어려웠다. 때로는 선교사 혹은 교인들과의 갈등 도 있었다. 결국 김기범은 1912년 미감리회 한국연회에서 학습인 과정을 탈락함과 동시에 제명처분을 받았다. 이후 미감리회에서 그의 존재는 잊혀졌다. 그러한 이유로 김기범은 그동안 한국교회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본 연구는 이점을 염두에 두고 김기범의 생애 복원에 주된 관심을 둔다. 동시에 그의 목회적 성격도 어떠했는지 함께 파악해 보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