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웨슬리에게서 나타나는 루터 신학의 흔적을 원자료를 중심으로 추적한 연구이다. 그동안 루터와 웨슬리는 칭의와 성화에 상반된 강조를 했다고 서술해왔다. 그 결과 루터를 칭의의 신학자요, 웨슬리를 성화의 신학자라고 칭하고, 이 둘 사이에 커다란 신학적 괴리를 만들었다. 심지어 루터는 이신칭의를 발견한 공은 있으나, 성화에 대한 강조가 없다고 평가절 하하는 반면, 성화를 강조한 웨슬리를 종교개혁의 완성자로 과대평가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루터와 웨슬리는 다름이 아니라 같음의 카테 고리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웨슬리가 말하는 사회적 성화에 대한 단초는 루터의 『선행에 관하여』(1520), 『그리스도인의 자유』(1520) 등 여러 글에서 충분히 발견된다. 성화에 대한 루터의 언급도 『교리문답서』(1529)에 충분히 개진되어 있다. 웨슬리에게서 발견되는 칭의와 성화에 관한 신학적 출처는 그 단초가 종교개혁, 특히 마르틴 루터의 신학에 있다.
따라서 이 논문의 목적은 루터와 웨슬리 사이에 매개물을 찾고, 웨슬리 신학에 등장하는 루터신학적 접점을 찾는데 있다. 접점이란 만나면서 살짝 스치고 다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루터와 웨슬리의 신학적 스펙트럼이 넓고, 제한된 지면은 모든 것을 다루기에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칭의와 성화라는 주제로 제한했다. 사실 루터의 칭의론은, 웨슬리 도 이점에서는 마찬가지이지만, 독립된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죄, 인간, 은총 등 기독교 신학의 핵심 영역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소논문에서는 또 다른 신학적 영역으로의 확장을 자제하고 칭의와 성화의 이해만을 다루었다. 루터와 웨슬리는 칭의와 성화에 대해 같은 틀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서로 다른 결과에 이르렀다. 루터는 칭의와 성화를 서로 다른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반면 웨슬리에게는 순간적 요소와 과정적 요소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그렇지만 칭의와 성화를 하나님의 행위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둘 모두에게 공통된 사항이다. 논문의 의의는 칭의와 성화에 대한 루터와 웨슬리 신학을 이해하는데 루터와 연관된 통전적인 시각을 제공하는 점에 있다.
마리 당티에르는 16세기 종교개혁이라는 대격변의 시기에 자신이 옳다 고 믿는 진리를 온몸으로 외치며 살았던 평신도 여성 개혁자였다. 마리는 한편으로는 오직 성서의 원리에 근거하여 로마가톨릭교회의 잘못된 신학과 실천을 비판하고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대안으로 제시한 종교개혁자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만인제사장 원리에 기초하여 남성중심적인 기존 질 서에 대항한 여성 권리의 옹호론자로 아마도 시대를 앞서간 페미니스트가 아닐까 싶다. 이와 같이 마리는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여성 권리를 옹호하는 “이중의 개혁”을 주창하였다.
필자는 먼저 마리 당티에르가 활동했던 16세기 제네바의 역사적 상황을 개관할 것이다. 당시의 제네바의 역사적 맥락을 아는 것은 마리의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그런 다음 필자는 마리의 대표적 저술인 『편지』에 주목할 것이다. 『편지』의 배경, 내용, 중심사상 등을 살펴보면서 마리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인 동시에 페미니스트였음을 논증할 것이다. 또한 제네바의 대표적 개혁자였던 칼뱅과 마리의 관계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마리 당티에르라는 여성의 목소리를 복원함으로써 그동안 묻혀 있던 16세기 여성 개혁자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종교 개혁을 보다 온전하고 균형 있게 해석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마르틴 루터는 성직만이 아니라 신앙으로부터 유래한 세상의 모든 직업 이 하나님의 소명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고, 이신득의에 근거해서 신앙으로 부터 유래한 모든 일이 선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상업에 대해 공정한 거래와 경제적 형평성을 주장했고, 그 당시 사치와 쾌락을 위한 해외 무역과 독점에 대해서는 비판했다. 루터는 산상설교에 따라 이자를 받는 것을 금했지만, 세상 왕국에서는 5%정도의 이자 받는 것을 인정했다.
루터는 고리대금과 함께 토지를 통한 지대수익을 금지했고, 지대(zinss) 와 지대수익(zinsskauf)을 통해 누리는 불로소득을 환수하여 다른 세금을 대신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급진주의자들이 주장하던 재산의 공유화를 비판하고 사유재산 제도를 인정했다. 그는 가난한 이웃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발적인 사랑과 봉사를 강조했으며, 정부가 가난한 자들을 보살펴 주고 가난한 아동들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했다.
결국, 루터의 경제사상은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사회약자를 보호하는 희년사상을 계승했다. 경제사상에 있어서 루터의 가장 큰 관심은 공평과 정의였기 때문이다. 그의 경제사상은 그 당시 교회 안에 국한된 교훈적 가르침만이 아닌, 교회와 사회, 도시와 제국 전체를 향한 제도적이며 구조적 차원의 변화와 실천적 가르침이었다.
한국 개신교의 초기 출판은 동아시아에서 기독교 선교 역사가 가장 깊은 중국의 출판물들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영역 뿐 아니라,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계도 일본 출판계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중국 기독교 출판계의 영향력은 한반도에서 서서히 약화되어 갔으며, 「구미 → 중국 → 일본 → 한국」이라는 근대 기독교 출판계의 영향 구조가 「구미 + 일본 → 한국」이라는 도식으로 변화해 갔음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는 「구미 → 한국」이라는 구조로 재편 되면서, 나름의 주체적 기독교 출판의 역량 확보를 도모해가게 된다.
일제하 한국 기독교 출판은 그러한 한계들과 미숙함 속에서도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창출신학이 움트는 모판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감당했으며, 해방 이후 현대 한국교회의 역동적인 신학담론과 저술들이 출판될 수 있는 기틀을 다지는 하나의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경건주의의 기원으로 간주되는 요한 아른트 (1555-1621)는 독일 근대사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루터교에서의 아른트의 위치와 평가는 중세 신비주의의 문헌 그리고 영성주의와 같은 종교개혁의 외적 문헌들이 그의 작품을 통해 17세기 개신교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는 것에 달려 있다. 아른트는 자신의 주저 “참된 기독교에 관한 4권의 책” (1605-1610)을 통해 요한 타울러, 독일 신학, 앙겔라드 폴리그노, 그리스도를 본받아, 발렌틴 바이겔 그리고 파라첼수스 등을 수용하였다.
본 논문은 아른트의 기도 서적 “천국의 작은 정원” (1612)에 대한 문헌 비평이며, 이러한 문헌 비평을 통해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중세 신비주 의자 버나드의 문헌 그리고 버나드의 영성 아래서 전승된 위 버나드 문헌들을 밝혀 낸 연구이다. 또한 아른트의 기도 서적 속에서 드러난 수난 신비주의, 신랑 신부 신비주의, 사랑의 신비주의, 예수 이름 신비주의 등 다양한 일치 신비주의는 버나드 없이는 이해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논문은 한국 장로교회의 기독교 사회주의 사상과 협동조합 운동에 대한 연구이다. 유재기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 정부수립 시대에 기독교 민족운동을 이끈 지도자 중 하나였다. 이러한 그의 활동 때문에 그는 기독교 민족주의자로 알려져 왔다. 그는 배민수, 최문식과 함께 1920년대와 1930년대의 한국 장로교회의 기독교 농촌운동을 시행하였다. 배민수의 기독교 농촌운동의 핵심 개념은 농촌의 복음화였고 최문식의 농촌운동의 핵심 사상은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반면에 유재기의 농촌운동의 핵심 개념은 기독교 사회주의 실천이었다.
그는 일본의 기독교 사회주의자인 가가와 토요히코와 스기야마 모토지로의 영향을 받았다. 유재기는 가가와 토요히코의 협동조합운동과 스기야마 모토지로의 농민학교를 모델로 세 단계의 기독교 농촌운동을 구상하고 실천하였다. 첫 단계는 농촌연구 둘째 단계는 농촌의 기독교화 셋째는 기독교적 경제공동체의 건설이었다. 그는 이에 따라 첫 단계의 농촌연구회 둘째 단계가 예수촌 건설 셋째 단계가 협동조합 구성이었다.
유재기는 한국 기독교계에 본격적으로 협동조합의 기원과 세계의 협동 조합 현황을 소개하였다. 1930년대에 한국 기독교회 내부에서 협동조합에 대한 지속적이고 깊은 관심을 가진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협동조합을 교회와 농촌마을에 확산시켜 교회와 농촌 마을의 경제적 관계를 재구성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농촌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소비자 협동 조합, 소비자 금융조합 그리고 생산자 협동조합으로 단계적 도입을 주장하 였다.
유재기는 한국 기독교 사상가 중 드물게 나타났던 기독교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기독교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의 사상의 폭력적 이념과 다르다고 보았다. 기독교 사회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윤리적 교훈에 기초한 자발적 사랑의 정신으로 사회적 경제적 평등을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유재기는 마르크스주의 진화론 그리고 세속화를 비판하였다. 그는 기독교 윤리적 실천이 이런 근대적 세속 사상에 대한 대안으로 여겼다.
최근 한국의 자본주의의 한계에 대한 여러 가지 경고음이 들려오고 있 다. 한국의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유재기가 주장했던 기독교 사회주의와 기독교 협동조합 운동으로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본 논문은 독일 루터교 경건주의 운동의 한 정점을 이루었던 할레 경건 주의의 주도자인 A. H. 프랑케가 자신이 속해 있던 당시의 루터교회 타락의 원인과 목회자의 경건에 대한 생각을 고찰하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회심 체험으로 신앙의 확실성을 획득한 후 이전과 달리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 실천적이고 열매 맺는 신앙과 신학을 추구했다. 그는 ‘교리의 개혁’을 넘어 ‘삶의 개혁’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교조적인 법정적 칭의론에 안주하던 정통주의자들로부터 오해 받고 공격 받았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러한 정통주의자들의 무능과 허위와 위선의 모습 속에서 마태복음 7:15-23에 나오는 거짓 예언자의 모습을 보았고, 이 들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그는 교회 타락의 주된 원인은 거짓 예언자(목회자)들이 득세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거짓 목회자들은 영적인 상태나 경건의 실천에 장애가 있는데, 그 장애의 뿌리에는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것을 참된 신앙과 경건의 문제와 연결시키는 것이 A. H. 프랑케의 독특한 관점이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A. H. 프랑케가 수행한 개신교 자체에 대한 이러한 통렬한 자기반성은 비록 콘텍스트가 다르긴 하지만 한국 개신교회가 개혁을 논할 때 충분히 숙고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 논문은 올더스게이트 회심 이전까지 ‘초기’ 존 웨슬리의 목회직 이해를 원자료를 중심으로 역사신학적으로 접근하여 연구한다. 웨슬리의 초기 목회관은 어린 시절의 경험과 신실한 잉글랜드국교회 신자였던 부모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 부모의 신학과 그들의 목회 모델을 통해 웨슬리는 목 회직에 대한 이해를 형성하였으며, 엡웟에서의 가난한 삶은 그가 인간의 필요와 관련하여 혁신적인 목회를 추구하도록 이끌었다. 부모에게서 물려 받은 잉글랜드국교회 고교회 정신은 웨슬리가 조지 허버트와 성 키프리안과 같은 이들의 저서를 읽으며 그의 의식 가운데 더욱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적어도 조지아 선교시기까지 웨슬리는 고교회적 성직자 중심의 목회직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초기 웨슬리는 회심 이후와는 달리 목회자가 되기 위한 기본 요건으로 사도적 계승의 선상에 있는 주교의 안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나아가 웨슬리는 목회직에 있어 성례 집례를 강조 하였는데, 이는 지나치게 성례가 예배 가운데서 사라져 가고 있는 현대 개신교회들과 개신교 목회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